•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2. 영토확장
  • 2) 백제 방면

2) 백제 방면

 고구려는 백제와의 사이에 介在해 있는 낙랑·대방군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자 백제방면으로의 진출을 기도하였다.≪三國史記≫에 따르면 양국관계는 고국원왕 39년(369)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고 있다. 이 해에 고구려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의 雉壤(白川)을 공격하였던 것이다.205)≪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39년. 그러나 백제 近肖古王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水谷城(新溪 부근) 북방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206)≪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구수왕 즉위년. 고구려는 고국원왕 41년 재차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또 다시 패배하고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207)≪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41년.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은 대내적으로 내정정비를 통한 정치적 안정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선왕의 복수를 위하여 백제공략에 온 역량을 집중시켰다. 당시 요동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前秦과의 화해를 도모하여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요인을 없애는 한편 대외진출의 주된 방향을 백제쪽으로 향하였다. 소수림왕은 즉위 5년(375) 빼앗겼던 수곡성을 수복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수 차례에 걸친 대백제공략의 결과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이 무렵 백제는 그 국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근초고왕대를 전후한 시기여서 고구려의 침략을 능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소수림왕을 뒤이은 고국양왕대까지도 계속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禮成江을 사이에 두고 白川·新溪사이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일 뿐이었다.208)孔錫龜, 앞의 글, 248∼249쪽.

 한편 4세기 종반에 접어들면서 이제껏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던 백제방면으로의 진출은 외교관계의 변화와 더불어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즉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신라간의 관계가 백제 禿山城主의 신라 도망사건을 계기로 하여 갈등을 빚게 되었고,209)≪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내물이사금 18년. 새로이 고구려―신라간의 우호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고구려의 대백제공략전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광개토왕은 즉위하면서부터 백제공격에 나섰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즉위 원년(391) 7월에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石峴城 등 10여 성을 탈취하였고 10월에도 백제의 요충지인 關彌城을 공격·함락시켰다.210)關彌城 공격 기사는<廣開土王陵碑>의 永樂 6년조(396)에 포괄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高句麗廣開土王紀の對外關係記事>,≪三上次男博士頌壽紀念東洋史考古學論集≫, 1979, 266∼271쪽). 이에 대응한 백제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으나 고구려의 군사적 우세가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양국의 국경선은 임진강―예성강부근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211)孔錫龜, 앞의 글, 257쪽. 이후 광개토왕은 즉위 6년에 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阿利水(한강)를 건너 백제왕성(서울시 강동구 몽촌토성)212)崔夢龍,<漢城時代 百濟의 都邑地와 領域>(≪震檀學報≫60, 1985), 216∼218쪽.을 공격하니, 백제 阿莘王은 남녀 1천 명과 細布 1천 필을 바치고 “앞으로는 영원히 고구려의 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 정벌전에서 광개토왕은 58城 700村을 취하고 백제의 王弟·大臣 10여 인을 이끌고 돌아오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고구려군에 의해 국도가 공격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은 백제는 倭·任那加耶 등과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이는≪삼국사기≫및<광개토왕릉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백제는 아신왕 6년(397) 倭에 태자 腆支를 파견하여 왜와의 연합을 구체화시켰다.213)≪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3, 아신왕 6년.
이 시기 人質이 請兵使的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는 梁起錫,<三國時代 人質의 性格에 대하여>(≪史學志≫15, 檀國大, 1981), 55∼56쪽 참조.
이어 백제는 몇 차례 고구려 침공을 기도하였고214)≪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3, 아신왕 7년·8년. 왜와 연합하여 왜·가야연합군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케 하였으나(<광개토왕릉비>영락 9년조), 광개토왕의 반격으로 오히려 고구려군이 신라·가야지역까지 진출하였다(영락 10년조). 이후에도 백제는 왜와 함께 고구려 영토인 대방군 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영락 14년조).

 한편 고구려는 5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방면의 상황이 급변하자 대외진출의 주된 방향을 후연쪽으로 전환하였던 것 같다. 이는 광개토왕의 대외관계 기사가 대후연방면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삼국사기≫ 기록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215)≪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11년·13년·14년·15년.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대백제관계에 있어서도 영향을 끼쳐 양국의 전선은 교착상태를 보이고 있다.

 광개토왕을 이은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강력한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22년(434) 북위가 북연을 정벌하고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장수왕은 북위와의 우호관계를 적극 추진하였다. 북위와의 관계가 안정되자 고구려는 백제에 대하여 재차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고구려 조정의 남진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으로 나타난 평양천도는 백제와 신라에게 위협이 되었고, 특히 고구려와 오랜 讐鳩之間이었던 백제에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백제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216)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71쪽. 양국은 공동의 적이 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연합을 추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나제동맹」이다. 또한 백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통하여 고구려에 대한 봉쇄전략을 추진하였다. 즉 백제 蓋鹵王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에 따른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불러 일으켰다. 격분한 장수왕은 63년 9월에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고구려 왕 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王都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를 못하였다. 고구려병이 군사를 4갈래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을 이용하여 성문을 불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아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서 서쪽으로 달아나매 고구려인이 쫒아가 살해하였다(≪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고구려군의 한성함락과217)이 당시의 漢城은 南城과 北城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고구려군은 먼저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을 공격하였다. 남성에 있던 개로왕은 도망하다 붙잡혀 阿旦城 아래서 살해되었다(≪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여기서 북성은 風納洞土城에, 남성은 夢村土城에 비정되고 있다(李道學,
≪百濟 執權國家形成過程 硏究≫, 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991, 159∼160쪽).
개로왕의 비극적인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공략한 데 그치지 않고 이 지역을 영토화하려 하였으므로 백제는 수도를 남쪽인 공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숙원이던 한강유역을 확보하고218)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에 따른 의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朴成鳳,<高句麗의 漢江流域 進出과 意義>(≪鄕土서울≫42, 1984).
申瀅植,≪韓國古代史의 新硏究≫(一潮閣, 1986), 260∼282쪽.
이를 기반으로 하여 남양만에서 충청도 북부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삼국사기≫地理志를 보면 한강 이남의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 일부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으니 즉 경기도 여주·안성 및 화성군 일대와 충청북도 진천·음성·괴산·충주 그리고 충청남도 직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는 6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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