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2. 영토확장
  • 3) 신라 방면

3) 신라 방면

 고구려는 5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는 대백제전략의 일환으로서 신라가 필요하였고, 신라 또한 고구려와의 우호를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양국관계 속에서 광개토왕의 「庚子年 出兵」이 있었다.<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왜·가야 연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5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진출해 신라에 침범한 왜·가야 연합군을 격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나가야까지 추격하여 이들을 공략하였다. 고구려는 이를 계기로 하여 죽령 동남쪽의 일부 지역을 세력권내에 포함시켰을219)李道學,<高句麗의 洛東江流域進出과 新羅·伽倻經營>(≪國學硏究≫2, 1988). 뿐만 아니라 신라지역 깊숙히 군대를 주둔시키고220)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에 대하여는<中原高句麗碑>에 기록된 ‘新羅土內幢主’라는 명칭과≪三國遺事≫권 1, 紀異 1, 實聖王 및≪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8년 2월 기록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5세기 이후 상당기간 동안 양국은 고구려의 일방적 우위하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구려는 평양천도 이후 남진정책을 본격화하였다. 내륙교통의 요충지인 충주에 國原城을 설치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진출의도를 드러낸 것도221)李道學,<廣開土王代 高句麗의 南征과 國原城>(≪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참조. 이 때를 전후한 시기의 일로 보여진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백제와의 연합 즉 「나제동맹」을 통하여 고구려의 압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소백산맥 일대의 영월―단양―중원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신라의 도발을 경계하였다.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신라의 노력은 訥祗王 34년(450) 悉直原(삼척)에서 일어난 고구려 장수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표면화하였다.222)≪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34년 7월. 이어 慈悲王 7년(464)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병 100인이 살해된 사건은223)≪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8년. 양국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 때 신라가 고구려에 공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도 당시 고구려가 백제와의 심각한 소모전 때문에 신라경영을 소홀히 한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224)李道學,<新羅의 北進經略에 관한 新考察>(≪慶州史學≫6, 東國大, 1987), 25쪽. 고구려는 이와 같은 신라의 행동을 응징하려고 하였다. 장수왕 56년(468)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하여 신라 북방의 요충지인 실직성(삼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신라공격은 백제와의 관계 때문에 지속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한 것 같다. 반면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비책을 서두르게 되었다. 한편 신라에 대한 영향력의 감퇴를 겪으면서까지 백제공략에 힘을 기울이던 고구려는 장수왕 63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여 한강 이북지역을 확보한 이후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에 나섰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변을 공격하여 狐鳴(靑松)등 7성을 탈취하고 다시 彌秩夫(興海)로 진군하여… (≪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3년).

 즉 炤知王 3년(481)에 고구려군이 경주부근에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소백산맥의 죽령 이남에서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인 경상북도 울진·영덕·진보·임하·청송 등의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광개토왕대의 경자년 출병 이후 장수왕대에 이르는 기간 어느 시기에 고구려가 이들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어 고구려는 백제―신라 연합에도 불구하고 이들 양국의 북부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충청북도 중부 내륙지방까지 장악하였는데225)이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金貞培,<高句麗와 新羅의 領域問題 ―順興의 考古學 資料와 관련하여―>(≪韓國史硏究≫61·62, 1988).
鄭雲龍,<5세기 高句麗 勢力圈의 南限>(≪史叢≫35, 1986).
―――,<5∼6世紀 新羅―高句麗 關係의 推移>(≪新羅의 對外關係史 硏究≫,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15, 1994).
金秉柱,<羅濟同盟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6, 1984).
이러한 상황은 5세기말∼6세기초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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