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2. 영토확장
  • 4) 낙랑·대방군 고지

4) 낙랑·대방군 고지

 고구려가 4세기 초반 樂浪·帶方郡을 병합한 이후 이 지역을 어떻게 지배하였을까 하는 문제는 이에 대한 문헌기록이 없어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단지 이 지역에 남아있는 고고학적 자료 등을 통하여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낙랑·대방군 故地에는 천여 基가 넘는 塼築墳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26)일례로 樂浪郡治址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낙랑토성 주변에는 1925년부터 1926년 사이 日人들에 의해 조사된 전축분만 해도 926基나 된다고 한다(關野貞外,
<樂浪郡時代の遺蹟>,≪古蹟調査特別報告≫4, 朝鮮總督府, 1927, 46∼47쪽).
이 전축분의 분포범위는 황해도와 평안남도의 일부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며227)梅原末治·藤田亮策,<樂浪> 坤 (≪朝鮮古文化綜鑑≫3, 1959), 80쪽. 그 축조시기는 대방군의 설치를 전후한 시기부터228)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吉川弘文館, 1966), 43∼45쪽. 5세기 초엽에까지229)孔錫龜,<平安·黃海道地方 出土 紀年銘塼에 대한 檢討>(≪震檀學報≫65, 1988), 10쪽. 해당된다고 한다. 이것은 낙랑·대방군이 멸망된 이후 약 1세기가 지나도록 전축분을 매장풍습으로 하는 주거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들 집단은 서해안을 이용하여 중국의 각국과 교섭하며 그들의 年號 紀年을 채용하여 연대 표기에 사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축분 축조집단들은 중국의 관직을 사용하여 주변에 과시하려 하였고 그들이 사용한 성씨조차 우리 삼국의 전통과는 다른 漢化된 성씨를 사용하고 있었다.230)孔錫龜, 위의 글, 19∼20쪽. 이와 같은 전축분 축조집단의 성격은 분명치 않지만 보다 중국화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231)孔錫龜, 위의 글, 27∼28쪽. 주지하다시피 전축분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묘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문화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들 집단과 고구려와의 정치적 관계는 율령을 바탕으로 한 고구려의 직접적인 행정지배를 받던 상태는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고고학적인 자료는 安岳 3號墳이다.

 안악 3호분은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인데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벽화고분 중 최대급에 속하는 것으로서 내부에는 화려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학계의 관심을 끈 부분은 고국원왕 27년(357)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 중국계 이주민인 冬壽란 인물에 대한 墨書銘이 쓰여져 있다는 점이다. 동수는≪資治通鑑≫에 그 행적이 나타나 있는데, 前燕의 고위관직에 있었으나 내분으로 인하여 고국원왕 6년 고구려로 망명해온 인물이다.232)≪資治通鑑≫권 95, 晉紀 17, 成帝 咸康 2년. 명문의 주인공인 동수를 과연 고분의 被葬者로 볼 수 있는지의 여부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233)일찍이 발굴을 담당했던 北韓에서는 중국인 冬壽의 무덤으로 해석하였다가 1960년대 중반 이후 고구려왕 즉 美川王의 무덤으로 견해를 수정하였고, 다시 1980년대 후반부터는 故國原王의 陵으로 재수정하였다. 남한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론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피장자를 동수로 파악하는 입장이 우세하며 중국, 일본학자들의 대다수는 동수의 무덤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사적인 정리는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譯註 韓國古代金石文≫1(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59∼71쪽. 무덤안에 피장자 아닌 다른 사람의 묘지문을 기록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판단 이외에도, 4세기 중엽 당시 兩郡 故地의 또 다른 고고학적 상황을 고려할 때 무덤의 피장자를 동수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리라 생각된다.234)孔錫龜,<安岳 3號墳의 墨書銘에 대한 考察>(≪歷史學報≫121, 1989).
林起煥,<4세기 고구려의 樂浪·帶方地域 경영>(≪歷史學報≫147, 1995) 참조.
그렇다면 4세기 중엽 황해도 안악군지역에는 중국계 이주민인 동수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고고학적인 자료는 德興里 壁畵古墳이다. 이 고분은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발견된 석실봉토분의 벽화고분인데, 그 안에서 다양한 내용의 벽화와 함께 피장자의 묵서묘지명이 발견되었다. 피장자는 중국계 이주민인 ‘□□氏 鎭’이란 인물이다. 묘지문의 내용중에는 고구려 광개토왕대에 사용되었던 永樂이라는 고구려 고유의 연호기년(영락 18년 ; 408)이 확인되었다. 또한 그가 역임한 관직중에는 國小大兄이란 고구려 고유의 관직이 보이고 있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추정케 하였다. 고구려의 北中國지방 지배를 연상케 하는 幽州刺史라는 관직도 주목을 끌었다. 이처럼 중국계 이주민이면서 고구려의 강력한 지배를 받은 듯한 흔적이 농후한 덕흥리고분 피장자의 분명한 성격에 대하여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지만,235)덕흥리 고분의 피장자인 ‘□□氏 鎭’이란 인물의 계통에 대하여 학계의 대체적인 해석은 중국계 망명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학자들은 고구려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사적인 정리는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앞의 책, 79∼90쪽. 피장자와 고구려와의 정치적 상호관계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兩郡지역에 대한 지배방식을 확인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36)武田幸男,<德興里壁畵古墳被葬者の出自と經歷>(≪朝鮮學報≫130, 1989), 29∼32쪽.
林起煥, 앞의 글(1995), 28∼43쪽.

 이상과 같은 몇 가지의 고고학적 자료를 검토해 볼 때 양군 고지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방식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양군 멸망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첫번째 접촉기사가 나타나는 4세기 중엽까지이다. 즉≪삼국사기≫등의 사료에 양국관계가 시작되는 것이 4세기 중엽 이후(369)부터라는 점은237)≪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39년.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양군 고지에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백제간의 접촉기사는 고구려가 양군 고지에 대한 지배체제를 어느 정도 완료한 데 따른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 시기 고구려의 양군 고지에 대한 지배는 이 지역의 문화적·사회적 특수성을 인정하여 이들의 대표자를 내세운 이른바 간접지배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당시 이 지역에 중국적 전통이 강한 전축분 축조집단의 존재나 안악 3호분에 나타난 다양한 중국적 요소 등을 통하여 짐작할 수가 있다.

 둘째 단계는 4세기 중엽(369) 이후 5세기초 광개토왕대까지이다. 이 때 고구려는 양군 고지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통제력을 강화·확립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5세기초를 하한으로 설정한 이유는 광개토왕대인 5세기초를 경계로 하여 중국적 전통이 강한 전축분이 축조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양군 고지에 있던 토착세력들의 정치·사회적 질서체제가 완전히 해체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덕흥리고분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 고유의 연호기년(영락) 채택과 고구려의 관직 사용 등의 사실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는 이후 광개토왕에 의한 대백제진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