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2. 영토확장
  • 5) 기타 지역

5) 기타 지역

 고구려는 북쪽에 접하고 있던 夫餘방면으로의 진출을 기도하였다. 당시 부여는 285년 모용씨의 침략으로 인하여 왕이 죽는 등의 타격을 입고 옥저 지방으로 피했다가238)≪資治通鑑≫권 81, 晉紀 3, 武帝 太康 6년. 다시 나라를 세웠으나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고구려는 부여를 압박하여 그 근거지인 鹿山(吉林지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의 압박에 밀려 서쪽의 農安부근으로 쫒겨간 부여는 346년 前燕의 침입을 받아 국도가 함락되는 등의 피해를 당하였다.239)≪資治通鑑≫권 97, 晉紀 19, 穆帝 永和 2년 정월. 전연군은 계속하여 동쪽으로 진군하였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퇴각하였다.240)武田幸男,<牟頭婁一族と高句麗王權>(≪朝鮮學報≫99·100, 1971), 164∼165쪽. 고구려는 새로 장악한 부여지역에 대하여 관리를 파견하여 지배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牟頭婁무덤에 쓰여진 墓誌 중에 고구려의 부여지배를 상징해주는 ‘北夫餘守事’라는 관직 명칭을 통하여도 짐작할 수가 있다. 4세기 중반 이후 부여지역이 고구려의 영역화되었음은 장수왕 23년(435) 평양을 다녀간 北魏의 사신 李敖가 “고구려의 영토가 북으로는 舊夫餘에 이르고 있다”고 한 사실에서도241)≪魏書≫권 100, 列傳 88, 高句麗.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전연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농안방면의 부여는 다시 국가를 세웠으나 그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일방적인 종속관계에 놓여 있던 부여는242)盧泰敦,<夫餘國의 疆域과 그 變遷>(≪國史館論叢≫4, 1989), 43∼44쪽. 5세기 중엽 무렵 勿吉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文咨明王 3년(494) 부여왕이 고구려에 항복함에243)≪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문자명왕 3년. 따라 그 영토가 완전히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동쪽에는 일찍이 부여에서 갈려져 나와 나라를 세웠던 또 다른 부여가 있었으니<광개토왕릉비>에는 이를 東夫餘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왕은 즉위 20년(410)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동부여 왕성을 함락시켰으니 고구려 동쪽의 부여세력마저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244)孔錫龜,<廣開土王陵碑의 東夫餘에 대한 考察>(≪韓國史硏究≫65, 1989). 또한 고구려는 서북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여 시라무렌河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245)千寬宇, 앞의 글, 520∼522쪽.
한편 그 소재지를 奉天방면 渾河일대로 比定하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東洋文化硏究所紀要≫78, 東京大, 1979, 104∼109쪽).
契丹을 공격하였다.246)≪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2년.
그런데<광개토왕릉비>에는 거란 공격이 永樂 5년(395)의 일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室韋에 鐵을 공급해주는 등247)≪隋書≫권 84, 列傳 49, 室韋. 내몽고 동북부지역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牡丹江 동쪽, 연해주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248)李丙燾,<廣開土王의 雄略>(≪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387∼388쪽. 肅愼도 영락 8년(398)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거란족 및 숙신족의 일부를 토벌하여249)≪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2년
<廣開土王陵碑>永樂 8년.
이 지역을 세력화한 고구려는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북방으로의 진출을 기도하였다. 이 때 서북방에서는 勿吉이 세력을 확대해 오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는 물길이 북위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수왕 67년(479) 외몽고지방에 있던 柔然과 연합하여 거란족의 일파인 地豆于의 분할 점령을 시도하였다.250)≪魏書≫권 100, 列傳 88, 契丹. 지두우는 당시 흥안령산맥 주변인 시라무렌하 북방에 있으면서 서쪽으로 유연과 접하고 있던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251)白鳥庫吉,<東胡民族考>(≪白鳥庫吉全集≫4, 岩波書店, 1970), 185쪽. 이는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흥안령산맥 부근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로써 고구려는 5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동쪽과 북쪽으로는 북부여 및 동부여지역을 정복하고 거란 및 숙신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요동지역을 영토화하였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유역 및 충청도 북부지역과 소맥산맥 이남의 영일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孔錫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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