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3. 5∼6세기의 대외관계
  • 1) 중국의 남북조와의 관계

1) 중국의 남북조와의 관계

 새로운 북방의 강자로 北魏가 등장함으로써 중국은 오랫동안 지속되던 5호16국시대라는 극심한 혼란기가 끝나고 새로이 南北朝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즉 남조의 宋과 북조의 북위가 서로 중국의 통일을 지향하며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그 주변에 있는 국가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존립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개토왕대에 급속한 국력의 신장을 이룬 고구려도 또한 새로운 국제질서 환경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아시아 질서의 한 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한반도내 삼국의 대외관계도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규정을 받아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254)林起煥,<고구려와 수·당의 전쟁>(≪한국사≫4, 한길사, 1994), 139∼140쪽.

 後燕과의 치열한 투쟁 끝에 요동지방을 확보한 고구려는 북연을 사이에 두고 북위와 대립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24년(436) 北燕王 馮弘의 고구려 망명사건은 새로이 국경을 접하게 된 고구려와 북위간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고구려는 북위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풍홍을 살해하였지만 이는 또 다른 갈등을 야기시켰다. 북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송이 개입하였고 고구려와 송·북위간에는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255)≪宋書≫권 97, 列傳 57, 高句驪國. 풍홍의 고구려 망명과 살해는 고구려의 북위 및 송에 대한 다중적인 외교정책으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북위는 계속 세력을 확대하여 439년에 北凉을 멸망시켰고, 446년에는 서방의 吐谷渾을 공략하였다.256)≪魏書≫권 101, 列傳 89, 吐谷渾. 북위의 팽창은 인접해 있는 고구려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장수왕 15년(427) 평양천도 이후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던 고구려로서는 무엇보다도 서변의 안정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위 주변에 있는 국가들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북위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북방에서 북위와 강력하게 대립하고 있던 柔然과의 교섭을 통하여 북위를 견제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남조인 宋과도 연결하였다. 이는 당시 유연과 송도 또한 북위를 적대국가로 인식하였던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구려가 풍홍사건 이후 약 20여 년간이나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던 사실에서 당시 고구려의 대북위관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 50년 북위에 사절을 파견함으로써257)≪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50년. 한때 단절되었던 양국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당시 고구려가 북위와의 관계개선을 서둘렀던 배경 중에는 남쪽에서 백제―신라의 연합이 가시화되어 고구려를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북위도 당시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송·유연 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고구려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양국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고 고구려는 매년 사신을 파견하다시피 하며 북위와의 우호관계 유지에 노력하였다. 당시의 양국관계는 조공과 책봉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258)盧泰敦, 앞의 글, 35∼42쪽. 양국관계를 시사해 주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북위는 그 주변국 가운데 고구려왕의 지위를 높게 책봉하였으며, 또한 외국사절에 대한 연회에서의 입장순서와 외교사절에게 배정한 숙소에서 고구려 사신을 남조 사신에 이어 제2위로 대우하였다.259)≪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 高麗國.
≪資治通鑑≫권 136, 齊紀 2, 武帝 永明 2년 10월.
뿐만 아니라 북위에서 고구려에 파견한 사절의 횟수만 하더라도 북위의 대외 사신 파견국 가운데 남조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260)三崎良章,<北魏の對外政策と高句麗>(≪朝鮮學報≫102, 1982), 129∼131쪽. 이는 북위가 고구려를 얼마나 중요한 상대자로 여기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261)한 예로 489년 北魏의 宴會에서 고구려 사신을 南齊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남제의 사신이 북위 조정에 이를 공식 항의했다는 사실에서 당시 북위가 고구려를 상당히 배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 高麗國).

 그러나 양국관계가 시종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장수왕 54년(466)에는 북위의 청혼을 고구려가 거절함으로써 두나라의 관계는 냉각되었으며,262)≪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54년. 이어 북위에 왔던 백제사절의 고구려영토 통과문제와263)≪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國. 고구려―남제의 외교문제를 놓고서도 갈등이 빚어졌다.264)480년 고구려가 남제에 파견한 사신을 북위가 海上에서 억류하고 남제와의 외교교섭에 대하여 고구려에 항의하였다(≪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68년). 한편 북방에서 세력을 확대하며 고구려와 마찰을 일으켰던 勿吉이 북위에 접근해 가자 고구려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고구려는 물길이 북위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유연과 합세하여 地豆于를 분할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렇듯 양국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서로를 잠재적인 적대세력으로 여겨 경계와 견제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북위와의 관계개선 이후에도 남조 및 유연과의 우호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 백제가 북위에 國書를 보내어 고구려의 이와 같은 다중외교를 비난하고 청병의 구실로 삼고자 했던 사실에서265)≪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18년. 당시 고구려외교의 복합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중국 각국과의 다중적인 외교관계를 통하여 서변에서의 안정을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동북아질서의 한 축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북위 및 몽고고원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그 직할영역의 외곽에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의 부족들을 예속시켰고, 室韋에 철을 공급해 주는 등 내몽고 동북부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또한 부여를 지배하고 신라의 내정에 깊숙히 간여할 뿐만 아니라 백제를 압박하는 등 동북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266)盧泰敦, 앞의 글, 45쪽. 고구려는 서변의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으니 그 결과 백제의 수도인 한성의 함락과 중부 내륙지방으로의 진출, 그리고 신라지역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영일만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정세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변화해 갔다. 북위에 내분이 일어났고 그 결과 북위는 東魏(534)와 西魏(535)로 분열되었다. 다시 동위에 이어 北齊(550)가, 서위에 이어 北周(557)가 각각 등장해 동서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한편 남조에서도 梁이 망하고 陳왕조가 들어섰다(557). 뿐만 아니라 몽고고원에서도 세력교체가 있었으니 고구려 陽原王 8년(552)에 신흥 突厥이 유연을 격파하고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고구려 조정에서도 귀족간의 내분이 심화되는 등의 정정불안이 계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267)林起煥,<6·7세기 高句麗 政治勢力의 동향>(≪韓國古代史硏究≫5, 1992), 6∼13쪽. 즉 安原王 원년(531)에 일어난 安藏王의 피살도 이와 연관된 것이다. 또한 안원왕 14년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귀족간의 분쟁이 일어나 麤群측이 細群측의 2,000여 명을 살해하였다는≪日本書紀≫의 기록을268)≪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6년·7년. 참조해 본다면 당시 고구려의 내분이 심각한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269)고구려 안원왕의 죽음도 이 때의 내분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李弘稙, <日本書紀所在 高句麗關係記事考>,≪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158쪽). 더욱이 고구려는 남쪽에서 내분을 알아챈 나제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한강유역을 상실하는 등 수세에 몰려 있었다.270)盧泰敦,<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韓國史硏究≫13, 1976), 31∼35쪽. 이러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정세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던 고구려에 그 파장이 밀려왔다. 고구려 양원왕 8년 北齊의 文宣帝가 친히 요서지방에 행차하여 고구려를 위협해서 북위 말기에 고구려로 도망해 온 유민 5,000여 호를 刷還해 갔다.271)≪北齊書≫권 4, 帝紀 4, 文宣帝 天保 3년 정월. 이와 같은 위협에 직면한 고구려는 남조의 진과 외교교섭을 통하여 북제를 견제하였다.272)徐榮洙,<三國時代 韓·中外交의 展開와 性格>(≪古代韓中關係史의 硏究≫, 三知院, 1987). 북제의 군사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북조의 北齊·北周·陳의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고구려와 북제 사이에는 평온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한편 돌궐이 흥안령산맥을 넘어 거란족과 말갈족에 세력을 뻗쳐왔고 나아가 고구려의 국경을 침범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거란족과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을 한층 강화하며 돌궐의 진출을 적극 저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돌궐과의 충돌이 벌어져273)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에 대하여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李龍範,<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盧泰敦, 앞의 글(1976).
이제까지 평화를 유지해 왔던 몽고고원 유목민국가와의 평화가 깨진 것이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압박해 왔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6세기 중반 이후 남북 양쪽에서 밀려오는 압박에 의해 5세기 이후 구축해 놓았던 東北亞의 한 축으로서의 중심적 역할과 그 세력권이 점차 위협받게 되었다. 6세기 후반에 중국이 隋제국으로 통일되면서 고구려는 새로운 선택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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