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4. 후기의 정세변동
  • 1) 한강유역의 상실

1) 한강유역의 상실

 551년에 신라의 眞興王과 백제의 聖王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북진군을 일으켰다.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가야의 연합군은 한성을 공파하여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였고,297)≪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2년. 이어 居柒夫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죽령을 넘어 高峴까지 진출하여 한강 상류의 10군을 확보하였다.29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2년 및 권 44, 列傳 4, 居柒夫. 이 6군과 10군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6군은 대략 임진강 이남에서 수원·여주 이북지역 정도로 추정되고, 10군은 고현이 철령에 비정되므로 대략 충주·제천에서 철원까지의 지역으로 추정된다.299)李道學,<新羅의 北進經略에 관한 新考察>(≪慶州史學≫6, 1987), 33∼35쪽.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기습적인 공격에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한강유역을 빼앗긴 고구려는 이를 다시 탈환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 보다는, 단지 양국 연합군의 북진을 현 수준에서 저지하기 위한 미봉책을 세우기에 급급하였다. 그 하나가 신라와 화평관계를 맺은 것이었다.300)盧泰敦,<高句麗 漢江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韓國史硏究≫13, 1976), 54쪽.

 이러한 수습책은 일단 주효하였다. 고구려로부터의 반격 위협이 사라지자, 진흥왕 14년(553)에 신라는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이를 차지하였다. 격분한 백제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이듬해에 管山城(옥천)에서 신라와 격전을 벌였으나 성왕이 전사하는 치명적 패배를 당하였다.301)≪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5년. 이 전투로 나제동맹은 완전히 깨지고 오히려 이후 백제와 신라간의 격돌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나제동맹의 결렬로 인해 백제의 군사적 위협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비록 한강유역을 잃기는 했지만, 남쪽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면 고구려가 남진의 거점이며 한반도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유역을 상실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대내적 요인과 대외적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먼저 대내적인 요인으로는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간의 분열 등으로 인한 정국의 불안정을 들 수 있다.≪日本書紀≫에 인용된<百濟本紀>에 의하면, 고구려 安臧王과 安原王은 정치적 변란에 의해 희생되었다.302)≪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25년 및 권 19, 欽明天皇 6년·7년. 안장왕이 살해된 동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안원왕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쟁의 와중에서 희생되었다. 안원왕은 세 부인이 있었는데, 大夫人은 아들이 없고 中夫人과 小夫人의 소생이 있었다. 중부인측은 麤群이고 소부인측은 細群이라 하였다. 재위 15년(545)에 안원왕이 병이 들자, 후계를 노린 외척 추군과 세군 사이에 군사를 동원하여 3일간에 걸친 격렬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안원왕은 죽었고, 분쟁은 추군측의 승리로 끝나 중부인의 소생인 陽原王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 때 패배한 세군측의 희생자가 2천여 명이 넘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왕위계승전에는 외척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중앙귀족이 참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대규모 정쟁의 발발은 당시 귀족세력간의 분열과 갈등이 상당히 심각하였음을 보여준다.

 왕위계승전을 통해서 드러난 귀족세력간의 갈등은 양원왕대에도 계속되었다. 양원왕 13년(557)에는 환도성의 干朱里가 반란을 꾀하였다가 토벌되었다.303)≪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양원왕 13년 10월. 아울러 중앙정계에서의 정변의 여파는 지방에까지 심각한 파급을 일으켰다.≪三國史記≫居柒夫傳에 의하면 양원왕 7년(신라 진흥왕 12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할 때, 고구려의 惠亮法師가 문도를 이끌고 신라군 장수 거칠부를 맞이하여 “지금 우리 나라의 정국이 혼란하여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304)≪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柒夫. 이러한 혜량법사의 동향으로 볼 때, 한강유역의 상실에는 중앙에서의 정국의 혼란 이외에도 중앙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거나 위기의식을 느낀 지방세력의 이탈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귀족세력간의 분열·대립의 배경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는 나제연합군의 공세에 적절히 대처할 능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신라 연합군의 한강유역 공격은 고구려의 국내정세를 잘 파악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 군사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상실한 대외적 요인으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연합군을 구성한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의 형성이고, 둘째는 서북부지역에서 증대되기 시작한 중국세력과 돌궐의 위협이었다.

 고구려가 長壽王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가 433년에 화친관계를 맺으면서 나제동맹이 성립되었다.305)≪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비유왕 7년 7월·8년 2월·9월·10월 및 권 3, 新羅本紀 3, 눌지왕 17년 7월·18년 2월·9월·10월. 고구려의 남진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낀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이미 광개토왕의 정벌시에 상당한 영토를 잃고 한성이 포위되어 阿莘王이 항복하는 등 굴욕을 당한 바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가 이루어진 2년 뒤인 毗有王 3년(429)에 백제는 송에 사신을 보내어 通好하고 빈번하게 교류하였으며, 蓋鹵王 18년(472)에는 북위에도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정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306)≪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18년.
≪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
그러나 북위가 난색을 표함으로서 북위와의 교섭이 여의치 않자, 백제는 신라와의 교섭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한편 신라 역시 고구려의 남진을 적극 경계하고 있었다. 奈勿王 44년(399) 왜의 침략시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을 받은 바 있는 신라는 實聖과 卜好를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고,307)≪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내물이사금 37년 정월·실성이사금 11년. 실성왕과 눌지왕의 즉위 과정에서도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등308)李基東,<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2·53, 1972), 74쪽.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뒤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예속은 점점 심화되어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기까지 하였다.309)<中原高句麗碑>에 ‘新羅土內幢主’라 보이고 있으며,≪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8년 2월조 기사에도 고구려군이 신라 영내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군사적 우위에 바탕을 둔 고구려의 세력확대에 대처하는 양국의 생존전략이었다. 이리하여 이후의 삼국관계는 고구려와 나제연합의 대결구도로 전개되었다.

 나제동맹 후에도 고구려는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백제와 신라에 대해 공세를 취하였다. 장수왕 63년(475)에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이 때 신라는 구원군을 청하러 온 백제의 文周에게 1만의 구원군을 주어 보냈다.310)≪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자비마립간 17년 7월 및 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즉위년. 뒤이어 동왕 69년에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고 彌秩夫(흥해)까지 진출하여 신라의 왕경을 지척에서 위협하였다. 미질부전투에서는 거꾸로 백제의 군대가 신라를 구원하였다.311)≪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3년 3월.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공동방어의 결과, 고구려의 남진은 죽령·조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에서 저지되었다. 이후에도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남진을 시도하였으나, 백제나 신라가 각각 혹은 공동으로 방어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312)고구려의 공격에 대한 백제·신라의 공동방어 전투는 다음과 같다.
장수왕 72년(484) 신라 母山城 전투, 문자왕 3년(494) 신라 薩水·犬牙城 전투, 문자왕 4년(495) 백제 雉壤城 전투, 양원왕 4년(548) 백제 獨山城 전투이다.

 나제동맹이 갖는 의미는 세력이 약한 양국이 고구려의 남하를 공동으로 저지하면서, 각각 내부적으로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정치·군사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은 데에 있었다.313)나제동맹에 대해서는 金秉柱,<羅濟同盟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46, 1984) 참조. 그리고는 이를 바탕으로 소극적인 방어동맹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강유역의 공취는 나제동맹 최대의 또 최종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외교적으로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를 깨뜨리지 못한 것이 남진의 한계였으며, 결국에는 한강유역을 상실케 하는 외적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한강유역 상실의 또 다른 대외적 배경은 서북변에서의 대외적 위기의 고조이다. 5세기 이래 고구려는 북중국의 北魏와 남조의 宋, 유목민 국가인 柔然과 더불어 당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중심세력이었다.314)5∼6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관해서는 盧泰敦,<5∼6世紀 東亞細亞의 國際政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東方學志≫44, 1984) 참조. 당시 적대관계의 중심축인 북위·송·유연의 3국간에는 역관계의 連動性을 바탕으로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는 이들 3국과 등거리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북중국의 국가와는 5세기초에 後燕과의 전쟁을 치룬 이후 嬰陽王 9년(598)에 隋와의 전쟁을 치루기까지 한 차례의 전쟁도 없었고, 북방 유목국가와도 6세기 후반에 돌궐과 충돌하기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315)盧泰敦, 위의 글, 1쪽. 이 시기 고구려가 남진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국제질서 속에서 고구려의 서변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6세기에 들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서서히 변동하기 시작하였다. 534년에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어 이후 각각 北齊와 北周를 세웠다(550, 557).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북위의 붕괴로 인해, 그 전과는 다른 대외적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이 북방에서도 고구려 양원왕 8년(552)에 신흥 突厥이 유연을 격파하고 몽고고원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는 세력교체가 일어났다. 돌궐은 본래 흉노족의 일부로 알타이산 남쪽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유연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6세기 중엽 이후 점차 강성해지면서 유연을 대파하고 돌궐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후로 돌궐국은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쪽으로 밀려왔다. 이에 따라 돌궐에 의해 격파된 유연의 남은 무리들이 이동하여 요하 상류지역의 거란족을 압박하면서 이 일대에 연쇄적인 파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북제의 군사행동이 뒤따르게 되었다.

 고구려 양원왕 8년에 북제는 庫莫奚에 대한 정벌 끝에 文宣帝가 營州에 머물며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위 말기의 혼란기에 고구려로 이주한 유민 5천 호를 쇄환해 갔다. 이듬해에도 거란족의 일부가 북제의 북경을 침략하자 북제의 문선제는 거란족에 대한 대규모 친정을 감행하면서 요서의 昌黎城까지 직접 순행하였다.316)≪北齊書≫권 4, 帝紀 4, 文宣帝 天保 3·4년. 이같은 북제 문선제의 행동은 내분에 이어 나제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고구려의 내외의 약점을 포착한 무력시위로 보인다.317)盧泰敦, 앞의 글(1984), 49쪽. 요해지역 일대에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이 일대에서 전개된 이러한 북제의 무력시위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정세의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북제의 뒤를 이어 돌궐이 6세기 중엽부터 말엽에 걸쳐 요해 일대에 세력을 뻗쳐 왔다. 북제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은 거란은 뒤이어 돌궐세력이 미쳐오자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일부는 고구려로 귀부해 왔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주춤했던 요해 일대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평원왕 22년(580)을 전후한 무렵에는 돌궐의 利稽察병단을 격파하는 등 돌궐과 충돌하게 되었다. 돌궐 역시 이시바라카한대에는 거란에 吐屯이란 지방관을 설치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세력확대를 늦추지 않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상쟁하였다.318)돌궐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는 盧泰敦, 앞의 글(1976) 및 李龍範,<高句麗의 遼西進出 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참조.

 이와 같이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듬해부터 시작된 서북지역에서의 정세변동에 따라 고구려는 미처 남변으로 눈을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륙에서의 정세변동이 한강유역 상실의 직접적인 배경은 아닐지라도, 이후 고구려가 한반도 내에서 운신하는 데에 커다란 제약을 준 것은 틀림없다. 고구려가 일단 신라와 화평을 맺고 한강유역을 포기한 데에는 이러한 서변의 위협이 주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한강유역의 상실과 요해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의 고조라는 남북 양쪽에서 조성된 대외적 위기를 맞아, 고구려 지배층은 우선 내부분쟁을 수습하며 귀족연립체제를 성립시켰다.319)盧泰敦, 앞의 글(1984), 50쪽. 그리고 외교정책과 군사활동을 적절히 구사하며 대외적 위기를 수습하였다. 먼저 북제에 대한 견제를 위해 남조 陳과 적극적인 연결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양원왕 8년 이후 북제가 망할 때까지 25년 동안 4차례 사신을 보낸 데에 비하여, 남조 진에는 5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북위와의 외교관계에 치중하였던 경향과 비교하면 대외정책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320)盧泰敦, 위의 글, 54쪽. 한편 돌궐의 동진 기세도 저지되어 종전의 상태를 큰 변동없이 유지하였다. 한반도 안에서도 나제동맹의 결렬 이후 백제와 신라의 상쟁이 계속되면서 고구려의 남부국경 역시 상대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다.

 이렇게 대내적 정쟁과 대외적 위기를 수습한 고구려는 다시 세력권의 재건을 꾀하였다. 즉 거란·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가며 요해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으며, 한편으로 한강유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신라에 대해 공세를 취하였다.321)≪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4년·19년. 이러한 움직임은≪삼국사기≫온달전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온달은 평원왕대에 요동으로 뻗쳐온 북주군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영양왕대에는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322)≪三國史記≫권 45, 列傳 5, 溫達. 이러한 온달의 행적은 당시 고구려 대외정책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보장왕 3년(644)에 신라의 金春秋가 고구려로 강화를 맺으러 갔을 때에 “麻木峴(조령)과 죽령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보장왕의 말에서도,323)≪三國史記≫권 41, 列傳 1, 金庾信 上.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회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통일세력인 수·당의 등장과 고구려 침공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은 고구려의 이러한 의도를 끝내 좌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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