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4. 후기의 정세변동
  •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6세기 중엽부터 정쟁이 잇따라 일어남으로써 왕권이 약화되고 그 대신 귀족들이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중기 왕권의 기반 및 정치체제의 해체와 직결되며, 아울러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사회변동과도 관련되는 문제이지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귀족세력의 동향과 관련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4세기 이래 那部체제의 해체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과정을 통하여 왕권은 크게 신장되었다.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諸加세력은 중앙귀족관료로 전화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部단위의 결속력이 약화되어 가면서, 귀족세력들은 각 가문별 귀족집단으로 분해되어 갔다.<牟頭婁墓誌>와<高慈墓誌>에 보이는 두드러진 가계의식은 이러한 변화상을 잘 보여 준다.324)牟頭婁家와 高慈家의 家系를 보면, 두 가문이 모두 선조를 朱蒙과 연결시키고 있는 한편, 冉牟와 高密 등 고국원왕대 모용씨와의 투쟁에서 활동한 인물을 중시하고 있다. 이러한 中始祖의 존재는 귀족세력의 가문 단위로의 분해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모두루가와 고자가에 대해서는 林起煥,<6·7세기 高句麗 政治勢力의 동향>(≪韓國古代史硏究≫5, 1992), 21∼23쪽 및 徐永大,<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韓國古代史硏究≫8, 1995), 159∼160쪽 참조.

 왕권은 관등·관직제의 정비를 통하여 왕도로 결집한 중앙귀족을 왕권 아래의 관료체계내로 편제해 갔다.325)4세기 관등·관직제의 정비에 대해서는 이 책 4장 1절 참조. 小獸林王대의 율령반포와 태학의 설립은 관료체제 운영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한 것이었다. 또<廣開土王陵碑>의 ‘王幢’·‘官軍’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군사력도 왕권 아래로 흡수되었으며, 宗廟·國社의 설립과326)≪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양왕 9년 3월. 守墓制의 정비를327)수묘제의 정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金賢淑,<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韓國史硏究≫65, 1989).
趙法鍾,<廣開土王碑文에 나타난 守墓制硏究>(≪韓國古代史硏究≫8, 1995).
통해 왕실 중심의 제의체계를 확립하였다. 아울러 이념적으로도 왕실의 신성화를 추구하여, 왕실의 시조인 주몽을 “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河伯의 딸”328)<廣開土王陵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7쪽.이라거나, “河伯의 손자요, 日月의 아들”329)<牟頭婁墓誌>(위의 책), 93쪽.이라고 신격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왕의 초월적 권위가 확보되어,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330)4세기 왕권강화에 대해서는 徐永大,<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1981), 102∼114쪽 참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장수왕대의 평양천도는 전제적 왕권의 성장과 정치세력 재편성의 일대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부터 고구려왕권은 평양지역의 경영을 통하여 이 지역을 왕권의 직접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331)林起煥,<4세기 고구려의 樂浪·帶方地域 경영>(≪歷史學報≫147, 1995), 42쪽. 따라서 평양천도는 왕권의 전제화에 하나의 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국내지역에 세력기반을 둔 귀족들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이에 평양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장수왕과 이에 반대하는 귀족들과의 갈등이 적지 않았으며, 결국 장수왕 60년(472) 경을 전후하여 귀족세력에 대한 장수왕의 대대적인 숙청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지금 璉(장수왕)의 죄로 나라가 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이 죽고 죽이는 것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 쌓였다”고 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332)≪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 또 이 당시 고구려 귀족세력의 일부가 북위로 망명한 사실에서도333)≪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59년 9월.
≪魏書≫권 77, 列傳 65, 高崇 및 권 83 下, 列傳 71, 高肇.
高肇·高潛·高暠 등은 위 사료에는 渤海蓚人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들을 고구려인으로 보기도 한다(徐永大, 앞의 글, 1981, 152쪽).
장수왕의 왕권강화책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이 상당히 거세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천도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던 장수왕은 귀족세력에 대한 숙청과 더불어 평양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왕권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새로 등장한 신진귀족으로서는 평양 일대의 호족세력을 우선 염두에 둘 수 있다. 예컨대 장수왕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玄鶴琴을 제작하였던 第二相 王山岳이나,334)≪三國史記≫권 32, 雜志 1, 樂. 양원왕·평원왕대의 大丞相 王高德335)≪海東高僧傳≫권 1, 義淵. 등은 그 성씨로 미루어 보아 낙랑군 이래의 호족세력인 王氏系 인물로 추정된다.336)徐永大, 앞의 글(1981), 98∼99쪽.
≪新撰姓氏錄≫·≪續日本紀≫에서 고구려계 인물을 찾아 보면 高氏·伊利氏·王氏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高氏는 고구려 왕족의 성이며, 伊利氏는 후기의 집권가문인 淵氏이다. 따라서 王氏 역시 이들 성씨와 버금갈 만큼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중국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고구려로 망명해온 중국계 망명인들의 동향도 주목된다.337)대표적인 인물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晉 平州刺史 東夷校尉 崔毖(319), 前燕 司馬 冬壽·郭充(336), 前燕 東夷校尉 封裕·護軍 宋晃·居就令 游泓(338), 宇文 逸豆歸(345), 前燕 太傅 慕容評(370).
이미 이들은 대체로 고국원왕대 이후 고구려왕권의 지원 아래 낙랑·대방지역에 세력기반을 마련하여 이 지역 경영과 대중외교와 관련하여 활동하고 있었다.338)안악 3호분의 冬壽와 덕흥리고분의 幽州刺史 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에 대해서는 林起煥, 앞의 글(1995) 참조. 평양일대를 기반으로 한 이들 세력은 광개토왕·장수왕대에 전개된 남진 정복활동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제공하였고,339)광개토왕은 영락 6년의 백제 공격시에 水軍을 동원하였는데, 이 水軍은 낙랑·대방지역의 해상세력을 동원한 것임에 틀림없다. 평양천도 이후에는 왕권의 뒷받침을 받으며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적극화하였을 것이다.340)≪宋書≫고구려전에 보이는 장수왕대의 대중 외교사절인 長史 馬婁·董騰이나 장군 孫漱 등은 漢化된 성씨로 미루어 보아 중국계 망명인이나 낙랑계 호족세력으로 짐작된다. 왕고덕·왕산악 등이 ‘大丞相’·‘第二相’ 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사례를 보면, 후기의 정계를 주도할 정도로 정치적 진출이 활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양천도와 신진귀족의 등장은 귀족관료 전체의 존재방식에도 일정한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지배귀족층의 확대는 국가 집권력의 증대과정에서 확대·세분화되어 온 관료기구와 관등·관직제를 운영하는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왕권의 후원 아래 등장한 신진귀족들이 왕권 중심의 관료체제를 뒷받침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본래의 세력기반으로부터 유리된 국내계 귀족들도 천도 후 새로운 자기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관료체계내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수왕은 이러한 관료체제 운영을 바탕으로 전제적 권력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권의 위상은<모두루묘지>에 왕과 귀족의 관계를 聖王·太王과 奴客의 관계로 표현한 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장수왕대의 정치세력의 재편과정은 귀족관료 내부에 갈등구조를 잉태케 하는 측면도 있었다. 일부 국내계 귀족세력의 소외와 신진귀족의 정치적 성장은 양자의 대립구도를 조성할 가능성도 있었고,341)6세기 이후의 귀족세력의 분열과 대립 과정을 국내계 귀족세력과 평양계 귀족세력 사이의 갈등 구조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林起煥, 앞의 글, 1991). 다양한 기반을 갖는 귀족세력의 혼재, 귀족가문의 분화 등은 권력을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경쟁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구조를 해결하는 율령체제의 재정비나 이념적 통합이 장수왕대에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장수왕의 왕권강화책은 근본적인 집권체제의 정비를 통한 왕권 기반의 강화 방향보다는 신진귀족의 등용과 이를 통한 구귀족세력의 견제라는 측면에 보다 주력한 듯하다. 따라서 왕권이 귀족세력을 적절히 통제·조절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전제적 지위를 잃지 않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장왕·안원왕대에 걸친 거듭된 왕의 시해와 왕위계승전을 겪는 과정에서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왕권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다만 이 때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왕위계승을 통해 전개되는 것은 이제까지 왕권 중심의 권력행사가 이루어져 왔던 결과이다.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던 왕권이 6세기에 들어 약화되는 또 다른 배경으로는 대외정복활동의 침체를 들 수 있다. 사실 광개토왕·장수왕대에 전제적 왕권으로 급성장한 것은 기본적으로 소수림왕 이래 정비된 집권체제의 운영에 기반을 두는 것이지만, 두 왕대에 활발하게 전개된 대외정복활동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다.<광개토왕릉비>에서 보듯이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은 고구려 전시기를 통하여 최대의 성과를 이룬 것으로, 당대 고구려인이 그 시호에 ‘廣開土境’을 붙여 칭송할 정도였다. 장수왕 역시 요동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남진책을 추진하여 백제를 공파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함은 물론 남쪽 국경을 아산만에서 영덕을 잇는 선까지 확대하였다.

 이러한 대외정복활동에서의 성공은 왕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마치 전시체제와도 같이 계속되는 外征은 고구려사회내에 긴장감을 높여 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을 결속시키게 하였을 것이며, 군사력도 왕권 아래로 집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점에서 왕이 직접 전쟁에 나서는 親征은 주목된다.<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총 7회의 외정에서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주도한 경우가 5회나 된다. 나머지 2회의 경우에도 영락 8년(398)전은 소규모 부대를 파견한 것이니 차치하고, 영락 10년의 신라구원전에는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그 전해에 평양에 巡狩하여 원정군을 지원하고 있었다.342)<廣開土王陵碑>(앞의 책), 9∼14쪽. 또 장수왕도 63년(475)의 백제 한성 공격시에 직접 3만군을 지휘하였던 것이다.343)≪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63년 9월.

 이러한 친정의 성공을 통하여 왕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으며, 관념적으로도 고구려왕은 위엄을 사방에 떨치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주인공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344)<廣開土王陵碑>에는 “恩澤이 하늘에 미치고 威武는 四海에 떨쳤으며,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시니 백성이 각기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왕의 훈적을 칭송하고 있다. 또 전쟁의 전리품들을 왕권강화의 기반으로 삼거나,345)<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바와 같이 광개토왕이 정복한 新來韓穢를 그의 守墓人烟戶로 삼은 것은 그 한 예이다. 성과물의 분배를 통하여 귀족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文咨王대까지도 백제나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는 계속되고 있었으나, 백제가 다시 국력을 회복하고 또 나제군사동맹 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안장왕대에 들어서는 그나마 대외전쟁이 급격히 줄어들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자왕대에는 백제와의 전쟁이 7회, 신라와의 전쟁이 3회인 데 비하여, 안장왕대에 들어서는 백제와 2회의 전쟁 기사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대외 정복활동이 침체된 원인은 잘 알 수 없으나, 그 결과 왕의 권위와 위상에 상당한 손상을 주어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였을 것은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또 장수왕의 신진귀족 등용책으로 지배층의 저변이 확대된 상황에서 외정에서의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귀족들의 관심이 내부의 권력 분배문제로 쏠려 지배층 자체의 분열과 동요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이상 6세기에 들어 전제적 왕권이 쇠퇴하고 귀족간의 갈등이 거듭된 배경과 원인에 대하여 한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았지만, 아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체제에 대해서만 좀 더 살펴보자.

 안장왕∼양원왕대에 거듭된 정쟁을 겪고 이 과정에서 한강유역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 고구려 귀족들은 계속해서 신라의 북진·突厥의 위협·隋제국의 출현 등으로 대외적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혹 지배층 전체의 파탄을 불러올 지도 모를 격렬한 내부의 정쟁을 종식시키고 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귀족연립체제를 형성하였다.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체제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변화의 하나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인 大對盧의 선임과 집권적 관직으로서의 莫離支의 등장이다.≪舊唐書≫고려전에 의하면, 대대로의 임기는 3년인데 유력한 자가 있으면 임기에 구애받지 않으며, 교체하는 날에 순순히 내어놓지 않으면 서로 군사를 동원하여 상쟁을 벌여 이긴 자가 취임하였는데, 이 때 왕은 궁문을 닫아 걸고 이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346)≪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高麗. 당시 왕은 대대로의 선임에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명목상의 존재였고, 귀족들간의 실력대결에서 승리한 자가 대대로에 올라 정치운영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대로의 선임이 반드시 무력대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보통은 귀족간의 세력조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대로보다는 권력을 분점하면서 대대로의 취임에 도전하는 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후보로는 관의 서열로 볼 때 제2위의 太大兄이 유력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관등은 각 귀족들의 세력기반의 비중에 따라 획득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고위 관등에 오른 자는 그만큼 큰 세력기반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347)淵蓋蘇文家에서 엿보이는 父職의 세습은 이 시기에 官의 획득이 각 가문의 세력 기반에 의한 것임을 방증한다. 이 관등체계상의 태대형을 후기 사료에 집권적 관직으로 등장하는 막리지와 관련지어 볼 수 있다.348)莫離支는 연개소문 당시의 강렬한 집권적 성격으로 인하여 그 실체와 정치적 위상에 관하여 견해가 다양하다. 막리지를 최고 관등인 大對盧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견해(末松保和,<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 158∼161쪽·李弘稙,<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301∼304쪽 및 請田正幸,<高句麗莫離支考>,≪朝鮮歷史論集≫上, 1979, 120∼121쪽), 제2위인 太大兄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高句麗官位制の史的展開>,≪朝鮮學報≫86, 1978, 24∼32쪽 및 林起煥, 앞의 글, 1992, 29∼32쪽), 최고의 집권적 관직으로 보는 견해(이승혁,<고구려의 막리지에 대하여>,
≪력사과학≫1985-1, 19∼21쪽)가 있다.
사료상 막리지는 국정을 전제하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실권을 장악한 존재로 나타난다.349)≪三國史記≫권 49, 列傳 9, 蓋蘇文.
<泉男生墓誌>(≪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493쪽.
<高慈墓誌>(위의 책), 510쪽.
이러한 막리지의 정치적 위상을 뒷받침하는 기반의 하나는 군사권의 장악이었다. 막리지가 당의 兵部尙書兼中書令에 비교된다는 기록이나,350)≪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高麗. 연개소문의 조부가 막리지로서 ‘良冶良弓’하여 군권을 쥐고 나라의 권세를 장악하였다는 기록에서351)<泉男生墓誌>(앞의 책), 494쪽.
<泉男産墓誌>(위의 책), 529쪽.
막리지의 주요 직능 중에 군사권의 장악이 포함되었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따라서 대대로의 취임시에 무력 충돌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군사권을 장악한 막리지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태대형 즉 막리지가 고구려 후기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데에는, 각 귀족집단의 개별적인 무력 배경이 요구되는 귀족연립정권 아래에서 그것이 갖는 군사권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런데 막리지의 정원은 다수였다.352)林起煥, 앞의 글(1991), 32∼33쪽. 따라서 당시 임기 3년의 대대로는 다수의 막리지 중에서 교대로 선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은 지속적인 권력의 독점에 의해 초래될 수 있는 치열한 정쟁을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었다. 물론 세력의 우세 여하에 따라 계속 역임할 수도 있고, 또 세력관계 조정에 실패할 경우에는 군사를 동원한 정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기적인 대대로의 선임 과정에서 각 귀족집단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조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극한적인 정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원왕대 이후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기까지 80여 년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국이 유지되었던 배경은, 이와 같은 각 귀족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유력 가문의 대표자들이 다수의 막리지직을 차지하고, 대대로의 주기적인 선출과정에서 정치적 합의와 세력관계의 조정을 유도할 수 있는 귀족연립적 정치운영체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대대로와 막리지는 정국운영의 중심체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귀족회의체를 구성하며, 대대로는 이 귀족회의체 의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353)고구려의 대대로와 막리지로 구성된 귀족회의체와 관련하여 신라의 上大等을 의장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귀족회의체의 모습이 참고된다. “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廉長公·庾信公이 있어 南山의 亏知巖에서 國事를 의논하였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진덕왕). 따라서 후기 귀족연립정권의 권력구조는 대대로―막리지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안정된 귀족연립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에서 왕권의 위상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濟世安民을 자임하였다”는354)≪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즉위년. 영양왕의 활동이 눈길을 끈다. 그는 재위 9년(598) 말갈군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하여,355)≪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9년. 긴장되어 가는 對隋관계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감행하였다. 특히 대외군사활동에 있어서 親征이란 형태가 왕권의 강화와 밀접히 관련되는 점을 고려하면, 대외관계를 일정하게 주도할 수 있는 왕권의 면모가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간취할 수 있다. 또≪新集≫이란 역사서의 편찬도356)≪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1년. 어느 정도 안정된 왕권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물론 隋煬帝의 조서에서 영양왕대의 고구려의 국내 사정을 “强臣과 豪族이 국권을 잡고 당파를 짓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라고 지적하듯이,357)≪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23년 정월. 아직 정국운영의 주도권은 귀족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對隋전쟁에서의 승리는 영양왕으로 하여금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보인다. 계속되는 수의 침공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통합력을 높이고, 이에 따라 왕의 권위도 강화되었을 것이다. 또 전쟁과정에서 있었을 귀족들의 희생은 귀족세력의 재편 가능성도 열어놓았을 것이다.358)金基興,<고구려 淵蓋蘇文政權의 한계성>(≪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亞細亞文化社, 1992), 29쪽. 이러한 점은 수와의 전쟁중에 평양으로 침공해 온 수나라 水軍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영양왕의 동생 建武가 榮留王으로 즉위한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359)영류왕의 즉위가 영양왕의 후사가 없기 때문인지는 사료상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와의 전쟁에서 세운 공훈이 어떤 형태로든지 영류왕의 즉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영양왕대에 수와의 전쟁을 통하여 왕권의 위상이 어느 정도 강화되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왕권이 보다 안정된 기반을 다시 확립하려고 시도하면서, 왕권 및 각 귀족집단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보다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개되었을 것이다. 또한 대대로의 선임을 통한 귀족연립정권의 운영도 점차 그 기능에 한계가 나타났다. 예컨대 淵蓋蘇文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막리지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여러 귀족 가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하였다. 따라서 실력에 의해 대대로를 차지하는 정치운영 구조에서 연개소문가문의 독주 가능성이 커졌다. 귀족간의 합의를 통한 귀족연립체제에서 한 가문의 독주는 귀족들 전체의 이익에 큰 위협이 되었다.360)田美姬,<淵蓋蘇文의 執權과 그 政權의 性格>(≪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4), 274쪽. 그래서 연개소문의 父인 대대로 太祚가 죽은 것을 계기로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父職을 계승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361)≪三國史記≫권 49, 列傳 9, 蓋蘇文.

 한편 영류왕의 입장에서도 연개소문가문의 독주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362)연개소문의 집권을 귀족연립정권에서 대대로가 누리던 권한을 유지하려는 연개소문과 왕권을 확립하려는 영류왕과의 대결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金基興, 앞의 글, 30쪽). 귀족들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을 경우는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진 왕권을 바탕으로 적절한 중재와 조정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가능성이 있지만, 한 가문이 다른 귀족들을 압도할 경우 오히려 왕권의 지위마저 불안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영류왕과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가문을 견제하려는 데에 이해관계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연개소문이 부직을 계승하지 못하도록 시도하였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일단 연개소문을 변방의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하여 중앙에서 내보낸 후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거꾸로 연개소문의 반격을 받아 영류왕 등이 살해되고 말았다.363)≪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류왕 25년 및 권 49, 列傳 9, 蓋蘇文.

 보장왕 원년(642) 정변을 통해 영류왕과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의 등장은 대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영류왕을 포함하여 대신 100여 명을364)≪日本書紀≫권 24, 皇極天皇 원년 2월조에는 180여 인으로 되어 있다. 살해한 대규모 정변이었기 때문에 그 뒤의 정국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정변 직후 연개소문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반대파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다. 예컨대 당 태종의 침략을 물리친 安市城主는 연개소문의 정변에 반대의 입장에 있었는데, 연개소문도 이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타협하고 말았던 것이다.365)≪唐書≫권 220, 列傳 145, 高麗.

 이처럼 지방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반대세력이 존재하는 한, 연개소문으로서도 반대파를 완전히 제거하는 권력구조의 재편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는 없었다. 또 갈수록 고조되는 당과의 대외적 긴장도 대내 정치분쟁의 확대를 주저케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정변 이후에도 연개소문은 반대파 귀족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귀족연립체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으나, 연개소문은 과거의 대대로에 비하여 한층 강화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였다.

 연개소문은 집권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변 직후 同姓인 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고,366)≪日本書紀≫권 24, 皇極天皇 원년 2월. 보장왕 2년에는 도교진흥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불교 및 유교에 대한 억압을 꾀하였다. 당시의 불교가 왕실이나 각 귀족집단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의 도교정책은 곧 왕권과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책이라고 할 수 있다.367)李萬烈,<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 가지 檢討>(≪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 31∼33쪽.
李乃沃,<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歷史學報≫99·100, 1983), 83∼89쪽.
또 당과의 우호관계를 위하여 도교를 존숭하는 당으로부터 도교를 받아들인 측면도 있음을 지적한 견해도 있다(李萬烈, 위의 글, 30쪽).
이와 같은 사상계의 재편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연개소문의 도교정책은 의당 불교계나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니, 보장왕 9년(650)에 백제로 망명한 普德의 예는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입장을 잘 보여 준다.368)≪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보장왕 9년 6월.
普德의 활동에 대해서는 盧鏞弼,<普德의 思想과 活動>(≪韓國上古史學報≫2, 1989) 참조.

 이후에 연개소문은 사적 권력기반의 강화에 더욱 주력하였다. 그는 太大對盧·太莫離支 등의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취임하였는데, 이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집권력을 계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신설한 일종의 초월적 지위의 종신직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男生·男産 등은 보장왕 10년 이후 대형·위두대형 등을 역임하면서 연개소문의 핵심적인 세력기반을 조성하였다. 남생·남산 등은 제7위에 불과한 (中裏)大兄에 있으면서도 이미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369)≪唐書≫권 110, 列傳 35, 泉男生. 이런 사실 자체가 연개소문가의 사적 권력기반이 강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태대대로·태막리지 등의 집권적 관직의 신설과 자신의 아들들을 요직에 등용하는 연개소문의 사적 권력의 강화는 대대로의 주기적인 선출을 통해 귀족세력간의 세력 조정과 합의에 기초하는 기존의 정치운영체계를 부정하는 것이다.370)연개소문 정권의 성격을 이원집정제로 보는 견해도 있다(金基興, 앞의 글, 20쪽). 이는 곧 귀족연립정권의 정치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상당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귀족세력의 반발은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의 권력다툼과 당과의 전쟁과정에서 표면화되었다. 동생 남산·남건에게 쫓긴 남생과 국내성의 귀족세력들은 국내성 등 6성과 10여 만호를 이끌고 당에 투항하였다.371)<泉男生墓誌>(앞의 책), 494쪽.
≪三國史記≫권 49, 列傳 9, 蓋蘇文.
당시 당으로 이탈하는 귀족세력의 동향은 이외에도 후기의 명문가문 출신인 위두대형 高文이 당으로 망명한 예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372)<高慈墓誌>(위의 책), 511쪽.

 이러한 귀족세력의 이탈은 당과의 전쟁과정에서 고구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남생에 의한 국내성의 이탈 이후, 서북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신성 등 16성과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이 차례로 당군에 항복하고,373)≪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보장왕 26년·27년.
≪唐書≫권 220, 列傳 145, 高麗.
연개소문의 동생 淵淨土도 12성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374)≪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6년.
≪唐書≫권 220, 列傳 145, 高麗.
결국 국내성·신성·부여성 등 서북방의 중요 거점들을 차례로 상실함에 따라 고구려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고 말았다.

 고구려가 당과의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게 된 원인의 하나는 귀족세력들의 분열과 이탈이다. 전쟁의 중요 무력기반인 지방세력의 이탈도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이 때 이처럼 귀족세력간의 모순이 심화된 이유는 기왕의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체제를 부정한 연개소문가문의 파행적인 집권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375)林起煥, 앞의 글(1991), 47∼49쪽.

 대대로―막리지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는 불안정한 면도 적지 않았지만, 당시 귀족집단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분산적인 귀족세력을 어느 정도 통합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집권과 사적 권력의 강화는 이러한 정치운영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족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는 통로를 상실함으로서 귀족세력 사이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고, 거듭되는 대외적 위기 속에서 끝내 귀족세력의 분열과 이탈을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林起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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