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Ⅲ. 수·당과의 전쟁
  • 1. 수와의 전쟁
  • 1) 수와의 관계

1) 수와의 관계

 고구려는 초기의 성장과정에서부터 동북아시아의 패자적 위치에 오르기까지 주변 여러 민족과 투쟁 및 타협을 통해서 그 독자성을 견지해 왔다. B.C. 108년 衛氏朝鮮의 멸망과 함께 漢郡縣이 설치된 이후 본격화된 漢族과의 투쟁은 美川王代에 낙랑(313)·대방(314)을 병합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어 4세기 후반까지는 북중국에 세운 유목민의 왕조와 요동평야의 지배권을 둘러싼 상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5세기 이후 중국대륙이 남북으로 나뉘어진 상태가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고구려는 이들 南北朝 여러 나라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외교적 균형을 취하면서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이 기간 중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과 타협하면서 유용한 문화를 수용하는 한편, 요하 동쪽의 전 만주지역을 영토화하였고, 남으로 백제·신라를 압박하여 영역을 확장하였다. 나아가 長壽王대에는 國都를 國內城에서 平壤으로 옮김(427)으로써376)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강화라는 정치사적 입장에서 通溝세력과 귀족연립체제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徐永大,<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서울大, 1981) 참조. 北守南進政策의 입장을 확실히 하였다.

 이같은 고구려의 동정에 자극된 신라·백제 양국은 羅·濟同盟(433∼553)을 체결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함으로써 삼국간의 대립형태 속에서 균형을 취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남진에 대한 나·제동맹군의 實戰的 대응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377)광개토왕까지의 남쪽 척경을 중심으로 다룬 연구로 朴性鳳,≪高句麗의 南進發展에 對한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79)와 金秉柱,<羅濟同盟에 관한 硏究>(≪韓國史硏究≫ 46, 1984), 34쪽이 참고된다. 5세기 후반까지도 신라는 아직 약체성을 면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동맹국으로서의 적극적 대응이 어려웠다. 따라서 장수왕 63년(475) 고구려군이 백제 漢城을 공격하여 漢江 하류를 점유할 수 있었다.378)신라는 450년 경까지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가졌으므로 475년 경에도 고구려의 적수가 아니였음을 의식했다면 출병이 늦었다는 이유로 고구려와 정면대결을 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李昊榮,<新羅 三國統一에 관한 再檢討>,≪史學志≫15, 檀國大, 1981, 7쪽). 그러나 6세기 중반, 국력이 신장된 신라와 분발한 백제, 이 두 나라 동맹군의 북진에 의해, 陽原王 7년(551) 고구려는 그 동안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379)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신라·백제에게 상실한 원인은 돌궐의 위협 때문에 南顧의 여지가 없었던 까닭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盧泰敦,<高句麗의 漢水流域喪失의 原因에 대하여>,≪韓國史硏究≫13, 1976). 그러나 진흥왕 14년 신라는 다시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지역을 탈취함에 따라 나·제동맹은 파기되었고 한반도 정세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380)李昊榮,<高句麗·新羅의 漢江流域 進出問題>(≪史學志≫18, 1984) 참조. 이렇게 삼국이 격돌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대중국관계가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중반까지의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몽고고원의 柔然, 그리고 吐谷渾 등과 다원적인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동북지역에서 小國際政治圈의 종주적 지위를 자처하여 자국 중심의 독자적 天下觀을 형성하고 있었다.381)盧泰敦,<5∼6세기 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東方學志≫44, 1984 ;≪高句麗史硏究≫Ⅰ, 延世大, 1987, 424쪽).

 그러나 6세기말에 접어들면서 내외정세가 급변하여 이에 대한 고구려의 대처방안도 새롭게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첫째는 중국에서 통일제국인 隋나라가 출현했으며, 둘째는 고구려 내정에 있어서 막강한 권력의 자리인 大對盧를 둘러싸고 귀족간에 권력투쟁이 지속됨에 따라 국가정책이 효율적으로 수행되기 어려운 상태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당면한 과제는 수의 등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581년 수가 건국되자, 고구려는 平原王 23년(581) 12월에 즉각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했고 隋 文帝는 평원왕을 “大將軍遼東郡公”으로 책봉하였다. 이후 평원왕 24년 2회, 평원왕 25년에 3회, 평원왕 26년에 2회의 사신을 수에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는 4년간 수에 계속 사신을 파견하여 우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수의 등장에 따른 국제정세를 관망하고 수의 반응을 주시하며 그 대비책을 모색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고구려는 평원왕 27년 남조의 陳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5년 동안 수와의 사신왕래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고구려·진 사이에는 수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은 남북조의 상례적인 왕조교체로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589년에 수가 진을 멸하자 고구려는 크게 염려하여 평원왕 32년(590)에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비축해서 향후에 있을지도 모를 수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토를 지킬 대책을 마련하였다.382)≪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평원왕 32년.
고구려의 대수·당외교 및 전쟁기록은 그 대부분이 중국 史書인≪資治通鑑≫·≪北史≫·≪隋書≫·≪舊唐書≫·≪新唐書≫ 등에서 발췌하여≪三國史記≫에 轉載한 것인데 특히≪資治通鑑≫의 기록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고구려의 외교도 그렇지만 전쟁에서 수·당군의 전쟁상황은 비교적 자세한 반면 고구려군의 활동은 불분명하다. 그 이유는 자료의 한계성 때문인데, 아마도 고구려의 고유한 독자적 기록이 일실된 까닭이라 추측된다.
진의 멸망에 따른 충격 속에서, 수의 통일이 미칠 국제적 파장을 강하게 의식하였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무렵 수 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글 속에 “고구려는 비록 藩屬이라 칭하나 誠節을 다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왕은 遼水가 넓다고 하겠지만 어찌 長江(양자강 ; 수가 양자강을 건너 진을 멸했다는 말)에 비할 수 있으며, 고구려 인구의 多少가 어찌 陳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含育의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왕의 前過를 책망하는 동시에 한 장군에게 征討의 명령을 내릴 것이며 많은 국력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은근히 깨우쳐 주는 이유는 왕이 自新케 하려는 것이다(≪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평원왕 32년).

 이는 수에 대한 고구려의 철저한 臣屬을 강요한 것이다. 또 중국측 기록인≪隋書≫에는 고구려가 몰래 사람을 수에 잠입시켜 弩手를 財貨로 매수해서 무기를 제조하며 또 수의 사신을 空館에 가두어 감시하고 騎兵을 동원하여 수의 邊人을 살해했다고 책망하는 기사가 보인다.383)이 기사는≪隋書≫高麗傳 및≪資治通鑑≫에는 597년조에 들어 있지만,≪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는 590년조에 넣고 그 정당성을 註記하였다. 이에 대해 申采浩는 597년설을 취했는데 李萬烈도 597년설을 지지하면서 “嬰陽王의 정책”이라고 주장하였다(李萬烈,<高句麗와 隋·唐과의 戰爭>,≪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493쪽). 영양왕의 정책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집권하고 있던 연개소문가의 정책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듯하다. 고구려·수의 양국관계는 상호 불신의 단계를 지나 점차 적대적 대립의식으로 치닫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자극도가 고구려 쪽에는 한층 컸던 것이라 여겨진다.

 이 때 고구려에서는 사과의 뜻을 담은 국서를 수에 보내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평원왕이 승하한 데도 있겠으나 국내의 政情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평원왕 26년(584)만 하더라도 수 문제는 고구려 사신을 大興殿에서 융숭히 대접했는데 이 무렵은 수가 진을 멸하지 않은 때이므로, 수에서 고구려를 경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후 5년간 고구려가 수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대신 평원왕 27년에 진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이듬해에는 고구려 도읍을 長安城으로 옮겼다. 이 장안성은 양원왕 8년(552)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35년 뒤인 평원왕 28년에 완성되어 옮긴 것이다. 이는 內城(在城)과 外城(羅城)을 공고히 쌓아 외적방어에 완벽을 기했던 것이라 하겠다.384)李丙燾,≪韓國史≫古代篇(震檀學會, 1959), 420쪽. 후일 고구려가 唐에게 패망될 때 平壤城이 당병에게 약 1개월간 포위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당시 고구려인들은 이 장안성을 난공불락의 堅城으로 믿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천도 또한 수에 대비한 방어체제인 동시에 수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당시 고구려에서는 淵蓋蘇文家가 집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연개소문은 寶藏王 1년(642)부터 같은 왕 24년까지 24년간 莫離支로 집권했는데 그의 祖父가 집권한 것까지 포함하면 3대 120년 동안이다. 따라서 淵氏 집권의 출발점은 양원왕이 즉위한 545년으로 소급된다.385)李弘稙,<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一潮閣, 1956 ;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306쪽).
하지만 이 소급기간이 너무 길다고 보아 보장왕 1년부터 2대 60년간을 소급, 집권하였다고 하면 580년을 전후한 시기가 되어 평원왕말·영양왕초가 된다.386)李昊榮,<高句麗의 敗亡原因論>(≪中齋張忠植博士華甲紀念論叢≫歷史篇, 1992), 63쪽. 하지만 어느 견해를 따르든 580년대에 연씨가문이 집권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대내외정책 결정에 있어서 그들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왕과 일부 귀족들은 수와 친화하려는 主和派的 입장에 서고, 연씨정권파는 主戰派的 입장을 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387)李昊榮, 위의 글, 63쪽. 그렇지만 親王的 주화파의 발언권이란 별로 의미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같은 양파의 갈등 속에서 수와 화해하려는 외교적 노력보다는 강경책이 단연 우세했던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의 遼西 공격이 말해 주듯이 이 공격은 우연한 돌발사태가 아니라 주전파의 정책이 관철된 것을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388)이와 달리 安藏王 이후 왕위계승전을 경험하고 막리지를 중심으로 귀족연립체제가 유지되었고 嬰陽王대에는 온달·을지문덕 등 평양계 귀족들이 대외강경책을 주도하였다는 견해도 있다(林起煥,<6·7세기 高句麗 政治勢力의 동향>,≪韓國古代史硏究≫5, 1992, 29∼39쪽).

 하여튼 영양왕이 즉위(590)하자 수는 사신을 보내어 왕을 “遼東郡公”으로 책봉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고구려에서 “王”으로 책봉하기를 요청하여 “高句麗王”으로 책봉되었다. 전통적으로 조공과 책봉은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隋가 일차 책봉에서 왕으로 봉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를 소홀히 취급한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남북조시대 “요동” 혹은 “東夷”를 지배하는 고구려 왕으로서의 독자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수의 고구려왕에 대한 태도는 고구려의 자존심을 매우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영양왕 2년(591)과 4년·8년 등 간헐적인 使行이 있었지만, 이는 수의 태도를 확인하는 데 불과했을 것이다. 그 중간의 공백은 고구려 자체내에서 對隋政策 결정과정의 진통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389)설사 주전파의 강경책이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정책의 결행에는 적지 않은 망설임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처럼 580년 전후에 연씨가 집권했다면 정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도 위의 공백기간은 필요했을 것이며, 대수정책은 자파의 세력강화와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 강경했으리라고 믿어진다.

 마침내 영양왕 9년에 고구려는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함으로서, 수에 대한 정면 대결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곧 이어 隋軍 30만의 침공이 있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영양왕 11년과 같은 왕 25년에도 遣使했지만, 이는 적정을 엿보고 수의 태도를 유화시키려는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390)이런 외교방법은 신라의 대당전쟁중에도 진행되었다. 이는 신라가 전쟁의 대가와 독자성을 목적으로 개전한 것인데, 당이 침략해 왔으므로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당군만 물러가면 전쟁이 종식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수가 침입하지 않으면 고구려의 독자성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사죄사를 보내어 수를 유화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강경파의 주장이 무엇이었는가는 자명해진다 하겠다. 따라서 실제로는 양국간의 대립상태는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고구려 영양왕 18년(607)에는 突厥 啓民可汗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과 隋 煬帝가 마주치게 되었다. 당시 돌궐은 동·서로 나뉘어져 584년 경 수에 복속되었고, 586년에는 土谷渾도 복속되었다. 동돌궐의 계민가한은 수에 복속하는 한편 고구려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는 동돌궐과 연결하여 수에 대응코자 했던 것이다. 이 때 黃門侍郞 裵矩는 고구려 왕을 入朝시킬 것을 건의했고, 양제는 이를 받아들여 고구려 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계민을 거느리고 치겠다고 고구려 사신에게 협박하였다.391)≪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8년.

 한편 당시 신라와 백제도 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비록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백제는 武王 12년(611)에 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날짜까지 정하였다. 그러나 양국의 이런 움직임은 수의 고구려 침략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수를 둘러싼 삼국의 알력이 깊어지자 고구려는 북방의 돌궐·말갈·거란 등과 연계하는 정책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고구려는 수와의 타협보다는 강경대응이 고구려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러한 대수강경책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연씨정권이 자파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으나 이러한 대외정책은 고구려 성장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소신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고구려는 4차에 걸친 대수전쟁을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그 독자성을 유지·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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