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Ⅲ. 수·당과의 전쟁
  • 1. 수와의 전쟁
  • 2) 고구려의 요서 공격

2) 고구려의 요서 공격

 수의 강압적 패권주의는 남북조시대의 국제외교적 균형상태에서의 형식적 조공과 책봉을 넘어 수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재편성하려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독자성 유지를 위협하는 것으로써 양국간의 외교적 대립은 심각해졌다. 특히 고구려 내정에서 연씨가 집권한 시기라면 새로운 집권자들의 권력 안정을 위해서도 대외적으로 날카로운 반응을 나타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더욱이 수의 入朝요구는 고구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영양왕 9년(598)에 수의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수와 군사적 대결을 결행하였다.

고려왕 元이 말갈의 무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遼西를 침구하므로 營州摠管 韋冲이 이를 격퇴하였다(≪資治通鑑≫권 178, 隋紀 2, 高祖 上之下).

 이 때 위충의 군대가 지방의 소수병력이었다고 보면, 고구려군 또한 소수병력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史書의 기록대로 고구려 왕이 親征에 나선 것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격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소수병력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392)親征을 강조하면서 “왕권의 위상이 두드러져 보이는 영양왕대에도 정국운영의 주도권은 귀족세력이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양왕권의 강화와 안정의 면모도 계속되는 對隋전쟁의 위기 속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 왕권의 독자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 견해도 있으나(林起煥, 앞의 글, 24∼25쪽), 전쟁상황으로 보아 親征기록은 극히 의심스럽다.

 이에 수 문제는 이 해 6월에 水陸 30만 군을 동원하여 漢王인 楊諒(文帝의 넷째 아들)과 王世積을 원수로 삼아 臨渝關으로 나가게 했다. 또 周羅睺(본래는 陳의 장수)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산동반도의 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平壤城을 직접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육군은 임유관에서 홍수를 만나고 군량운반이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에 군사들은 굶주리고 유행병까지 겹쳐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또 주라후의 水軍도 평양을 향해 항해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서 兵船이 표몰되었기 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 해 9월에 회군하였는데, 이 때 죽은 수군이 10명 중 8·9명이었다고 한다.393)≪資治通鑑≫권 178, 隋紀 2, 高祖 上之下, 開皇 18년 2월·6월·9월. 물론 갑작스러운 출병에 군량수급의 차질과 뜻밖의 천재로 전쟁을 치룰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군에게 패퇴한 것을 은폐한 기록이라고 보여진다.394)≪丹齋申采浩全集≫上(乙酉文化社, 1972), 262쪽.

 이렇게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대응한 隋軍이 자연재변에 의하였든 고구려군의 격전에 의해서든 물러남으로써 당시 집권파였던 연씨가문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고 수와 대립하는 고구려의 자신감은 한층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 직후인 영양왕 11년(600)에 고구려의 古史인≪留記≫100권을 요약하여≪新集≫5권을 편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선제공격으로 수군을 저지한 것은 고구려 역사와 전통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구려가 왜 요서지방을 공격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첫째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어떠한 유리한 지점을 먼저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으로 추측하기도 한다.395)이병도,≪대외항쟁사≫(국방부 정훈부, 1955), 25쪽. 그러나 고구려쪽에서 보면 渡河作戰이 쉽지 않고 설사 요서의 유리한 지점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수군이 공격해 올 경우 背水陣인 까닭에 국방상 전략강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수에 대해 군사적으로 응징하여 새로 등장한 수를 제압함으로써 고구려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수의 패권주의를 분쇄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일종의 군사적 시위라고도 할 수 있다. 셋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그 이유를 고구려 내정에서 구해볼 수 있다. 당시는 연개소문가문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집권층이 친연씨파와 반연씨파로 양립되어 있었다고 할 때, 집권한 연씨파의 주도하에 대수전쟁을 일으켜 반대파의 추종을 불가피하게 함으로써 자파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대수전쟁의 명분은 역시 고구려의 독자성 유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1차 전쟁의 결과 수는 고구려 왕에게 책봉한 관작을 박탈하였지만,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사죄함으로써 양국간의 평화적 교섭이 10여년간 지속되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수는 대내적 불안정과 돌궐 등 주변 문제로 고구려와 전쟁을 재개할 형편이 아니었겠지만, 고구려 또한 수를 재공격한 일이 없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또 백제는 惠王 원년(598)에 수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수의 고구려 침공에 嚮導가 되겠다고 했지만, 수는 고구려가 사죄하여 이미 용서했으므로 다시 치지는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고구려의 요서공격은 소수 병력이었으며 親征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요컨대 수에 대한 고구려의 요서지방 선제공격은 비단 대수전쟁뿐 아니라 이후 대당전쟁을 하게 된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요서공격은 근본적으로 고구려의 독자성을 견지하려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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