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Ⅲ. 수·당과의 전쟁
  • 2. 당과의 전쟁
  • 2) 초기 전쟁(645)

2) 초기 전쟁(645)

 당 태종은 相里玄獎과 蔣儼 등의 외교가 실패하자 고구려 침략의 뜻을 굳히고 고구려 보장왕 3년(644) 11월에 원정명령을 내렸다. 우선 선박 100여 척을 건조하여 군량을 실어오게 했고, 營州都督 張儉 등에게 유주·영주군사와 契丹·奚·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가게 하였다. 또 太常卿 韋挺을 餽運使로 삼아 북쪽은 영주, 남쪽은 옛 大人城에 군량을 저장케 하였다.

 그리고 당 태종은 親征에 앞서 수 양제를 따라 참전했던 鄭天璹에게 行在所의 사정을 묻는 주밀성도 보였다. 정천숙은 “요동은 길이 멀어 양곡을 수송하기가 곤란하고 東夷는 守城을 잘하여 갑자기 항복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432)≪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3년 11월. 그러나 요동을 침공하여 고구려 병력을 요동으로 집결케 하고 舟師(水軍)를 東萊에서 평양으로 보내 水陸兩軍이 합세해서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또 정벌의 명분은 ① 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 ② 隋대에 전사한 백성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 ③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433)당 태종이 말한 必勝 5개 조건은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인데, 고구려의 정란을 이용하려 한 점은 주목해야 한다(≪資治通鑑≫권 197, 唐紀 13, 太宗 中之下, 貞觀 18년).

 당의 침략군은 平壤道行軍大摠管 張亮이 4만 3천의 병력을 전함 5백 척에 탑승시켜 萊州에서 평양으로 출동하고, 遼東道行軍大摠管 李世勣과 부총관 道宗이 騎兵 6만 명과 降胡를 통솔하고 요동으로 나왔다. 그리고 攻城器械로 雲梯·衝車가 동원되었으나 주된 무기는 弓矢였다.

 이 해 4월 당의 육군은 요하를 건너서 이세적은 현도성을, 도종은 新城을 포위하였다. 장검이 호병을 거느리고 建安城을 포위·공격하자 이에 대항하던 고구려 병사 수천 명이 전사하였다. 이어 이세적·도종에게 蓋牟城을 함락당했는데 城兵 1만 명이 포로가 되고 양곡 10만 석도 빼앗겼다.

 한편 당의 수군은 卑沙城을 공격해 왔다. 성은 4면이 懸絶하고 오직 西門만 오를 수 있었는데 당장 程名振과 王大度가 군을 이끌고 오르니, 성병 8천명이 함몰되는 처절한 항전에도 불구하고 5월에 함락당하였다.

 당 육군은 계속 진군해서 요동성을 공격했다. 이 성은 수의 침입 때도 死守되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므로 고구려·당 양측에서 지원도 컸던 격전장이었다. 이 요동성이 무너지면 요동일대가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 태종이 직접 이 성의 공격에 참가했고 고구려에서는 신성·국내성의 步騎 4만 명을 보내어 구원하려 했다. 고구려 구원병은 처음에 張君乂의 군을 격파했지만 도종·이세적의 기·보병에게 패하여 수천 명이 전사하였다.

 요동성은 12일간 적의 포위 속에서 시조 朱蒙에게까지 수호를 빌며 신념에 찬 항전을 계속하였다. 적의 砲車로 쏘는 大石이 3백 보를 날아와 성이 파손되었으며 衝車로 城樓를 부수었다. 적의 銳卒이 長竿에 올라 西南樓를 불질렀으므로 城衆이 동요했고 이 틈에 당병이 입성하여 끝내 함락당하였다. 이에 고구려인으로 전사자가 1만 명, 포로된 城兵이 1만 명, 남녀가 4만 명이었고, 양곡 50만 석도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당병은 요동성의 서남쪽에 위치한 白巖城을 포위·공격하였다. 이 때 城主 孫代音은 몰래 그 심복을 당병에게 보내어 항복하겠다는 신호로 刀鉞을 던지겠다고 약속했지만 병사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적과 통하여 당 태종이 주는 唐旗를 성 위에 세워서 적병이 성중에 진입한 것으로 속여 항복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적과 내응하여 항복한 예는 과거 대수전쟁에서는 없었던 일로 감투정신이 그만큼 약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요동 국경선 부근에서 적의 침공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하여 固守된 성은 安市城과 建安城이었다.

 고구려에서는 北部耨薩 高延壽와 南部耨薩 高惠眞에게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편성된 15만 명의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당 태종의 지휘 아래 안시성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은 우선 이들 구원병과 대치해야 했다. 이 때 태종은 고연수의 전략을 세 가지로 추측했다. ① 고연수가 안시성과 연결하여 保壘를 만들고 험한 곳에 자리잡고 기다리며 말갈병을 놓아 당병의 牛馬를 노략질할 것이라는 추측(上策), ② 안시성의 군대를 빼어 밤을 타서 함께 도망할 수 있다는 것(中策), ③ 당병과 직접 대결하리라는 것(下策)인데 ③을 택할 것으로 예견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상대방의 전략·전술을 가능한 몇 가지로 추측하여 이에 대한 최선의 대응책을 찾아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추측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 고연수 병영에서도 전략회의가 있었던 듯한데 연로한 對盧 高正義는 지구전에 의한 유격전과 餽運兵의 격파를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군사를 주둔시키고 싸우지 않는 반면 시일을 오래 끌면서 奇兵(기습하는 군대)을 나누어 보내어 적의 糧道를 끊음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다하면 적은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4년).

 이것은 위의 태종의 추측 가운데 ①의 상책과도 통하며 적병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최선의 전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연수는 적과 직접 대결을 선택했고 또 적의 기만전술에 속아 해이한 전투태세로 인해 패배하였다.

 당 태종은 대장군 阿史那杜尒에게 돌궐병 1천을 주어 고연수군을 유인했고, 고연수는 거짓 패주하는 그들을 추적하여 안시성 동남쪽 8里 지점의 산에 포진하였다. 40리를 이은 고연수의 軍勢를 보고 당 태종도 두려워하면서 우선 기만전술을 폈다. 사람을 고연수에게 보내어 말하되, “당은 왕을 시해한 强臣을 問罪하는 것이고 交戰이 본심은 아니기 때문에 고구려가 臣禮를 닦으면 잃은 땅도 회복될 것”이라 전하였다. 고연수가 이 말을 믿고 방비를 게을리하는 틈에 적은 밤을 타서 포위한 다음 일제히 공격해 왔다. 미처 전열을 갖추지 못한 고구려군은 대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고혜진 등은 항복하였다. 포로가 된 욕살 이하 장관 3천 5백 명은 중국 본토로 끌려갔고 말갈병 3천 3백 명은 전원 피살되었다. 또 말 5만 필·소 5만 필·明光鎧 1만 領, 기타 무기도 모두 적에게 넘어갔다. 이 전투의 패배는 고구려에게 큰 충격을 준 동시에 石黃城·銀城의 군사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수백 리에 人烟이 끊어졌다고 할만큼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434)≪舊唐書≫권 199, 列傳 149, 高麗. 여기서 고구려군의 武裝을 이해할 수 있지만, 고연수·고혜진 등은 당병의 앞잡이가 되어 안시성전투에도 참가하면서 고구려군의 상황을 제공했던 것이다.

 안시성은 험하고 10여만 명의 군사가 精銳하며 그 城主는 재능과 용맹이 있어 연개소문의 쿠데타에도 불복했었다는 바, 그 성주는 楊(梁)萬春이라 전한다.435)李丙燾,≪韓國史≫古代篇(震檀學會, 1959), 499쪽. 한편 안시성 남쪽에 있는 건안성은 병력(약 5만 명으로 추산)이 많지 않고 양식 또한 적다고 알려졌으므로 당병은 건안성을 먼저 치려는 작전도 논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군량이 안시성 북쪽에 있었으므로 안시성군에게 糧道가 차단될까 염려하여 먼저 안시성을 공격해 왔다.

 적에게 포위된 안시성군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성을 굳게 지켰다. 때로는 수백 명의 군사가 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 당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루에도 6, 7차 교전하였다. 衝車(橦)와 礮石(포석)에서 돌이 날아와 城堞을 파괴하면 木柵으로 이를 막아 적병의 침입을 방비하였다. 또 당병은 60일간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土山을 쌓고 성 안을 굽어보았는데 이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의 일부도 무너졌다. 이곳으로 적병이 몰려와서 격렬한 접전을 벌였는데 토산을 안시성군이 점령하였다.

 때는 9월, 요동에는 일찍이 寒氣가 닥쳐 초목이 마르고 물이 얼었다. 치열한 전투가 5개월간 지속되면서 당군의 군량도 다해갔으므로 당 태종은 안시성의 공격을 포기하고 退歸를 명령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당에게도 인적·물적 손실이 커서 전사자가 2천 인이고 戰馬는 10중 7, 8이 죽었고 얻은 것이라고는 없었다. 따라서 당 태종도 이 원정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측에서는 그 피해가 더욱 컸던 것이다. 현도성·횡산성·개모성·마미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협곡성·은산성·후황성의 10개 성을 함락당하여 이들 지역에서 7만 명이 붙잡혀 중국으로 끌려갔고 신성·건안성·주필산의 전투에서 4만 명이 전사당하였다.436)≪資治通鑑≫권 197, 唐紀 13, 太宗 中之下, 貞觀 19년 10월. 더욱이 고연수의 15만 병력이 일시에 무너지고 고연수 등 군지휘관 3천 5백 명이 당병에게 부역하다가 중국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 지역의 백성은 사방으로 흩어져 그 복구에 오랜 시간과 국력이 필요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한 10만 안시성 사람들의 항전은 戰勢를 고구려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안시성을 수호함으로써 당병의 발을 묶어 더 이상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그들의 평양 직공을 예방하는 동시에 고구려인의 투혼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보장왕 4년의 이 전쟁은 당으로 하여금 전략을 변경케 하여 고구려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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