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Ⅲ. 수·당과의 전쟁
  • 2. 당과의 전쟁
  • 3) 중기 전쟁(647∼665)

3) 중기 전쟁(647∼665)

 보장왕 4년(645)의 전쟁은 쌍방의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이 따랐기 때문에 향후 당의 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에서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화해할 것을 요청했지만 말이 허황되고 당의 사신에게 거만하며 늘 邊隙을 엿본다는 이유로 묵살당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거론하였는데437)≪資治通鑑≫권 197, 唐紀 13, 太宗 中之下, 貞觀 20년. 이는 보장왕 6년 2월에 해당하며, 당 조정에서 여러 관료들이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공격하더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 앞서 大駕가 親征하였을 때(645) 그 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함락된 성들은 실제 곡식을 거두었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태반의 고구려 백성들은 식량이 모자랐다. 이제 만일 偏師(小部隊)를 보내어 그 疆場을 교대로 侵擾해서 그들로 하여금 출동에 피곤하고, 쟁기를 놓고 保壘에 들어가기를 수년간 계속하면, 千里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나서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資治通鑑≫권 198, 唐紀 14, 太宗 下之上, 貞觀 21년 2월).

 요컨대 대병력에 의한 침략에 실패한 당은 守城戰과 유격전에 능숙한 고구려를 일시에 멸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長期戰略을 채택하고 일차로 압록강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를 실천해 갔다.

 그리하여 고구려 보장왕 6년(647) 3월에 당의 牛進達·李海岸의 1만 병력은 萊州에서 樓船으로 바다를 건넜으며, 李世勣·孫貳郞이 통솔한 3천 명과 영주도독의 府兵은 요하를 건너 新城道로 진입했는데 이 양군은 水戰에 익숙한 군대였다. 고구려의 南蘇城軍은 이세적의 군을 맞아 굳세게 항전했으므로 적병은 성의 외곽을 불지르고 퇴각하였다. 한편 石城의 고구려군은 우진달군과 100여 차례나 싸웠으나 성을 함락당하였다. 다시 적병이 積利城 아래로 진격하므로 1만여 명이 항전하여 2천 명이 전사하였으나 당병을 패퇴시켰다. 이 해 12월에는 보장왕의 둘째 아들인 任務를 謝罪使로서 당에 파견하였다. 이는 평화를 바라는 고구려측의 성의있는 使節이었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보장왕 7년 정월에는 당의 薛萬徹·裵行方이 3만 병력을 거느리고 내주에서 바다로 건너왔다. 烏胡鎭(요동반도 남단의 섬)將 古神感도 바다를 통해 침입했다. 이에 고구려군은 步騎 5천 명을 출동시켜 易山에서 교전했고, 그날 밤에는 1만 병력으로 고신감의 戰船까지 습격하였다. 이 상황으로 보아 고신감의 군대는 고구려군에 의해 크게 격파된 듯하다. 또 설만철이 압록강으로 들어와 泊灼城 남쪽 40리 지점에 포진했다. 이를 안 박작성주 所夫孫이 步騎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응전해서 성을 고수하였다. 이 때 고구려장군 高文이 烏骨城·安地城 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박작성을 구원하여 설만철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438)≪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보장왕 下, 7년 정월에는 泊灼城이 함락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新唐書≫권 94, 列傳 19, 薛萬徹에는 출격한 所夫孫을 斬하고 성을 함락하였다고 했다.

 이 해 6월에 당은 고구려가 困弊하다고 판단하여 다음해에 30만 명을 동원해서 정벌할 것을 의논했지만 房玄齡의 반전론에 부딪히기도 하였다.439)방현령은 고구려가 臣節을 잃지 않았고 당의 백성을 노략질하지 않았으며 後世의 우환이 될 것 같지 않은데, 단지 舊王의 치욕을 복수한다든가 신라의 원한을 대신 갚아 준다든가 하는 이유로 원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新唐書≫권 96, 列傳 21, 房玄齡). 이런 주장은 그간 고구려가 당에 대해 성의있는 교섭을 가졌고, 그것이 당의 관료 일부에 인정되었다는 입장에서 피력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신라에서는 金春秋를 당에 파견하여 羅·唐軍事同盟을 더욱 공고히 했는데, 이후 고구려·백제의 신라침공을 전하면서 구원을 청하여 당을 더욱 자극시켰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 8년(649)에 당 태종이 죽고 高宗이 즉위하자 수년간은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았다.≪舊唐書≫에는 고종이 즉위한 이 해에 任雅相·蘇定方·契必何力 등이 침입했으나 모두 큰 공없이 돌아왔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은 태종이 죽은 틈을 타서 고구려가 공격해올까 염려하여 군사적 시위를 한 것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고구려는 당과 전쟁이 없던 보장왕 13년에 安固에게 고구려·말갈병을 주어 거란을 정벌했지만 오히려 松漠都督 李窟哥에게 新城에서 패하였다.440)≪資治通鑑≫권 199, 唐紀 15, 高宗 上之上, 永徵 5년. 이 거란은 당에 복속했으므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또 이듬해에는 신라의 33성을 공취했던 바, 이에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원조를 청하고 당은 이 해 5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때 요하를 경계하던 고구려군은 程名振·蘇定方의 병력이 적음을 보고 성에서 나와 貴端水를 건너 대적하다가 1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당병은 성의 외곽과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이와 같이 당은 소수의 병력을 자주 보내어 요동지방에 침입시켜 싸우다가 물러가는 것을 장기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 기간의 전과는 기록대로 당병의 일방적 승리였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다만 소수의 병력일수록 난폭할 가능성이 커서 요동의 초토화작전으로까지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언제 다시 당의 침략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쟁과 긴장이 계속되어 불안과 피로가, 특히 요동의 고구려군에게 더욱 누적되었을 것이다. 이런 대결 속에서 전쟁을 평화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하기 위하여, 고구려는 보장왕 11년과 15년에 사신을 당에 파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신라의 무열왕 4년(657)경 신라와 당 사이에는 백제를 먼저 공격하자는 전략이 짜여진 것 같다. 따라서 보장왕 17년과 18년에 있었던 당의 고구려 침략은 같은 왕 19년에 백제를 멸하려는 陽動作戰이었다고 볼 수 있다.441)李昊榮,≪新羅의 三國統合過程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85), 133쪽. 보장왕 17년에는 정명진·설인귀가 고구려군에게 패퇴하였고442)이 때 정명진은 赤烽鎭에서 고구려의 豆方婁가 거느린 3萬軍과 싸웠는데, 정명진이 역습하여 2천5백 명을 전사시켰다고 하였다(≪資治通鑑≫권 200, 唐紀 16, 高宗 上之下, 顯慶 3년 6월). 이는≪三國史記≫와 아주 다르다. 이듬해에는 설인귀가 橫山에 침입해서 고구려 장군 溫沙門을 패배시켰다. 이렇게 고구려의 관심을 계속 요동방면으로 돌린 다음 660년에 백제를 쳤다고 믿어진다.

 아마도 당은 백제를 멸한 여세를 몰아 고구려도 멸하려 했던 듯하다. 보장왕 19년 말부터 보장왕 21년까지 3년간은 유독히 집요한 침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보장왕 19년 11월에는 계필하력·소정방·유백영·정명진 등이 침입하였다. 같은 왕 20년 정월에는 河南·河北·淮南 등 67州兵 4만 4천 명을 모집하였고 蕭嗣業은 回紇 등 諸部兵을 통솔하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4월에는 이들 여러 군부대를 재편성한 듯한데 35軍으로 묶어 水陸으로 아울러 진격하였다. 바로 이 때 당에서는 李君球의 반전론이 있었으나 대세와는 무관했던 듯하다.443)그의 반전론은 高宗의 親征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8월에는 바다를 건너온 소정방군이 浿江의 고구려군을 파하고 평양 근교에까지 육박하였다. 한편 9월에는 男生이 精兵 수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방어했는데 계필하력의 군이 얼음 위로 건너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고구려군 3만 명이 전사하여 남생이 대패했으나 당병은 철병하였다. 또 다음해인 보장왕 21년에는 龐孝泰가 蛇水(合掌水)로 침입하자 연개소문이 당병을 전멸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에 방효태와 그 아들 13 명도 모두 전사하였다. 또 소정방은 평양 근교에까지 침입했다가 큰 눈을 만나 돌아갔다.444)이 때 신라 김유신 등이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해 주었다(≪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中). 이에 대하여≪三國史記≫에서 “무릇 전후의 遠征에 모두 큰 공없이 물러났다”고 평가함으로써 고구려의 강력한 저지로 당병이 패퇴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전략에 의한 당의 소수병력이 요동지방을 자주 침입하였고 보장왕 20년(661)과 21년에는 압록강을 건너 평양근교까지 육박하였다. 이는 당이 해상 루트를 적극 활용한 증거이지만 고구려의 전투력이 그만큼 약화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나 그 아들 남생이 직접 출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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