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Ⅲ. 수·당과의 전쟁
  • 2. 당과의 전쟁
  • 4) 말기 전쟁(666∼668)

4) 말기 전쟁(666∼668)

 이 시기는 최후의 결전기였다. 당에서는 대병력을 연속적으로 투입하였고 고구려에서는 사력을 다해서 항전했지만 끝내 방어벽이 무너지고 國亡民散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고구려 보장왕 22년(663)부터 24년까지 3년간 침입하지 않던 당이 이렇게 대병을 휘몰아 급전을 서두른 이유는 고구려 내부의 권력항쟁에 따른 분열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즉 보장왕 24년에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죽자 곧 그 아들 사이에 莫離支職의 쟁탈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 세 아들 男生·男建·男産 중에서 장자인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다. 그가 지방의 여러 성을 순방하고 있는 사이에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동원하여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國內城으로 달아나 그 아들 獻誠과 함께 당으로 망명하였다.445)淵氏家의 계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曾祖 子遊-祖 太祚 ┬ 父 淵蓋蘇文 ┬ 子 男生 ┬ 孫 獻忠
         └   淵淨土  ├   男建 └ 獻誠―曾孫 隱―高孫 毖
                └   男産
(李昊榮,<高句麗의 敗亡原因論>,≪中齋張忠植博士華甲紀念論叢≫歷史篇, 1992,55쪽).
이후 남생은 당병의 향도가 되었는데, 고구려의 정란과 남생의 附唐이 얼마나 고구려에 불리한 상황을 전개시켰는가 하는 것은 賈言忠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가 요동의 戰場에서 돌아오자 고종은 전쟁의 승산을 그에게 물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필승을 장담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지난 날 先帝가 問罪할 적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틈(내부분열)이 있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속담에 ‘軍에 內應하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서 回軍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남생의 형제가 집안 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해 주고 있으니 우리는 오랑캐의 내부사정을 다 알고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臣은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新唐書≫권 220, 列傳 145, 高麗).

 이는 고종의 비위를 맞춘 일면도 있겠으나 고구려의 모든 정보가 당에 제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적극적 침략을 유발시켰다.

 이러한 당의 기세와는 반대로, 고구려에서는 통솔자와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여 각지의 전선에서 성과 병력이 무너졌다. 당에서 병력을 보낸 것은 고구려 보장왕 25년(666) 말부터 시작되었지만 實戰은 보장왕 26년에 전개된 점으로 보아 보장왕 25년은 당의 전쟁 준비기간이라 할 수 있다.

 보장왕 26년 9월, 당의 李勣(앞의 이세적과 동일인)軍은 新城을 공격하였다. 신성은 고구려 서변의 요새인데, 城兵 내부에서 분열이 생겼다. 성주를 비롯한 일부 병사는 최후까지 사수하자는 항전을, 다른 일부는 적에게 항복하자는 투항을 주장하였다. 결국 城人 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어놓은 다음 성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이 신성의 함락으로 인하여 주위의 16개 성이 한꺼번에 함락되었다. 이 때 막리지 남건이 군사를 보내어 당의 진영을 습격했지만 당의 장수 설인귀에게 패하였다. 그러나 다시 고구려군은 金山에서 高侃軍을 무찌르고 북상했지만 설인귀에게 패하여 5만 병력이 전사하였다. 이내 남소·목저·창암성이 함락되었다. 이 때 남건은 군사를 옮기어 鴨淥津을 지켰으므로 일시적으로 당병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러나 요동지방에서는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안시성 아래서는 고구려군 3만 명이 郝處俊의 당병을 습격하여 난전을 계속했으나 역시 패하였다.

 보장왕 27년 2월에는 설인귀의 정예부대에게 扶餘城(農安 부근)이 함락당하자 그 주변의 40여 성이 항복하였다. 이 때 남건은 5만 명의 병력을 보내어 부여성을 구하려 했으나, 薛賀水에서 이적의 군과 맞서 싸우다가 3만여 명이 전사하고 크게 무너졌다.

 이같이 당의 육군이 요동지방을 진격하는 동안 郭待封의 水軍은 바다로 평양을 향하여 서로 호응하였는데, 9월에는 唐의 諸軍이 압록강(의주)에 집결하였다. 고구려군이 항전했지만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당병을 막지 못해 2백여 리를 후퇴하였고 다시 辱利城(淸川江 北?)과 여타 여러 성도 함락당하였다. 그러나 당병이 요동지방을 모조리 석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문을 굳게 닫고 항전했던 11개 성을 남겨 둔 채446)≪三國史記≫권 37, 志 6, 地理 4의 말미에는 압록강 이북에서 항복하지 않은 11성·항복한 11성·도망한 7성·攻取한 3성을 특별히 기록해 놓았다. 평양을 향해 남하하였다. 한편 옛 백제 땅에 주둔한 劉仁願이 당병을 거느리고, 또 2만 명 정도로 추측되는 신라군447)≪三國史記≫권 44, 列傳 4, 金仁問條에서 이 때 신라군 20萬을 출동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백제정벌에 精兵 5만을 동원한 것은 국력을 기울인 것이라고 볼 때, 고구려정벌에는 2만 정도를 파병했다고 생각한다.이 북상하여 평양 근처로 진격하였다.

 이렇게 불리한 전황이 전개되자 도처에서 후퇴한 고구려 병사들이 평양성으로 몰려들어 최후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의 전병력이 포위망을 압축해 왔는데 계필하력군이 먼저 평양성 아래에 도착했고 이적의 군이 뒤따랐다. 이들 당병은 약 1개월간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물론 막리지 男建도 퇴귀하여 굳게 성문을 닫고 자주 군사를 성밖으로 보내 당병과 싸우게 했지만 전과를 거두기에는 너무 때늦은 듯했다. 이 때 남건은 군사를 승려 信誠에게 맡기었던 바, 신성은 小將이었던 烏沙·饒苗 등과 모의해서 적장 이적에게 내응할 것을 약속하고 성문을 열어 당병이 입성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보장왕이 남산 이하 영수 98 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니, 이로써 고구려는 보장왕 27년(668)에 國亡民散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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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당전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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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과 같은 고구려의 대당전쟁을 살펴보면 과거의 대수전쟁 때와 다른 몇 가지 양상이 엿보인다.

 첫째, 적장과 내통하여 스스로 지키던 성의 문을 열어주고 적군의 입성을 기다려서 투항한 예가 보인다. 보장왕 4년(645)의 항전에서 白巖城主 孫代音은 항전파를 속이고 내응하여 투항하였다. 또 보장왕 26년에는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는 新城 城主를 묶어놓고 師夫仇 등의 항복에 의하여 신성이 함락되었다. 이런 중요한 성의 반란은 주변까지 영향을 주어 수십 성이 제풀에 꺾여 항복하는 여파를 가져왔다. 특히 668년의 최후결전장 평양성에서 중 信誠의 내응은 고구려의 허망한 패망으로 이어졌다.

 둘째, 이러한 원인은 고구려인이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리면서 피로와 염증도 컸겠지만, 중앙정계의 정파적 분열과 대립이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정권이 백성의 신뢰를 상실했던 데 있었다고 믿어진다. 적어도 막리지직을 둘러싼 오랜 정쟁이 예상되지만, 연개소문가의 집권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그리고 그 아들 사이의 알력으로 이어진 것은 대당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들의 무단독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호불신을 극도로 조장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고연수는 연로한 高正義의 전술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패배했던 것이다.

 셋째, 고구려는 새로운 전술·전략을 개발하는 데 태만했던 것 같다. 대당전쟁 때도 대수전쟁 때와 전술·전략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당은 고구려 보장왕 4년 대병력으로 침공한 이후 장기전략을 수립하여 2代의 제왕에 걸쳐 실천하면서 고구려의 困弊와 내정의 변동을 끈질기게 기다렸던 것이다. 특히 말기의 전쟁에서 당은 水·陸 양군이 긴밀하게 상응하면서 지속적 장기전을 수행한 데 반하여 고구려에는 水軍의 활동이 미미하거나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는 전통적 守城戰으로 대응하면서도 대병력을 동원하여 당병과 회전한 예가 있다. 보장왕 4년의 고연수는 패배했지만 보장왕 21년의 연개소문은 방효태군을 전멸시켰다. 이 대병력 동원은 주목된다.

 넷째, 고구려가 대당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찾는다면 對隋政策을 올바르게 설정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하겠다. 고구려 정계는 강·온 양파가 있었는데 대수 강경파에 의하여 요서지방의 선제공격이 이루어졌고 수는 대고구려전쟁으로 멸망하였다. 그 결과 당이 탄생되었지만 당의 對高句麗觀은 고정되기에 이르렀다. 수·당은 모두 패권주의에 의한 대외정책을 폈고 따라서 수·당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성을 절대시하였다. 여기에는 오직 복종 아니면 투쟁뿐인 듯도 했다. 그러나 수에 대한 선제공격만은 피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긴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형식적 조공과 책봉 속에서 고구려가 국제적 균형과 자국의 독자성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수·당에 대한 고구려의 강경파란 결국 강압적인 수·당에 대하여 독자적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당관계에 이르러 강경파로 알려진 연개소문까지도 당과의 전쟁만은 막아보려는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노력이 당의 일부 관료에게 인식되어 방현령의 반전론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결국 고구려의 대수·당전쟁과정에서 수에게 승리했던 그 자체 속에 이미대당전쟁의 遠因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면 당에게 패망할 因子도 잉태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구려가 당에 대비한 증거는 보이지만, 수의 침략을 격퇴한 이후 당 또한 같은 전술로 방어하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사실 새로운 전술·전략이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장기적 전쟁과 무단독재가 민심을 이반시켜 대당전쟁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그 전성기에 30만∼100만 군대를 보유하였다고 했으므로448)≪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渤海靺鞨. 옛 고구려 전성기에는 ‘强兵三十餘萬 抗敵唐家 不事賓伏’이라 하였다.
또≪三國史記≫권 46, 列傳 6, 崔致遠傳에 고구려·백제의 전성기에는 ‘强兵百萬’이라 하였다.
수·당과 전쟁을 치룰 때도 최소한 이 정도였을 것이다. 수·당에 비하면, 고구려는 땅도 좁았지만 병력뿐 아니라 인구도 적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패망원인이 아니고 민심을 수습하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전쟁의 근본목적은 국가의 유지 및 이익에 있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가 절대적이라면 고구려는 그 독자성을 지키기 위하여 70여년간의 끊임없는 善戰에도 불구하고 패망으로 끝맺고 말았다. 이것이 신라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李昊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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