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과 관직
  • (2) 4∼7세기 관등제와 관직

가. 관등제

 4세기 이후 律令의 반포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는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세력을 일원적으로 편제한 정치지배 질서를 구축해 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 시기 왕권은 ‘聖王’‘太王’이란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어느 정도 전제적 권력을 유지하였다.504)徐永大,<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韓國文化≫2, 서울大, 1981), 108∼114쪽 참조. 이 시기 전제적 왕권의 기반은 일단 정치체제상으로는 관료체제의 구축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나부체제의 해체에 따라 초기 관등제는 兄系와 使者系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관등조직으로 정비되었다.

 4·5세기 관등제의 면모는 자료가 없어 구체적으로 알기 곤란하다.≪魏書≫고구려전에는 간략하게 謁奢·太奢·大兄·小兄 등 4관등의 명칭만 기록하고 있는데, 알사·태사는 각각 太大使者와 大使者의 다른 이름이다. 금석문에도 몇몇 관등이 보이는데, 고구려 광개토왕 18년(408)에 축조된 덕흥리벽화고분의 묵서명 중에는 小大兄이 있고,505)小大兄과 유사한 관등명으로는 대략 6세기 경으로 추정되는<泰川 籠吾里城 磨崖石刻銘>에 보이는 小大使者가 있다. 小大使者는 大使者로, 小大兄은 大兄으로 추정된다. 장수왕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中原高句麗碑>에는 대사자·拔位使者와 主簿의 관등명이 보인다.

 전체 관등 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대략의 윤곽만을 그려보면, 對盧를 비롯하여506)≪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조에는 ‘高句麗對盧齊于’의 존재가 보인다. 대주부·주부의 분화가 추정되고, 사자계 관등으로는 태대사자·대사자·발위사자, 형계 관등으로는 태대형·소대형(대형)·소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모두루묘지>를 보면 여러 대에 걸쳐 대형을 역임하는 모두루家에서 모두루가 대사자를 역임하고 있어, 이미 5세기에 형계 관등과 사자계 관등이 교차되어 일원적으로 편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중원고구려비>의 주부는 대사자보다 하위의 관등으로서 6세기 이후의 주부와는 위계가 다르기 때문에,507)<中原高句麗碑>의 前面 2∼3행과 8행에는 ‘前部大使者多兮桓奴主簿道使□□□’란 구절이 보인다. 이 구절의 해석은 다양한데 主簿에 관한 견해만을 보면, 大使者 多兮桓奴의 관직으로 보는 견해(申瀅植,<中原高句麗碑에 대한 考察>,≪史學志≫13, 1979, 63쪽), 桓奴部 출신인 道使직 인물의 관등으로 보는 견해(李鍾旭,<高句麗初期의 地方統治制度>,≪歷史學報≫94·95, 1982, 86쪽) 등이 있다. 그런데<중원고구려비>내에서의 인명 표기법이 官職名―部名―官等名―姓名임을 고려할 때, 主簿는 관직이 아니라 大使者에 대응되는 관등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중원고구려비>의 건립시기인 5세기 중엽에는 대사자보다 하위의 주부라는 관등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4·5세기의 관등제는 6세기 이후의 관등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위서≫고려전에서 상위 관등에 사자계 관등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은 이 시기에 전제적 왕권이 확립된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6·7세기의 관등조직은≪周書≫·≪隋書≫·≪北史≫·≪新唐書≫의 고려전과≪翰苑≫에 인용된<高麗記>및≪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志에서 볼 수 있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周 書 隋 書 新 唐 書 翰 苑 三國史記 職官志
大對盧
太大兄
大兄
小兄
意俟奢
烏拙
太大使
大使者
小使者
褥奢
翳屬
仙人
褥薩

 (13등)
太大兄
大兄
小兄
對盧
意侯奢
烏拙
太大使者
大使者
小使者
褥奢
翳屬
仙人


 (12등)
大對盧
鬱折
太大使者
皂衣頭大兄
大使者
大兄
上位使者
諸兄
小使者
小兄
仙人
古雛大加


 (12등)
大對盧(吐卒)
太大兄(莫何何羅支)
鬱折(主簿)
大夫使者(謁奢)
皂衣頭大兄(中裏皂衣頭大兄)
大使者(大奢)
大兄(襭支)
拔位使者(儒奢)
上位使者(契達奢使者, 乙奢)
小兄(失之)
諸兄(翳屬, 伊紹, 河紹還)
過節
不節
先人(先元, 庶人)
 (14등)


主簿:(一吉飡)
大相:(沙飡)
位頭大兄:(級飡)
從大相:(級飡)
小相:(奈麻)
狄相:(奈麻)
小兄:(大舍)
諸兄:(舍知)
先人:(吉次)
自位:(烏知)


<표 1>고구려 관등조직표

 위의 표를 보면≪주서≫고려전 등에 보이는 6세기의 관등조직의 구조와≪한원≫<고려기>및≪삼국사기≫직관지 등에 보이는 7세기의 관등조직의 구조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6세기의 관등조직은 형계 관등과 사자계 관등으로 나뉘어 서술되어 있음에 반하여, 7세기의 관등조직은 형계 관등과 사자계 관등이 서로 교차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서마다 각 관등의 등급과 명칭에 약간의 異同이 있으며, 전체 등급수에도 차이가 있다.≪수서≫·≪구당서≫·≪신당서≫고려전에는 12등으로 기록되어 있고,≪주서≫고려전에는 13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명백히 관등이 아닌 褥薩을 제외하면 12등이다.<고려기>에는 14개 관등을 나열하고 있으나 過節·不節은 관등명으로 보기 어렵다.508)과절·부절은 하위 관직명으로 추정된다(林起煥,≪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 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95, 89쪽). 직관지에는 다른 사서에 보이지 않는 自位가 최하위의 관등으로 나타나고 있다.509)自位에 대해서는 未入仕者에 대한 신분적 관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宮崎市定,<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 1959, 273쪽 및 武田幸男, 앞의 글, 35쪽). 이상의 기록을 검토하면, 6세기 이후 고구려 관등은 대략 12등∼14등으로 변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상대적으로 자료가 풍부하고, 그 내용도 비교적 당대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한원≫<고려기>와≪삼국사기≫직관지 기사를 토대로 7세기의 관등조직을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510)<高麗記>는 영류왕 24년(641)에 고구려를 방문한 職方郎中 陳大德의 견문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다른 중국 史書의 기록보다는 그 내용이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吉田光男,<『翰苑』註所引「高麗記」について>,≪朝鮮學報≫85, 1977). 또 職官志기사는 신라에 귀의한 고구려의 官人들을 대상으로 신문왕 6년(686)에 신라의 京位를 수여하는 기준과 원칙을 정한 기사로서(≪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 下), 최말기 고구려의 관계조직이나 관인사회의 구조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와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大對盧(吐卒)
太大兄(莫何何羅支)
主簿(鬱折)
太大使者(謁奢·大相)
位頭大兄(中裏位頭大兄)
大使者(大奢·從大相)
大兄(襭支)
拔位使者(儒奢·小相)
上位使者(契達奢·狄相)
小兄(失之)
諸兄(翳屬·伊紹·河紹還)
先人(先元·庶人)
自位

<표 2>7세기의 관등조직511)上位使者 아래 小使者의 관등을 하나 더 설정하여 14관등으로 복원한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앞의 글, 4∼5쪽). 그러나 小使者는 拔位使者의 이칭이라는 견해도 있다(林起煥, 앞의 글, 94쪽).

 다음 6세기의 관등조직을 살펴보자. 위<표 2>를<표 1>의≪주서≫기사와 비교하면,512)6세기 관계조직의 전모를 전해주는 자료는≪周書≫·≪隋書≫·≪北史≫高麗傳인데, 이들 사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인 唐初에 편찬되었다. 각 史書의 고려전은 대개 동일 계통의 자료에 의거하여 서술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北史≫의 기사는 褥薩을 제외하면≪周書≫의 기사와 동일하고,≪周書≫와≪隋書≫의 기사도 大對盧와 對盧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동일하기 때문에,≪周書≫기사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일단 개별 관등명의 상당부분이 일치하고 있다. 烏拙은 음운상 鬱折(主簿)에 해당되는 관등이고, 翳屬은 諸兄의 異稱이다. 그리고 小使者·意俟奢·褥奢는 같은 사자계 관등인 7세기의 拔位使者와 上位使者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位頭大兄에 해당하는 관등이 없는데, 기록의 누락이거나 위두대형이 뒤늦은 시기에 성립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513)위두대형은<高慈墓誌>에 보이는 고자의 祖 高量(三品位頭大兄柵城都督兼大相), 父 高文(三品位頭大兄兼將軍)의 예로 보건대, 6세기말∼7세기초경에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580년 무렵까지의 기록이 실려있는≪周書≫고려전이나 610년까지의 사정을 전하는≪隋書≫고려전 단계에는 位頭大兄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意俟奢를 위두대형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며(宮崎市定, 앞의 글, 256쪽), 意俟奢의 ‘奢’는 오식으로서 ‘意俟’를 위두대형의 異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林起煥, 앞의 글, 100쪽).

 그리고≪주서≫고려전에는 6세기의 관등조직이 형계 관등과 사자계 관등으로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사자계와 형계 관등이 교차되어 구성되어 있었다.<平壤城石刻>을 보면,514)평양성의 축조시기는 6세기 후반이다(閔德植,<高句麗의 後期都城>,≪韓國史論≫19, 國史編纂委員會, 1989, 206∼211쪽). 당시 각 구간의 축조 담당자들의 관등은 소형이나 상위사자인데, 이는 상위사자와 소형이 대체로 비슷한 위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등명이나 등급 수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6세기의 관등제도 7세기의 관등제와 기본 골격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15)≪周書≫고려전의 기사를 그대로 인정하여,≪唐書≫고려전 단계에 비로소 官階的 성격을 갖게 되고, 또 使者系 官階의 지위가 상승한 것도 지배계급내의 변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 견해도 있다(金哲埈, 앞의 책, 137쪽). 다만≪주서≫고려전 등에 형계 관등이 상위로 기록된 것은 귀족연립체제가 유지되던 6세기 관등제가 형계 관등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일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7세기 관등조직을 중심으로 관등제의 운영상을 살펴보자. 제1위인 대대로는 초기의 대로에서 분화·발전한 관등이다. 대대로의 성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6세기에는 당시 귀족연립정권 아래에서 귀족회의체의 의장으로서 기능하며 국정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당시 대대로의 정원은 1명, 임기는 3년이었으며, 대대로의 선임시에는 유력귀족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충돌을 벌이기도 하였다.516)≪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高麗.
≪翰苑≫高麗.

 제2위의 태대형은 후기에는 집권적 관직인 莫離支라고도 하였는데, 국정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유력 귀족가문의 대표자가 차지하였다. 정원은 다수였으며, 군사권을 장악한 관등으로 생각된다.517)林起煥,<6·7세기 高句麗 政治勢力의 동향>(≪韓國古代史硏究≫5, 1992), 29∼36쪽.

 나머지 관등의 구체적인 기능과 성격은 잘 알 수 없으나, 제5위의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행정권과 인사권·군사권의 행사를 독점하는 최상위의 관등으로서,518)≪翰苑≫高麗. 6·7세기 귀족연립정권기에는 귀족회의체의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관등제의 운영에 있어서는 일정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의 범위가 정해져 있었다. 武官의 경우를 보면 최고위급 무관직인 大模達에는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그 아래의 末客에는 대형 이상의 관등이, 幢主에는 소형 이상의 관등이 임명되었다. 또 通事·典客·國子博士 등의 하위 관직에는 소형 이상이 취임하였다.519)위와 같음.<泉男生墓誌>를 보면 남생은 선인에서 소형―대형―위두대형의 순으로 관등이 승진되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대체로 위두대형·대형·소형·선인이 각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하한선임을 알 수 있다.520)이를 통해 고구려 관등제가 4계층 구조를 갖고 운영되었던 것으로 이해한 경우도 있으며(武田幸男, 앞의 글, 43쪽), 대사자·상위사자·선인을 하한으로 하는 3계층일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林起煥, 앞의 글, 1995, 110∼111쪽).

 이와 같이 관직과 대응되는 관등의 범주가 규정되고, 그것도 하나의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이 단일 관등이 아니라 복수의 관등군으로 묶여져 있다는 점은 신라 관등제의 운영과 유사하다.521)신라 관등제와 골품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李基東,<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33∼134쪽 참조. 이는 고구려의 관직체계 역시 신라 골품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등체계보다는 그것을 규제하는 신분체계에 의해 성립·규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관등제의 운영이 체계화되면서 冠制에도 구분이 있었다. 지배층은 折風을 쓰는데, 官人들은 거기에 새깃을 꽂아 구별하였다. 또 관인 중에서도 관등의 높고 낮음에 따라 冠의 색깔에 구분이 있어, 왕은 백라관을 쓰고 大臣은 청라관을 쓰며, 하위의 관료는 강라관을 썼다. 대신의 관은 蘇骨이라고 불렀으며 금은으로 장식하였다.522)≪周書≫·≪隋書≫·≪北史≫·≪舊唐書≫·≪新唐書≫의 고려전에 전하는 고구려의 복식제에 관한 기사는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官人과 非官人 및 관등의 등급에 따른 구분이 있었음은 공통되는데, 이는 관료체제 발달의 결과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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