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합좌제도
  • (1) 제가회의

(1) 제가회의

 나부체제에서 중앙정치세력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大加와 小加 등 제가세력이었다. 대가와 소가는 모두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갖는 존재로서, 부여의 경우에 대가는 수천 가호, 소가는 수백 가호를 지배하였다.529)≪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고구려의 대가와 소가도 이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들 제가세력은 나부로 편제되어 고구려연맹체의 지배층을 구성하였다.

 계루부왕권은 각 나부의 외교권과 무역권을 박탈하고, 또 大加가 설치한 관료의 명단을 보고받는 등 나부 내의 일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한편으로 각 나부는 아직 일정한 정도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530)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國史學科, 1975), 13쪽. 제가세력은 나부를 기반으로 하호를 지배하고 독자적인 군사력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계루부왕권도 원할한 국내 통치와 대외정복활동을 위해서는 제가세력의 동의와 협조를 구해야만 하였고, 제가들은 이를 근거로 중앙의 정치운영에 참여하였다.

 제가들이 국정의 운영에 참여하는 중요한 통로는 諸加會議였다. 제가회의에서는 대외전쟁이나 국정의 중대사를 결정하여 당시 취약한 통치조직을 보완하며 국가 전체의 동원력과 통합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기능을 하였다.531)盧泰敦,<三國의 政治構造와 社會·經濟>(≪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214∼215쪽. 특히 대외정복활동에서는 제가의 군사력이 동원되었으므로, 정복의 성과물의 분배나 공납물의 수취 사안들은 제가회의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동옥저에서 조세의 수취를 大加가 관장한 사실이나,53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제가회의의 대표자로서 국상인 明臨答夫 등이 양맥부락을 통솔한 예에서 엿볼 수 있다.533)≪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2년. 이외에 제가회의에서는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국사범들을 평의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534)≪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한편 초기 제가회의에서는 왕을 치폐하는 등 왕위계승에도 간여하였다. 태조왕과 신대왕, 또는 산상왕의 즉위과정에서 보듯이,535)≪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즉위년 및 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즉위년.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前王이 살해되거나 후사가 없을 때 신왕의 즉위에 관여한 ‘國人’이나 ‘群臣’들은 곧 제가회의의 구성원들이었을 것이다. 부여의 경우에도 位居가 죽고 適子가 없자 제가들이 孽子인 麻余를 왕으로 세운 예가 있다.53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이처럼 제가회의는 왕위계승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고 제가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능을 하였다. 국상 倉助利가 군신과 모의하여 왕권강화책을 추진하던 봉상왕을 폐위하고 미천왕을 즉위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537)≪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봉상왕 9년·미천왕 즉위년.

 이와 같이 국정을 논의하고 왕권을 견제하여 제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제가회의의 의장은 相加였다. 상가는≪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보이는 群臣의 대표자인 國相과 동일한 존재로 짐작된다. 다만 명칭상으로 볼 때 상가는 제가의 대표자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 반면에, 국상은 왕권 아래 관료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제가들이 점차 중앙귀족으로 편제되면서 제가회의의 기능 역시 변화되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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