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합좌제도
  • (2) 귀족회의

(2) 귀족회의

 3세기말 이후 왕권이 강화되고 나부체제가 해체되어 가면서 제가세력은 중앙귀족으로 전화되었다. 제가세력의 존재형태가 변화하고 관등·관직제나 지방제도 등 보다 체계화된 행정조직이 갖추어지면서 국정 전반을 논의하던 제가회의는 소멸하고, 그 대신 중앙귀족관료들의 합좌기구로서 귀족회의체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왕권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를 통하여 전제적 권력 기반을 구축해 갔다. 따라서 전제적 왕권이 행사되던 5세기에는 합좌제도로서 귀족회의체가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했을 지가 의문이다. 귀족회의체가 정치적 실권을 갖게된 것은 후기 귀족연립정권기에서였다.

 安藏王 이후 고구려 왕권은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갔다. 특히 왕위계승과정에 귀족들이 개입하면서 안장왕이 희생되었고, 그의 아우로 왕위를 계승한 安原王 역시 麤群과 細群의 두 외척세력의 정쟁과정에서 살해되고 말았다.538)≪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25년 및 권 19, 欽明天皇 6년·7년. 이렇듯 불안한 정국에서 왕권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유력한 귀족들이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을 성립시켰다.539)盧泰敦,<5∼6世紀 東亞細亞의 國際政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東方學志≫44, 1984), 50쪽.
林起煥, 앞의 글(1992), 24∼29쪽.

 귀족연립정권을 운영하는 가장 중심적인 기구는 최고위 귀족들인 대신들의 회의체인 귀족회의였다. 이 귀족회의의 의장은 국정을 총괄하는 지위인 大對盧였다. 그런데 대대로는 유력 귀족들의 역관계에 의해 선임되었다.

 ≪한원≫에 인용된<고려기>에 의하면 대대로의 임기는 3년인데 유력한 자가 있으면 임기에 구애되지 않고, 만약 여의치 않으면 서로 군사를 동원하여 정쟁을 벌여 이긴 자가 취임하였는데, 이 때 왕은 궁문을 닫아걸고 이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즉 최고의 관직인 대대로의 선임에 왕권이 전혀 개입하지 못함으로써 고구려 왕은 정국을 주도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무력한 존재였고, 단지 귀족들이 대대로의 선임과정에서 세력관계를 조정하면서 정치운영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로 떠오른 것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莫離支였다. 막리지는 제2위의 관등인 太大兄과 동일하거나 태대형이 취임하는 관직으로 보이는데,540)武田幸男, 앞의 글, 24∼32쪽.
林起煥, 위의 글, 29∼32쪽.
그러나 莫離支를 大對盧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견해(末松保和,<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158∼161쪽·李弘稙,<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301∼304쪽 및 請田正幸,<高句麗莫離支考>,≪朝鮮歷史論集≫上, 1979, 120∼121쪽)와 최고의 집권적 관직으로 보는 견해(이승혁,<고구려의 막리지에 대하여>,≪력사과학≫1985-1, 19∼21쪽)가 있다.
당시의 유력 귀족가문의 대표자들이 이를 차지하였으며, 대대로를 차지하기 위해 정쟁을 벌이는 유력한 후보였다.

 귀족연립정권 아래에서는 대대로·태대형·울절·태대사자·위두대형의 관등이 “機密을 장악하고 政事를 도모하며 兵士를 징발하고 官爵의 인사권을 차지하는” 등 권력을 독점하였다.541)≪翰苑≫高麗. 따라서 이들 상위 5개 관등을 소지한 대신들이 귀족회의체의 구성원이었을 것이다.

 귀족회의에서는 중요한 국사를 논의·결정하고 정무를 처리하였다. 귀족회의의 의장인 대대로의 선임도 귀족회의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며, 여기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각 귀족세력이 무력을 동원하여 정쟁을 벌였다. 또 왕권이 약화된 상황이기 때문에 왕위의 계승문제도 귀족회의에서 관여하였을 것이다. 더이상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백제의 좌평회의나 신라의 화백회의와 그 기능이 유사하였을 것이다.

 귀족연립정권기에 각 유력귀족간의 세력관계를 조정하면서 국정을 장악한 귀족회의는 보장왕대 淵蓋蘇文의 집권기에는 그 기능이 약화·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정변을 일으켜 수많은 대신을 살해하고 집권한 연개소문은 太大對盧와 太莫離支 등 최고의 집권적 관직을 신설하여 취임하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요직을 맡겨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542)林起煥, 앞의 글(1992), 45∼47쪽.

 이러한 동향은 대대로의 선임을 통한 귀족들간의 합의에 기초하는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연개소문 개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무단적 정치행태 속에서 귀족회의체가 그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따라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다른 귀족들의 불만이 쌓이게 되고, 결국 당의 침입이라는 대외적 위기 속에서 중앙귀족들과 지방세력이 이탈하는 요인이 되었다.

<林起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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