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제도
  • (2) 「성·곡―촌」제의 성립

(2) 「성·곡―촌」제의 성립

 4세기 이후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초기의 다원적이고 간접적인 지방지배방식은 극복되어 갔다. 자치권을 갖고 있던 단위집단들이 지방행정단위로 개편되고, 거기에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어 다스렸다.

 나부통치체제가 해체되어 가면서 재지 수장층인 제가세력들은 수도로 올라와 중앙귀족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 이들이 다스리던 나부지역은 각 단위 곡집단이 지방행정단위로서 城과 谷으로 편제되었으며, 아울러 곡집단 내부의 소집단들은 村으로 편제되었다.

 2세기 고국천왕대에 國相으로 임용되었던 乙巴素는 西鴨淥谷 左勿村 출신이었다. 여기서 「谷―村制」로 정비된 지방행정조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데, 당시에는 아직 나부체제가 유지되는 시기이므로 이 기록은 후대에 윤색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山上王의 小后는 灌奴部 출신인데,≪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酒桶村 출신으로 나온다.55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산상왕 12년.
즉 나부 내의 소집단을 중앙에서 촌으로 파악하고 있는 예이다. 또 3세기말 美川王은 烽上王의 박해를 피해서 압록강 일대에 숨어 지냈는데, 이 때 그의 행적을 기록한 기사에는 다수의 촌명이 보이고 있으며, 이들 다수의 촌을 다스리는 谷단위 지방관으로 鴨淥宰가 등장하고 있다.557)≪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미천왕 즉위년. 이러한 사례들은 나부체제의 해체과정에서 나부의 단위집단들이 점차 谷―村으로 개편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558)乙巴素는 계루부 소속일 가능성이 있고, 또 당시에는 계루부내 제가세력을 수도의 방위부로 개편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부에 비해 谷―村制로의 개편이 일찍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灌奴部도 상대적으로 그 세력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那部의 기능을 일찍 상실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공납적 지배를 하던 속민집단에 대해서도 3세기말부터는 점차 각 읍락을 城·谷으로 편제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려 직접적인 영역지배를 도모하였다. 봉상왕대에 동북 新城의 宰와 서북 신성의 太守를 역임한 북부 출신 高奴子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559)≪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봉상왕 2년·5년. 고노자가 파견된 동북 신성은 북옥저 지역이고, 서북 신성은 양맥을 지나 서북부 최변경의 요충지로서, 양지역 모두 과거에 속민지배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이들 정복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역지배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즉 교통로상의 군사적 요충지에 성을 축조하고 이를 거점으로 교통로상에 위치한 여러 집단을 행정단위로 편제하여 통치하였던 것이다.560)余昊奎,<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남도와 북도를 중심으로―>(≪韓國史硏究≫91, 1995). 광개토왕대에 활동한 牟頭婁의 묘지에는 ‘北道城民谷民’이란 구절이 보인다.561)武田幸男,<牟頭婁一族と高句麗王權>(≪朝鮮學報≫99·100, 1981). 여기의 「道」는 부여의 四出道의 道, 또는 고구려 후기 지방관명의 하나인 道使의 道와 같은 의미로, 교통로 또는 그 교통로상에 위치하는 지역을 뜻한다.562)武田幸男, 위의 글, 160쪽. 이는 북부여지역이 북도란 교통로를 중심으로 성과 곡이란 행정단위에 의해 통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이다.

 이러한 「성·곡―촌」제에 입각한 중앙집권적인 지방통치제를 잘 엿볼 수 있는 자료는<廣開土王陵碑>의 守墓人烟戶條이다. 수묘인이 차출된 舊民지역 14곳 중에 성이 7곳·곡이 2곳이며, 新來韓穢지역은 총 36곳 중 31곳이 성이다. 여기서 당시에 성·곡을 단위로 한 지방통치체제가 보편적으로 전개되고, 그 중에서도 성단위 통치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구민지역 중에는 과거 북옥저·동옥저지역과 양맥지역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지역에도 과거의 간접적인 속민지배형태가 완전히 청산되고 성·곡을 단위로 한 직접적인 지방지배체제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563)林起煥, 앞의 글, 63∼64쪽. 물론 성·곡의 행정단위가 아닌 특수한 지배형태도 여전히 존재하였지만,564)武田幸男,<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東洋文化硏究所紀要≫78, 東京大, 1978), 126∼139쪽. 전반적으로 성·곡지배체제가 관철되어 갔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

 성·곡의 행정단위 아래에는 村制가 실시되었다.<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영락 6년(396)의 백제정벌전에서 58성 700촌을 획득하였다. 여기서 성과 촌의 비율은 대략 1 : 12가 되어, 한반도 중부지역은 1개 성 아래에는 대략 10여 개의 촌이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촌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곤란하나 대체로 자연촌락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565)李宇泰,<新羅의 村과 村主>(≪韓國史論≫7, 서울大 國史學科, 1981), 82∼83쪽.

 지방관은 성과 곡 단위에 파견되었다. 이 시기의 지방관으로는≪삼국사기≫에 宰와 太守·守가 보이나,566)≪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55년 10월 및 권 17, 高句麗本紀 5, 서천왕 19년 4월·봉상왕 2년·5년·미천왕 즉위년. 이러한 중국식 지방관명이 그대로 사용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다만 봉상왕대의 고노자가 小兄으로서 동북의 新城宰를 역임하고 다시 승진하여 大兄으로서 서북의 新城太守를 역임하는 것을 보면, 재와 태수 사이에는 지방통치 조직상의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567)중국에서의 용례도 太守는 郡守이고, 宰는 縣令을 가리킨다.

 한편 5세기 금석문 자료에는 守事가 보인다. 즉<모두루묘지>의 ‘令北夫餘守事’와<中原高句麗碑>의 ‘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등 두가지 사례가 있다. 수사의 관등이 대형 이상급이라는 점에서, 고노자의 예에서 보이는 태수와 동일한 성격의 지방관으로 볼 수 있다. 이 태수와 수사는 관등상으로 볼 때 6세기 이후의 處閭近支(道使)에 해당된다. 수사 아래의 지방관명은 사료에 나오지 않으나, 신성재 고노자의 예에서 대개 소형급이 역임하였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후기의 婁肖에 해당된다.

 4·5세기에는 아직 수사보다 상위의 지방관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수사는 다수의 성·곡을 통솔하고 있었다. 예컨대 모두루는 영북부여수사로서 북도지역인 북부여 일대를 관장하고 있었고, 수사가 파견된 古牟婁城도 중원 일대의 여러 성을 통할하는 중심 성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따라서 4·5세기에는 지방관으로 볼 때 太守(守事)―宰의 2단계 지방통치조직을 갖추었던 것으로 짐작된다.568)林起煥,≪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95), 154쪽.

 이러한 4·5세기의 지방통치조직을 6세기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아직 지역단위의 광역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점, 행정단위로서 성이 확대되고 있으나 아직 곡이나 특수한 행정단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569)<광개토왕릉비>수묘인연호조에 보이는 舊民지역의 東海賈·賣句余民·連·俳婁人이나, 新來韓濊지역의 豆比鴨岑韓·句牟客頭·求底韓·百殘南居韓 등은 특수한 행정단위이다. 성단위의 일원적인 지방통치조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