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2) 군사제도
  • (1) 군사조직의 변화

(1) 군사조직의 변화

 고구려가 일어난 압록강·혼강 일대의 지리적 조건은≪삼국지≫고구려전의 기록대로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이 없으며, 좋은 田地가 부족하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치 못한” 상황이었다.58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대외정복활동을 통하여 전쟁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하거나 공납물을 수취하여 부족한 생산물을 보충하였다. 토질이 비옥하고 농업생산물이 풍부한 동옥저를 복속시켜 조세를 비롯하여 貊布와 魚鹽 등 해산물을 수취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587)≪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고구려는 이와 같은 약탈전쟁이나 복속지를 확대하기 위한 군사활동을 초기부터 활발하게 전개하였기 때문에,≪삼국지≫고구려전에는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58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이러한 사정으로 볼 때 고구려는 일찍부터 군사조직이나 군사동원체계를 잘 갖추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초기 고구려의 국가체제는 자치권을 갖는 那部의 연맹체제였기 때문에, 군사조직에 있어서도 각 나부가 군사조직의 단위가 되었을 것이다. 태조왕대에 관나부 패자 達賈와 환나부 패자 薛儒가 각각 주변의 소국인 藻那와 朱那를 정벌한 사실에서도 나부를 단위로 하는 군사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589)≪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20년·22년.

 또한 新大王 5년(169)에는 大加 優居와 主簿 然人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公孫度를 도와 富山賊을 토벌한 바 있고, 또 동천왕 12년(238)에 위나라가 公孫淵을 공격할 때에도 대가와 주부에게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원조케 한 바 있다.590)≪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5년 및 권 17, 高句麗本紀 5, 동천왕 12년. 이 때 대가가 거느린 군사는 곧 대가 자신이 지배하는 나부에서 동원된 군사들이었을 것이다. 다만 대가와 더불어 왕의 측근세력인 주부가 출정군의 지휘부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계루부왕권이 주부를 통하여 대가들의 군사활동을 적절히 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나부통치체제의 진전에 따라 계루부왕권이 대가들이 설치한 관원의 명단을 보고 받는 등 나부 내의 일에도 어느 정도 통제력을 발휘했던 동향과 짝하는 것이다.

 한편 제가들은 자신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고구려왕이 주도하는 군사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대외전쟁에서 얻어지는 성과물을 분배받거나 군공에 대한 포상으로 식읍을 하사받는 등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받았을 것이다. 예컨대 복속지인 동옥저로부터 조세 등 공납물을 징수하는 일을 대가가 주관한다거나,591)≪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國相 明臨答夫나 安國君 達賈로 하여금 梁貊부락이나 肅愼부락을 통솔케 한 사실에서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592)≪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2년 및 권 17, 高句麗本紀 5, 서천왕 11년. 또 군공으로 식읍을 받은 예로는 동천왕대 관구검의 침입시 동천왕을 호위한 동부 密友와 하부 劉屋句가 식읍을 하사받은 경우를 들 수 있다.593)≪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동천왕 20년.

 이와 같이 초기에는 군사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일정한 경제적 대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부의 주민 모두가 군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삼국지≫부여전을 보면, 부여에서는 집집마다 갑옷과 병장기를 소유하고 있고, 또 전쟁시에는 諸加들이 스스로 싸우고 下戶는 식량 등을 공급하는 일종의 보급대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한다.594)≪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물론 일반 피지배계층인 하호가 집집마다 무기를 소유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여의 각 읍락은 지배층인 豪民과 피지배층인 하호들로 구성되었는데, 하호와 구별되는 글자 그대로 「부호한 민」인 호민들이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지배층으로서 전쟁을 담당하는 특권적 전사집단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초기 고구려의 경우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삼국지≫고구려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는 좌식자로서 그 수가 만여 구이고, 하호는 멀리서 식량과 어염을 지고 운반·공급하는 노역을 하였다.59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즉 생산계층으로서 하호의 사회적 처지는 부여의 하호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대가 만여 구를 곧 전사집단의 구성원으로 볼 수 있다. 이 대가들은 평시에는 하호의 지배자로서 생산물을 수취하였으며, 전쟁시에는 무기를 들고 전쟁에 참여하여 전쟁의 성과물을 분배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 나부체제가 해체되고 왕권에 의한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제가들이 통솔하는 나부병들도 점차 왕권 아래의 군사조직 내로 편제되었다. 아울러 대외정복활동이 확대되면서 이제는 소국 단위의 전쟁이 아니라 중국세력이나 백제 등과 대결하는 국가적 규모의 전쟁이 치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소규모 전사집단에 의존하는 초기 형태는 지양되고 전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차원의 병력 동원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반민의 동원은 役의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광개토왕릉비>에 전국적으로 수묘인을 징발한 사례를 보면, 일반민을 대상으로 한 군역의 징발 역시 충분히 가능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고국원왕대 전연의 침입시에 5만 군을 동원한 사실이나, 광개토왕대 영락 10년(400)의 신라구원전과 영락 17년의 전투에서 각각 步騎 5만 군을 동원한 사례는596)≪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12년.
<廣開土王陵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12∼14쪽.
일반민에 대한 군사 동원체계가 일정하게 갖추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군사조직이 국가적 기반을 갖게 되면서 중앙권력에 의한 군사동원이나 편제조직도 일원적으로 정비되었으리라 생각되나,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王幢’·‘官軍’이란 표현에서 최고 군통수권자로서 왕의 위상이 강화되었고, 군사조직의 공적 성격이 두드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후기의 군사조직은 중앙 군사조직과 지방 군사조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 군사조직으로는 수도의 5部 조직을 들 수 있다. 본래 수도의 5부는 행정조직이 군관구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각 부에는 일정 수의 군사가 배치되어 중앙군으로서 수도의 방위 임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溫達이 소속되어 수렵에 참가한 5부병이나,597)≪三國史記≫권 45, 列傳 5, 溫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동원한 부병이 이에 해당한다.598)≪三國史記≫권 49, 列傳 9, 蓋蘇文.

 중앙군의 무관직을 보면, 최고위급 무관으로는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임명되는 大模達이 있는데 일명 大幢主 또는 莫何邏繡支라고 하였다. 대모달은 당의 衛將軍에 비견되는 것으로 보아 궁중숙위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대모달 아래는 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는 末客이 있어 병사 1천 명을 통솔하였다.599)≪翰苑≫高麗. 그리고 말객 아래에는 幢主가 있어 군사 1백 명을 거느렸던 것으로 추측된다.600)<中原高句麗碑>에는 “新羅土內幢主 下部 拔位使者”의 존재가 보이는데, 명칭상으로 大模達(大幢主)과 연결된다. 이 당주의 관등은 발위사자로서 7세기의 관등 조직에서는 大兄 아래의 관등이기 때문에, 당주를 대형 이상의 관등이 취임하는 末客보다 하위의 무관으로 인정해도 무리는 없다. 또 당주가 대략 100人을 거느렸을 것이라는 점은≪魏書≫권 103, 蠕蠕傳의 “처음으로 軍法을 세우는데 1천 인을 軍이라 하여 將 1인을 두고, 1백 인을 幢이라하여 帥 1인을 둔다”라는 기사가 참고된다. 이를 5부 조직과 관련시켜 보면, 각 부에는 1천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말객이 지휘하고 이들 5부의 중앙군을 대모달이 총괄 지휘한 것으로 짐작된다.601)참고로 백제의 5부병을 보면 각 부에 5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지휘하였다(≪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한편<泉男産墓誌>를 보면 남산은 21세에 대형으로서 中裏大活을 역임하고 23세에 위두대형에 올랐다가 다시 中軍主活이 되었다. 중군주활은 무관직임이 분명하고, 중리대활도 주활 휘하의 무관직일 것이다. 아마도 主活―大活은 대모달―말객과 동일한 관직이거나 그에 비견되는 무관직으로 추정된다.602)林起煥, 앞의 책(1995), 107쪽.

 지방 군사조직은 지방 행정조직과 하나의 체계로 짜여졌다. 즉 지방관은 해당지역 지방군을 통솔하는 역할을 동시에 가졌다.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였던 高延壽와 高惠眞의 관직은 최상위 지방관인 褥薩이었다.603)≪冊府元龜≫에는 高延壽 등의 관직을 軍主로 기록하고 있는데, 褥薩과 군주가 동일 관직이던가, 褥薩이 軍主를 겸직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 무관명인 말객의 다른 이름은 郡頭인데, 이는 군의 지방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최하위 지방관인 婁肖와 百頭도 무관직인 幢主와 대응시켜 볼 수 있다.604)百頭는 어의상 백명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幢主도 100人 단위의 幢을 지휘한 무관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고구려 후기의 지방 행정조직은 그대로 지방군의 편제 조직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래 城은 군사적 방위시설물로서 이러한 성을 행정단위로 편제할 때에는 자연 지방통치제의 군사적 성격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수·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성단위의 개별 방어망을 구축하는 전략을 고수하기 때문에, 지방 행정조직이 군사조직과 일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지방관이 군사권까지 장악함으로써 갖게되는 강대한 권한으로 인해,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될 경우 독립적인 지방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정변을 일으킨 연개소문이 자신에게 반발한 안시성주와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605)≪新唐書≫권 220, 列傳 145, 高麗. 이는 고구려 지방통치제가 갖는 군사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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