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3) 성곽시설

3) 성곽시설

 고구려의 성곽은 크게 平地城과 山城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평지성은 평지에 축조되어 평상시에 지배층이나 주민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으며, 산성은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되어 외적의 침입시에 주위의 주민이 入居하여 항쟁하는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이 위주였다. 이외에 교통로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협곡에 쌓은 차단성이나 높은 산정에 설치되어 군사적 조망과 봉수대의 기능을 하는 城堡도 산성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고구려의 평지성은 그다지 많지 않아 환인의 下古城子城, 집안의 集安縣城, 평양의 安鶴宮城 등 도성과 遼東城이 대표적이며, 그외 대부분의 성은 산성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성곽은 산성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고구려의 산성은 험준한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지형에 따라 그 형태가 일정치 않으나, 크게 포곡식 산성과 테뫼식 산성으로 구분된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성안에 끼고 산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아 3면은 높고 한 면이 낮은 형태가 많으며 대체로 규모가 크다. 테뫼식 산성은 산정상부를 둘러싸고 성벽을 두른 것으로 규모가 작고 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그리고 이 양자를 혼합한 형태도 있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하나의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최초의 수도인 환인에는 하고성자성과 五女山城, 두번째 수도인 집안에는 집안현성과 山城子山城, 그리고 장수왕대에 천도한 평양에는 大城山城과 안학궁성이 산성과 평지성의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614)車勇杰,<高句麗 前期의 都城>(≪國史館論叢≫48, 國史編纂委員會, 1993), 6∼7쪽. 그리고 평원왕대에 축조한 평양의 長安城은 아예 산성과 평지성을 결합한 형태로 축조되었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은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위급시에 주민과 더불어 산성으로 들어가 외적을 방어하였다. 환인현의 동북쪽 혼강 북안에 자리잡은 오녀산성은 서쪽과 남쪽은 천연의 절벽이고 산의 정상은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평탄하며 동쪽과 동북쪽의 경사면 산허리에 돌로 축성이 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2,600m에 달하며 축성의 형태로 보아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이다.615)車勇杰, 위의 글, 6쪽. 오녀산성은 험준한 산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방어에 적당할 지 모르나, 일상생활의 거주지로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곳에서 서쪽으로 십여리 쯤에 위치한 하고성자성이 평지성으로서 역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고성자 고성은 혼강가의 평지에 축조된 토성으로 동벽은 강물에 의해 유실되어 현재 600여 m가 남아 있다. 이 성은 한대에 축조된 것으로 고구려 건국 후에 계속해서 도성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616)魏存成,<高句麗 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1985-2, 29쪽.

 집안의 고구려 도성은 평지성인 집안현성과 산성인 산성자산성으로 구성되어 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국내시대의 도성으로 國內城과 丸都城이 나타나는데,617)≪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산상왕 2년 2월(丸都城) 및 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12년 2월(國內城). 이 중 집안현성이 국내성에, 산성자산성이 환도성에 비정되고 있다.618)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그동안 다양한 견해가 있었으나, 최근 중국에서의 조사를 바탕으로 국내성=집안현성, 환도성=산성자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이다(吉林省考古硏究室·集安縣博物館,<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1984-1).

 집안현성은 장방형의 석성으로 성의 둘레는 2,800여 m이고, 성의 모서리에는 각루가 있으며 성벽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군데군데 치성이 설치되었다. 성문은 6개로 모두 옹성을 갖추고 있다.619)車勇杰, 앞의 글, 19∼20쪽. 산성자산성은 집안현성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통구하를 옆에 끼고 있다.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으로 병풍을 두른 듯한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군데 군데 돌로 성벽을 쌓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7km에 달하며 남쪽의 성문은 옹성으로 되어있다. 성안에는 궁전지와 점장대와 병사들의 건물지가 남아 있다.620)車勇杰, 위의 글, 15∼17쪽.
李殿福,<高句麗丸都山城>(≪文物≫1982-6).

 고구려의 후기 수도인 평양에는 다수의 성터가 남아 있는데, 그중 청암동토성은 고국원왕대의 평양성으로 추정되며,621)閔德植,<故國原王代 平壤城의 位置에 관한 試考>(≪龍巖車文燮博士華甲紀念論叢≫, 1989), 127쪽. 장수왕 15년(427)에 천도한 평양성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이다. 대성산성은 둘레가 7km가 넘는 대규모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주로 안팎으로 돌을 쌓고 그 안에 흙과 돌을 다져 넣은 내외겹축방식으로 축조되었다. 남문은 성벽에서 20m 정도 돌출시켜 설치한 독특한 구조이며, 소문봉의 성문은 성벽을 어긋나게하여 옹성의 형태를 취하였다. 65개의 치성의 흔적과 3개의 각루터가 확인되었으며, 성안에는 20개의 기와건물지와 창고·병영시설도 확인되었다.622)閔德植,<高句麗의 中期都城>(≪韓國史論≫19, 國史編纂委員會, 1989), 112∼131쪽.

 안학궁성은 둘레가 2,488m의 방형 토성으로 넓이는 38만㎡에 달한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고, 성벽 밑부분은 일정 높이까지 돌로 쌓고 흙과 돌을 다져 넣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를 설치하였고, 동서쪽 성벽 밖에는 해자를 둘렀다. 궁성안에는 52채의 궁전터와 31채의 회랑터가 확인되는데 5개의 건축군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외 동산과 연못이 인공적으로 축조되었다.623)閔德植, 위의 글, 77∼111쪽.
채희국,≪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평원왕 28년(586)에 移居한 장안성은 둘레가 23km, 성안의 면적이 12k㎡에 이르는 고구려 최대의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을 결합한 형태이다. 내성·북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벽은 지형에 따라 외벽쌓기와 내외겹쌓기방식을 혼용하였고, 옹성은 반원형으로 축조되었다. 일부 구간에는 치성이 설치되었고, 대동강을 천연의 해자로 이용하였다. 평지성인 외성은 일정한 구획을 갖춘 계획적인 시가지를 형성하였으며, 내성은 궁성으로 이용되었다.624)閔德植,<高句麗의 後期都城>(≪韓國史論≫19, 國史編纂委員會, 1989), 159∼206쪽.

 고구려의 지방의 성은 그 영역의 확대과정에 짝하여 축조되었다. 초기에 축조된 성으로는 환인과 집안의 도성을 중심으로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각 교통로의 요충지에 축조된 黑溝山城, 覇王朝山城, 羅通山城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관마장과 망파령에는 차단성이 설치되었다.625)方起東,<吉林輯安高句麗覇王朝山城>(≪考古≫1962-11).
撫順市博物館 新賓縣文化局,<遼寧省新賓縣 黑溝高句麗早期山城>(≪文物≫1985-2).
吉林省文物工作隊,<高句麗羅通山城調査簡報>(≪文物≫1985-2).
崔茂藏 譯,≪高句麗·渤海文化≫(集文堂, 1985).
李殿福,≪中國內의 高句麗遺蹟≫(車勇杰·金仁經 譯, 學硏文化社, 1994), 40∼46쪽.

 4세기초 무순에 신성을 축조한 후626)≪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5년. 요동으로 진출하고, 광개토왕·장수왕대에 요동을 장악한 이후에는 요동지역에 행정적 거점과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수많은 성을 구축하였다. 특히 요하평원과 산악지대의 접경지대에는 각 교통로의 초입에 신성·요동성·개모성·백암성·안시성·건안성·비사성 등을 축조하여 길목을 제압하였다.627)고구려의 중요 성들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비정된다.
현도성=지금의 遼寧省 撫順市 勞動公園山城, 신성=지금의 요녕성 撫順 高爾山城, 건안성=지금의 요녕성 蓋縣 高麗城山山城, 비사성=지금의 요녕성 金縣 大黑山山城, 개모성=지금의 요녕성 瀋陽市 塔山山城, 백암성=지금의 요녕성 燈塔縣 燕州城, 안시성=요녕성 海城市 英城子村 英城子山城.
또 군사상 중요한 요충지의 주위에는 소규모 성을 배치하여 서로 긴밀한 연결 속에 방어 능력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컨대 요동지역을 관장하는 욕살이 파견된 오골성(지금의 요령성 봉성현 봉황성)은 주위에 10여 성 이상의 소성이 배치된 위성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628)손영종, 앞의 책, 341쪽. 그런데 북한학계에서는 鳳凰城을 북평양으로 보고, 오골성은 遼寧省 岫岩 일대에 비정하고 있다.

 한편 미천왕대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고 한반도 서북부 일대를 장악한 후에는 이 지역에도 성의 축조가 활발하였다. 4세기 초·중엽에는 황해남도 신원군의 장수산성이 축조되었고,629)안병찬,<장수산일대의 고구려 유적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0-2).
최승택,<장수산성의 축조년대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1-3).
점차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광개토왕대에는 國南에 7城, 國東에 6城을 축성하였다.630)≪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3년 8월·18년 7월. 그 후 장수왕대의 평양천도에 따라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남포의 동진성·황룡산성·청룡산성, 서흥의 대현산성, 평산의 태백산성, 봉산의 휴류산성·태봉산성 등 십수성이 축조되어 위성방어망을 구축하였다.631)손영종, 앞의 책, 332∼334쪽. 그리고 장수왕·문자왕대에 고구려의 남쪽 영역은 죽령·조령에서 남양만 일대에 이르렀는데, 충북 영춘에 있는 온달산성은 테뫼식 산성으로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다음 성곽시설에 대하여 살펴보자.632)성곽시설에 대해서는≪고구려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5), 46∼61쪽 참조. 성벽을 축조한 재료로는 석축이 기본이며, 그외 토축과 토석혼축이 있다. 석축 성벽의 축조방식을 보면, 장방형 또는 장방형의 4각추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리되, 기초 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5∼10단 정도는 계단식으로 안으로 들여쌓고 그 위에 수직으로 성벽을 구축하였다. 산성의 경우는 경사진 곳에 성벽을 축조하기 때문에 성벽의 바깥쪽은 다듬은 돌로 쌓고 안쪽은 돌과 흙을 다져넣은 외벽 형식을 사용하였으며, 계곡이나 중요한 부분은 성벽 안팎을 모두 돌로 쌓아 올린 겹벽형식으로 축조하였다. 평지성의 경우는 성벽 전체를 겹벽으로 쌓았다.

 토축성은 그 수가 많지 않은데, 요령성 해성의 영성자산성(안시성), 심양의 탑산산성(개모성)은 흙을 층층히 다져 쌓았고, 무순의 고이산성(신성), 길림의 용담산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다. 개현의 고려성산산성(건안성)은 토축과 석축을 적절히 혼합하여 구축하였다.633)李殿福, 앞의 책.

 성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성벽 시설물로는 성문·옹성·치·여장·각루 등이 설치되고, 성안에는 장대와 우물·봉수대·창고·병영 등이 설치되었다.

 성문은 성의 안밖을 연결하는 통로로, 포곡식 산성의 경우는 주로 골짜기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되었다. 성문은 적의 공격이 집중되므로,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옹성이나 치 등을 갖추고 있다. 옹성의 형태는 다양한데, 오녀산성이나 국내성은 성벽을 어긋나게 하여 옹성의 기능을 하게한 형태이고, 흑구산성은 10m 거리로 이중의 성벽을 쌓아 옹성을 구축하였다. 보다 많이 사용된 옹성은 성벽을 성문 부근에서 방형 또는 반원형으로 성안으로 오므라들게 쌓은 형태로서, 산성자산성의 남문 옹성이 대표적이다. 중후기의 성에서는 성문 밖을 반원형으로 감싼 옹성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산능선의 구석진 곳에는 소규모 암문을 설치하여 비밀리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치는 성벽과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좌우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로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설치하였다. 각루(망루)는 성벽의 모서리 부분에 설치되어 일종의 보조 전투지휘처의 구실을 하였다. 성벽에는 女檣을 설치하기도 하는데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성에 접근하는 적들을 사격할 때 쓰는 시설이다. 또 평지성의 경우에는 성벽 밖에 큰 도랑인 해자를 파고 물을 채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평남 태천의 농오리산성이나 요령성 莊河縣의 城山山城의 경우처럼 본성의 외곽에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일종의 나성을 쌓아 방어력을 높인 경우도 볼 수 있다.

 성안 시설물로는 성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전투지휘처인 장대를 설치하였고, 식수원인 연못과 우물을 갖추고 있다. 또 평탄한 곳에는 병영과 식량창고 등의 시설물을 두었고, 성의 높은 곳에는 봉수대를 설치한 곳도 있다. 또 대규모 포곡식 산성의 경우 성안에 일정한 거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지방행정관청이나 지방관의 처소로 사용되는 건물시설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집안의 산성자산성의 경우는 궁전지가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산성은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고 다양한 방어 시설물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공략이 쉽지 않아, 당의 침략시에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성을 잘지키기 때문에 졸연히 항복시킬 수 없다”고 실토하고 있다.634)≪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보장왕 6년.

<林起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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