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1) 토지제도

 고구려는 농업을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하여 성립되고 운영된 나라이다.따라서 토지를 둘러싸고 형성된 인간들간의 제관계는 고구려사회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이룬다. 그런데 토지제도가 갖는 이같은 비중과는 달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토지제도 관계자료는 극히 적다.

 고구려가 발생한 압록강 중류지역은 청동기문화기에서부터 상당수의 주민들이 모여 정착문화를 이루고 살았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국가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주민들에 의하여 토지가 경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국이 역동적으로 형성되어 가던 기원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이 지역에는 집단적인 주민의 유입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뒤에는 部로 전화하는 那가 여전히 주민들의 생활공동체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상당부분 가지고 있던 나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해 가는 시기에 있어서 토지를 둘러싼 계급간의 갈등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민들이 개인적으로나 가족단위로 이동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현상에서635)≪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5년 4월 및 민중왕 4년 10월. 나안의 성원간의 토지소유의 문제는 계급적 대결로 나타날 만큼 첨예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나의 위치나 그것이 이 지역에 터잡은 시기의 차이 등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三國史記≫에는 琉璃明王 37년(18)에 물에 빠져죽은 왕자의 시신을 찾아낸 沸流人 祭須에게 왕이 金 10근과 田 10경을 내린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국초의 일로 믿을 수 없는 기사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漢나라 玄兎郡의 지배를 일시 받았던 사실이 이 즈음에 있었으므로 고구려지역에도 중국과 같이 토지의 사유가 어느 정도 진행중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런데 제수에게 10경의 토지를 주었다고 할 때 그 토지의 소유권을 준 것인지 아니면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형편이었므로 그 토지에 대한 점유 및 경작권을 준 것인지는 속단할 수 없다. 현대의 관념으로 보아서는 점유 및 경작권을 주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토지의 매매가 아직 사회적인 관행이 되지 않았을 당시의 형편에서는, 이같은 점유 및 경작권은 공동체적인 절실한 필요나 족장의 특별한 조치에 의하여 그 보유 및 경작의 권리가 회수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후대의 소유권 못지 않은 개인의 권리로 보장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구려의 건국 초기, 아직도 那나 部의 독자성이 살아있어 공동체적 제약속에 국가가 운영되고 있던 상황에서 토지는 주민들간에 배타적이고 경쟁적으로 소유되는 대상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예를 들면 만여 명의 많은 부여계인들이 부여내의 정치적 변화에 의하여 압록강유역으로 내려왔을 때 大武神王은 이들을 椽那部에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왕을 뽑아 주었다고 한다.636)≪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5년 7월. 이렇게 일시적으로 내려온 만여 명의 주민들을 한 지역에 정착케 할 수 있는 단계에서 이들 주민들간에 토지소유 규모의 차등과 그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될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은 각 가정이나 집단의 노동력의 정도 등에 따라 대개는 유사한 정도의 토지를 분배받거나 자연히 점유·경작하는 상황으로 정착생활에 들어 갔으리라 짐작된다.

 이같이 토지의 소유가 아직 사회성원간의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 아니었음은 다른 사료들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삼국사기≫의 대무신왕본기에 의하면 왕의 5년(22) 3월에 沸流部의 3인의 部長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사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죄목은 ‘다른 사람의 妻妾과 牛馬, 財貨를 마음대로 빼앗고 주지않으려 하면 매를 때린 데’ 있었다. 여기서 약탈의 대상은 처첩과 우마, 재화였음이 일단 주목된다. 그런데 이에 비해 약 2세기 뒤인 故國川王 12년(190) 9월에 일어난 유사한 사실에서는 이와는 약간 대비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역시 같은≪삼국사기≫의 고국천왕본기에 의하면 당시의 왕후의 친척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빙자하여 다른 사람의 자녀와 田宅을 빼앗아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사서 왕으로부터 처벌을 받은 사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는 앞의 사실과는 달리 전택이 수탈의 대상이 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약 2세기에 걸친 국가의 발달, 농업의 발전 등에 따라 사회적으로 토지의 중요성이 그만큼 증대된 사실을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사적 소유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이제는 공동체적인 유대가 개인들의 생계의 면에서는 거의 작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토지소유에 있어 국초의 자연적인 점유나 성원간의 유사한 양의 분점 등의 상황이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변화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의 국가체의 형성과 발전도 이같은 구성원간의 계급의 형성과정에 힘입은 바 있을 것이며 국가의 발전과정이 계급의 분화를 북돋았을 것도 물론이다.

 이같은 사실은 고국천왕 16년에 있었던 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삼국사기≫의 고국천왕본기에 의하면 고국천왕이 10월 어느 날에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길에서 앉아 울고있는 이를 만나게 되었다. 왕이 왜 울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제가 빈궁하여 늘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해 왔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 곳이 없어 식량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이같이 울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 길에서 울고있는 농민은 토지의 점유 및 소유를 둘러싼 경쟁에서 몰락해 가는 빈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자들은 예외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적으로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사건에 의하여 백성들에게 봄에 국가의 곡식을 꾸어주고 추수후에 받아들이는 賑貸法이 시행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민에 대한 구휼이 법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그 만큼 당시에 공동체적 유대가 해체되어 가면서 주민들간의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분화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3세기 이전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三國志≫東夷傳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坐食者가 만여 구이며 下戶들이 멀리서 식량과 생선·소금을 져다 공급한다”라고 하였는데, 지배층과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하호라는 가난한 일반민들이 대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주민내의 경제 사회적인 분화는 3세기말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삼국사기≫의 美川王本紀에 의하면 미천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그를 죽이려 하던 당시의 왕이었던 烽上王의 추적을 피하여 신분을 감추고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하며 지낸 사실이 있다. 곧 그가 水室村 사람 陰牟의 집에서 1년간 머슴살이를 하며 힘든 생활을 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음모는 일반민으로서 부자라고 볼 수 있는 자인데 이같은 이들도 사회적으로 존재한 것이며, 이에 반하여 머슴살이나 품팔이를 하며 생활을 유지하던 가난한 자들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주민간의 사회 경제적 분화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던 당시의 형편에서는 필연적으로 주민들간에 토지소유의 차등문제를 기본으로 하여 야기되었을 것이다.

 이같은 토지의 점유 나아가 소유규모의 차등화는 몇 가지 요인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었다. 극히 점진적인 것이라 생각되는 현상으로는 본래 가지고 있던 토지의 토질이나 주민들간의 농사기술의 차이, 우연한 천재지변 등에 의하여 경제력의 차등이 일어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다소 정치적인 배경에서 유래되는 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군사나 하급 관리 혹은 귀족들의 家臣이 된 자들은 국가나 귀족으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게 되고 이로부터 점차 가산을 축적해 갈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왕실 종친을 위시한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가능케 되었을 것이다.≪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이미 琉璃明王 11년(B.C. 9)에서부터 食邑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국초의 이 기사의 신빙성을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新大王 2년(166) 및 8년, 東川王 20년(246) 그리고 봉상왕 2년(293)의 식읍 지급기사는 이 시기가 갖는 역사적 상황이나 전후 내용을 보아 마땅히 믿을 수 있다. 이같은 식읍의 지급은 기록에 남아 전하지 않고 있는 다른 귀족들에게도 있을 수 있었던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식읍을 받지 못하는 귀족들에게도 국가로부터의 다른 형태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을 것이다.

 식읍은 토지로부터 국가가 받는 조세를 식읍주가 대신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받는데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인민의 노동력 징발권까지도 받는 등 일종의 封地라고 할 수도 있어 단순한 토지제도로만 말하기는 적합치 않겠지만, 이러한 경제적 특권을 배경으로 하여 귀족들은 좋은 토지를 더욱 집적해 갔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상황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이 지역의 기름진 토지가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된 후, 더구나 장수왕 때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자료로 보아 토지에 관한한 국가권력에 의한 토지 보유나 소유에 대한 전면적인 재지급 등의 국가적 조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보겠지만≪隋書≫고려전에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의 조세 내용으로 보면, 고구려인들의 세금액수는 빈부의 차이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등급간의 차액이 극히 적고 전체 세액은 당시의 수준에서는 적지 않은 각호당 곡 5.5석∼6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세량에 근거하여 이를 주민들로부터 수취할 수 있으려면 주민 일반에게 균전법 등과 유사한 토지의 국가적인 지급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637)白南雲,≪朝鮮社會經濟史≫(改造社, 1933), 211쪽. 이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고구려에서 전면적인 토지의 지급이 국가권력에 의하여 시도되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같은 거의 균등한 세액의 인두세에 가까운 조세수취는 일반민들간의 경제력의 차이가 심각한 정도에 이르지 않아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638)김기흥,<三國時代 稅制의 성격>(≪國史館論叢≫35, 國史編纂委員會, 1992), 121쪽. 즉 세금을 부담하는 백성들의 대다수는 경제력의 차이가 심하지 않은 자영소농민이었던 데에서 그같은 조세 수취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귀족들에 의한 토지의 집적이 크게 진행되어 대토지 소유와 경작이 있었겠지만 사회에는 여전히 세금을 내고 부역을 지며 병역을 담당하는 다수의 자영소농민층이 공민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설화적 성격이 강하지만≪삼국사기≫온달전의 이야기 속에서 시집온 평강공주가 궁궐에서 가지고 나온 금팔찌를 팔아 田宅·奴婢·牛馬 등을 샀다는 사실에서도 민간에서 토지의 소유권이 이동할 수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국가는 사적인 토지의 소유권에는 간섭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토지를 사고 파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토지가 어느 시기에 이미 재산의 중요한 요소로서 매매가 되기도 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조세제에 적용되고 있는 고구려 후기 3등호제도 이같은 토지 소유량의 차등화와 직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같은 행위가 빈번하거나 소유권을 둘러싼 충돌은 많지 않은 상태였던지 현전하는 자료에서는 이 이상의 자료를 찾아 볼 수 없다.

 고구려의 토지제는 전체적으로 보아 那나 部단계 이래의 주민들에 의한 점유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었으며 농업이 발달하고 사적 소유가 더욱 진전되면서는 경제력 혹은 권력 등의 차등에 따라 점차 사회성원간의 소유의 이동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민들의 다수는 여전히 자영소농민으로서 소토지를 소유·경영하여 그를 바탕으로 세금을 내고 군역을 부담하는 국가의 공민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국가의 특혜와 이를 통한 경제력의 축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하호나 노비 등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영하고 큰 부를 형성해 갔다. 토지의 소유권은 후대로 갈수록 국가의 보장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보이는데 민간에서도 토지가 매매되는 현상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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