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2) 조세제도
  • (2) 부역

(2) 부역

 고구려의 주민들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국가의 성립초에서부터 왕궁이나 성의 수축을 위하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은 물론이다.

 현전하는 몇몇 자료로 볼 때 국가적인 賦役은 성년 남자들에게 부과되었다고 보인다. 이 점은 백제나 신라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구체적으로 부역 징발의 사례로 전해지고 있는 내용에 여자들도 징발되고 있어 이 자료를 통해 고구려 나아가 삼국에서 남녀가 모두 국가의 부역에 징발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삼국사기≫의 봉상왕 9년 8월조에는 “왕이 국내 남녀 15세 이상자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다. 봉상왕본기의 이같은 내용은 같은 책의 倉助利列傳에도 보이는 데 양 기사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열전에는 “왕이 국내의 丁男 15세 이상자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열전보다는 본기의 내용이 보다 비중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본기의 내용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만으로 고구려 나아가 삼국시대에 남녀가 모두 국가의 부역에 징발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여겨진다.≪삼국사기≫에 전하는 10사례 정도의 삼국에서의 부역기사를 보면 남녀가 명기된 것은 오직 이 기사밖에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 기사는 봉상왕의 폭정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히려 특수한 사례로 강조하여 전하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사소한 일이나 긴급한 상황 그리고 지방의 잡역에는 여성이 동원되기도 하였을 것이지만 국가적 동원이 필요한 부역에는 율령에 의하여 15세 이상의 정남이 징발되었다고 보인다.643)김석형,≪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과학원출판사, 1957 ; 신서원, 1993), 246쪽. 고구려말 최대의 공사인 千里長城을 수축할 때 “남자는 역에 나가고 여자가 농사하였다”는≪三國遺事≫ 寶藏奉老 普德移庵조의 기사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는 이미 남녀의 역할이 가정이나 사회 나아가 국가적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던 수준의 단계였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남정들이 국가적인 역에 징발된 기간은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고구려도 기본적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였던 만큼 농번기에는 부역 징발을 피했을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농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초봄이나 초가을 혹은 추수가 끝난 계절에 징발이 있었을 것인데, 백제나 신라의 경우를 참조해 보면 약 2개월 정도 이내에 징발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국초에는 어떤 일이 있을 때 동원 가능한 15세 이상의 자를 모두 동원하여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까지 공사에 임해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국가의 체제가 잡혀가고 율령에 의한 통치가 행해지면서는 징발기간도 정해지고 모든 남정을 징발하는 양상은 시정되어 갔을 것이다. 공사 수행의 경험이 축적되고 율령에 의하여 부역 징발기간도 규정되어졌던 만큼 해당 공사에 필요한 노동량이 예측·산정되면서 필요한 인원만큼만 징발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나 우리의 후대의 부역 징발일수를 생각해 볼 때, 1년 중에 징발되는 부역일수도 점차 줄어갔을 것으로 보인다.644)김기흥,<삼국시대의 역역(力役)>(≪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역사비평사, 1991), 102∼106쪽.

 부역에 동원되어 수행한 일은 성을 쌓거나 저수지의 제방을 쌓는 일, 궁궐을 수리하는 일, 그리고 도로를 닦는 일 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문헌으로 알 수 있지만, 고구려의 성벽에 새겨진 축성과 관련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어 부역의 양상의 일부를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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