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의 기원
  • 2) 건국설화

2) 건국설화

 백제의 건국설화는 내용상으로는 그리 풍부하지 못하고 빈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서로 다른 여러 갈래의 전승을 남기고 있다.

 첫째, 온조를 시조로 하는 설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의 본문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북부여를 떠난 朱蒙이 卒本扶餘에 정착한 후,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 沸流와 溫祚를 낳았으나, 이들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태자가 되자 그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함께 남하했다. 그 후 비류는 彌鄒忽(인천)에, 온조는 신하 10명의 輔翼을 받으며 慰禮지역(서울 강남)에 정착하고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고 한다. 곧이어 비류가 죽으면서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온조에게 귀의하였고 이때부터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한다.≪삼국사기≫권 37, 지리 4, 백제조, 그리고≪三國遺事≫권 1, 王曆과 권 2, 紀異 2 南扶餘前百濟조에는 주몽이 東明王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동일한 계통임이 분명하다. 王姓을≪삼국사기≫에서는 扶餘氏로,≪삼국유사≫에서는 解氏로 보는 점이 다르지만 양자 모두 주몽(동명왕)에서 온조로 이어지는 계보를 백제왕실의 근간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 된다.

 둘째, 비류를 시조로 인정하는 설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 細註에 인용된 기사이다. 북부여왕 解扶婁의 庶孫인 優台와 卒本人 延陀勃의 딸인 召西奴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후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하였다고 한다. 주몽의 맏아들 孺留가 남쪽으로 오자 비류·온조 양인이 떠나오는 과정부터는 앞의 내용과 동일하다. 단 浿帶二水를 건넜다는 점, 정착한 곳이 미추홀이라는 점, 신하 10명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점 등에 차이가 있다. 이 경우 주몽은 비류·온조 양인의 계부에 지나지 않고 해부루-우태-비류가 백제 왕실의 뿌리가 되는 셈이다.≪삼국사기≫권 32, 제사조에서는≪海東古記≫에 의거하여 시조 동명설과 시조 우태설을 나란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우태는 비류의 친부를 일컫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역시 비류를 시조로 하는 설에 포함된다.

 셋째, 仇台를 시조로 보는 설이다.≪周書≫異域 上, 百濟條에서는 백제를 마한의 속국, 부여의 별종이라면서 구태란 자가 대방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열었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隋書≫단계에 와서 부여의 尉仇台와 仇台를 혼동하여004)李丙燾,<百濟의 建國問題와 馬韓 中心勢力의 變動>(≪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1), 473쪽. 帶方太守 公孫度의 딸과의 혼인 기사가 첨가되었고 동명신화와 결부되면서 구태는 동명의 후예라는 인식을 낳게 되었다.005)兪元載,<中國正史 百濟傳 硏究>(≪韓國上古史學報≫4, 1990), 192쪽. 이 내용은≪北史≫에서 답습되었고≪삼국사기≫에 재인용되었다. 이 경우 구태는 고구려와는 관계없이 부여와 직접 연결되는 셈이다.006)한편 仇台와 夫餘가 동일하게 발음될 수 있음을 전제로 仇台는 특정인물이 아니라 夫餘氏와 동일한 姓氏이며 동시에 왕을 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王民信,<百濟始祖「仇台」考>,≪百濟硏究≫17, 1986).

 마지막으로 일본측 사서에 전하는 都慕說이다. “百濟 遠祖 都慕王은 河伯의 딸이 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007)≪續日本紀≫권 40, 延曆 8년 明年 정월.거나, “百濟 太祖 都慕大王은 日神이 降靈하여 부여에서 개국하였는데 후에 여러 韓을 총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008)≪續日本紀≫권 40, 延曆 9년 7월.라는 따위의 내용들이다. 倭地의 백제계 渡來人들 중에는 자신의 계보를 都慕에 연결시킨 예가 많다.009)≪新撰姓氏錄≫左京諸蕃下 和朝臣·百濟朝臣·百濟公, 右京諸蕃下 菅野朝臣·百濟伎·不破連, 河內國諸蕃 河內連 등이 그러하다. 都慕가 부여의 東明 또는 고구려의 朱蒙·鄒牟 가운데 누구에 해당하는지 단언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도모·동명·주몽·추모는 동일하게 읽혔을 가능성이 크다.010)백제시조를 都慕로 설정한 건국설화체계에서는 부여의 시조로서의 東明과 고구려의 시조로서의 朱蒙은 동일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양자를 엄밀히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첫째 전승은 고구려의 주몽과 직결되는데 비해, 둘째·셋째 전승은 고구려와는 관련없이 부여와 직접 연결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넷째 전승은 부여와 고구려를 포괄적으로 인식하는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