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의 기원
  • 3) 건국집단의 기원과 주민구성
  • (1) 건국집단의 기원

(1) 건국집단의 기원

 건국설화의 다양함과 시조에 대한 이견은 그만큼 백제 지배집단의 계통이 복잡하다는 방증이 되겠다.≪삼국사기≫의 찬자는 다양한 전승 중에서 주몽-온조로 이어지는 계보를 채택하였으며,≪삼국유사≫는≪삼국사기≫의 내용을 답습하였다.

 하지만 우태-비류로 이어지는 전승 역시≪삼국사기≫에 남겨질 정도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백제 건국세력의 주체가 온조계만의 단일집단이 아니라 온조계와 비류계가 양립한 시기가 있었음을 반영한다. 게다가 예외없이 비류가 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른 시기에는 온조계집단보다 비류계집단의 세력이 우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011)시조 비류설이 원초적인 신앙이나 습속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시조 온조설보다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金杜珍,<百濟 建國神話의 復元試論>,≪國史館論叢≫13, 國史編纂委員會, 1990, 72쪽).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기록된 것은 양 집단의 출자와 계통이 동일하여서라기보다는 초기에 연맹을 형성하였던 현실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012)大伽倻王 惱窒朱日(伊珍阿豉)과 金官國王 惱窒靑裔(首露王)를 형제로 결합시킨 대가야 시조설화(≪新增東國輿地勝覽≫권 29, 高靈縣)도 이와 유사한 형태일 것이다(金杜珍,<百濟始祖 溫祚神話의 形成과 그 傳承>,≪韓國學論叢≫13, 1991, 12∼14쪽).

 비류를 시조로 인정하는 전승에서는 고구려나 주몽과의 관계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비류계집단은 일단 고구려나 주몽과는 직접적인 계승관계가 없었다고 판단된다. 비류라는 명칭이 압록강유역에서 주몽으로 대표되는 桂婁部집단과 쟁투를 벌였던 松讓王의 沸流國과 동일하기 때문에 비류집단의 출자를 비류국, 즉 消奴部집단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비류를 시조로 하는 전승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비류 시조설에서 비류는 졸본인 연타발의 외손자이며 졸본에서 살았다고 하므로, 계루부집단이 도착하기 전에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연맹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소노부원 일부가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남하하였고 이들이 비류를 자기 집단의 시조로 삼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와 달리 비류라는 명칭이 후대에 부회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온조의 남하와 건국을 동명·주몽의 남하 및 건국과 동일한 구도로 설정한 설화체계에서는 주몽과 쟁투하다 패배한 비류국과 온조와 대립하다 패배한 미추홀집단은 그 위상과 역할이 동일한 것이다. 이 경우 동명·주몽과의 계승관계를 표방하는 위례집단이 종전부터 한강 하류지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미추홀집단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흡수당한 집단은 비류집단으로 가상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추론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류를 시조로 설정한 전승과 미추홀집단은 주몽이나 계루부집단과의 직접적인 계승관계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에 온조를 시조로 하는 경우에는 주몽 또는 동명왕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집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정치적 패배로 인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파직되자 남으로 달아난 陜父의 예013)≪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22년.가 참고된다. 협부(보)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할 때부터 동행하였던 옛 부하 3인 중 한 명이며, 나머지 두명인 烏伊·摩離는 온조가 남하할 때 동행한 신하 10명 중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두 사람 즉 烏干·馬黎와 동일인으로 생각된다. 유리왕대에 선대의 신하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 내지 숙청의 와중에서 일부 집단이 남하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측 자료에서는 온조와 비류에 관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014)일본의 廣井連의 조상이라는 百濟國 避流王(≪新撰姓氏錄≫攝津國諸蕃)을 比流王의 誤記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洪思俊,<新撰姓氏錄의 百濟人姓氏考>,≪馬韓·百濟文化≫2, 1977, 209쪽), 그보다는 沸流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신찬성씨록≫에서 11대 비류왕은 예외없이 比流로 표기되고 있는 반면에 沸流를 避流로 표기한 예(≪海東高僧傳≫1, 流通, 釋摩羅難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신창성씨록≫의 避流王은 沸流에 관한 국외 유일의 자료인 셈이다.≪魏書≫에서는 백제의 계통을 부여에서 구하고 있으며015)≪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周書≫이후에는 그것이 구태라는 개인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측의 자료가 4∼5세기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가 帶方故地의 영유를 둘러싸고 악화되면서 치열한 외교·군사적 경쟁을 전개하던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백제측의 입장에서 자국 왕실의 출자를 현실적 적성국가인 고구려에서 구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016)李賢惠,<馬韓 伯濟國의 形成과 支配集團의 出自>(≪百濟硏究≫22, 1991), 24∼25쪽. 이런 까닭에 근초고왕 27년(372) 東晋에 사신을 보낸 왕은 餘氏(부여씨)를 칭하였고,017)≪晋書≫권 9, 帝紀 9, 太宗簡文帝 咸安 2년 정월·6월. 개로왕 18년(472) 北魏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직접 갈라져 나왔음을 주장하였으며,018)≪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 성왕 16년(538)에는 泗沘로 천도하고 국호를 南扶餘라고 칭하였던 것이다.019)≪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13년조에 보이는 疆埸의 사방 표시가 부여족 고유의 領域意識, 혹은 宇宙觀의 발로인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백제 건국의 주체세력이 부여족계통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 견해도 있다(李基東,<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馬韓·百濟文化硏究≫10, 1987, 54∼55쪽).

 고구려와의 경쟁관계로 인해 심화된 부여 계승의식과 함께 고구려 계승의식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성왕 31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왕자 餘昌(후의 위덕왕)은 고구려 장수와 통성명하는 과정에서 성이 같음을 밝히고 있다.020)≪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4년 정월.

 백제왕실이 자신의 출자를 때로는 부여에, 때로는 고구려에 연결시킨 원인은 정치·외교적인 목적에 따른 것이지만, 실제 계통상으로도 백제 지배계급의 계통은 단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명신화는 지배집단간의 상이성을 범부여족의식으로 용해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온조왕 원년에 東明王廟가 세워진021)≪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원년 5월. 이후 다루왕 2년, 책계왕 2년, 분서왕 2년, 비류왕 9년, 아신왕 2년, 전지왕 2년에 걸쳐 동명묘 배알이 행해지고 있다.022)이외에 구수왕 14년 여름에 크게 가물어 왕이 東明廟에 빌자 비가 왔다고 한다(≪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구수왕 14년 4월). 일반적으로 백제 왕실은 肖古系와 古爾系가 대립하며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23)우태-비류-고이계를 優氏로, 주몽-온조-초고계를 扶餘氏로 파악하는 견해(千寬宇, 앞의 글, 134∼137쪽)와 초고계를 부여씨 왕실내에서의 직계로, 고이계를 방계로 보는 견해(盧重國, 앞의 책, 78쪽)가 있다. 책계왕·분서왕은 고이계이며, 아신왕·전지왕은 초고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결같이 동명묘에 배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동명신화의 공유와 동명묘 배알은 범부여계 지배집단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통합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024)그 원인은 동명이 북부여·고구려·백제 등 부여족 전체의 시조신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盧明鎬,<百濟 建國神話의 原形과 成立背景>,≪百濟史의 理解≫, 學硏文化社, 1990, 35∼36쪽).

 백제 왕실이 넓은 의미에서의 부여계임은 분명하지만 현재 확인된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왕실 묘제는 고구려계통임이 분명하다. 서울시 석촌동 일대에는 다듬은 돌을 계단모양으로 쌓아 올린 基壇式 積石墓가 분포되어 있다.025)서울大學校 博物館·考古學科,≪石村洞 積石塚 發掘報告≫-서울大 考古人類學叢刊 제6책-(1975).
金元龍·裵基同,≪石村洞 3號墳(積石塚) 發掘調査報告書≫(서울대 博物館, 1983).
서울特別市石村洞發掘調査團,≪石村洞古墳群發掘調査報告≫(1987).
金元龍·任孝宰·林永珍,≪石村洞 1·2號墳≫(서울大 博物館, 1989), 47쪽.
외형상으로는 압록강유역의 고구려 적석묘와 동일하지만 내부 구조면에서는 순수하게 돌로만 채워 넣은 유형(1호분 남분·3호분)과 점토를 版築한 유형(1호분북분·2호분·4호분)으로 구분된다. 후자는 고구려지역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한강유역에서 발전한 지역적 변형으로 판단된다. 시기적으로는 3세기 중반에서 5세기 전반경에 해당되는데026)金元龍·任孝宰·林永珍, 위의 책, 47쪽.
李賢惠, 앞의 글, 19쪽.
반면에 서울에서 기단식 적석묘의 출현은 3세기대로 올라갈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李道學, 앞의 책, 1991, 33∼36쪽 및 朴淳發,<漢城百濟 成立期 諸墓制의 編年檢討>,≪百濟考古學의 諸問題≫-韓國古代學會 제5회 학술발표회 발표문-, 1993).
출토유물면에서는 고구려와 연결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이러한 현상은 3∼5세기에 들어와 압록강유역의 적석묘가 갑자기 석촌동에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에 갈라져 나와 백제화하였음을 의미한다. 현재 서울시내에서는 기단식 적석묘의 선행 형태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남한강·북한강을 포함한 한강유역에는 2∼3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무기단식 적석묘027)이를 적석묘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土築墓나 土墩墓와 가까운 형태로 이해하는 견해(姜仁求,<漢江流域 百濟古墳의 再檢討>,≪韓國考古學報≫22, 1989), 적석묘와는 무관하게 葺石封土墳에 포함시키는 견해(李道學, 위의 책), 역시 적석묘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葺石墓라고 부르는 견해(崔秉鉉,<墓制를 통해서 본 4∼5세기 韓國 古代社會>,≪韓國古代史論叢≫6,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4), 전형적인 고구려 무기단식 적석묘와의 차이점에 주목하여 葺石式 積石墓로 명명하는 견해(朴淳發, 위의 글) 등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葺石이란 용어는 타당치 않다는 반론도 있다(權五榮,<중서부지방 백제 토광묘에 대한 시론적 검토>,≪百濟硏究≫22, 1991).가 널리 분포되고 있으며028)權五榮,<初期百濟의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찰>(≪韓國史論≫15, 서울大 國史學科, 1986), 34∼54쪽. 최근에는 임진강유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029)漣川郡 仙谷里·鶴谷里·三串里 등에서 발견되었으며 이중 삼곶리의 적석묘가 발굴조사되었다.
金聖範,<軍事保護區域內 文化遺蹟 地表調査報告>(≪文化財≫25, 文化財管理局, 1992), 238쪽.
尹根一·金性泰,≪漣川 三串里 百濟積石塚 發掘調査報告書≫(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94).
따라서 온조집단의 남하문제는 시각을 서울지역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한강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으로 넓혀서, 압록강유역 고구려 주민의 남하라는 대세 속에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시점은 3세기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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