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의 기원
  • 3) 건국집단의 기원과 주민구성
  • (2) 주민구성

(2) 주민구성

 백제가 성장한 한강 하류지역은 마한 세력권에 포함되기 때문에 지배집단을 이루게 되는 북방 유이민들이 정착하기 이전, 이 지역의 선주민세력은 대개 韓族계통으로 볼 수 있다. “後漢의 桓帝·靈帝代(2세기 후반)에 韓濊가 강성해져 郡縣(樂浪郡)이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다수의 민이 韓國으로 흘러 들어갔다. 建安연간(196∼219)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에 帶方郡을 설치하고 公孫模·張敞 등을 보내어 흩어진 인민들을 끌어모으고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토벌하였다”는 기사030)≪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에서의 한예는 낙랑군의 남쪽과 동쪽에 있던 세력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광개토왕릉 守墓者로서 차정된 한예 220家는 대개 한강유역의 백제주민으로 이해되고 있다.031)盧重國, 앞의 책, 36쪽.

 한강유역에 거주하던 주민집단의 대다수는 韓人일 것이며 여기에 동해안 방면에서 이주해온 濊人이 일부 섞이게 되었을 것이다. 南沃沮 仇頗解 등 20 여 가의 이주032)≪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43년.가 그 예이다.≪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를 침략하는 靺鞨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동해안지역의 예인일 것이며033)박진욱,<백제, 신라에 이웃하였던 말갈에 대하여>(≪력사과학≫1978-3,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7쪽.
兪元載,<三國史記 僞靺鞨考>(≪史學硏究≫29, 1979).
백제와의 잦은 접촉과정에서 일부 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한예들은 주로 백제의 피지배층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한반도 중서부지방에 널리 분포하는 木棺墓는 이들, 특히 한인들의 묘제로서 고구려계 유이민들의 묘제인 적석묘와 뚜렷이 구분된다. 목관묘는 서울지역에서만 葺石封土墳034)이를 (方形)土築墓라고 부르는 견해(姜仁求,≪三國時代墳丘墓硏究≫,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4)와 封土土壙墓라고 부르는 견해(朴淳發, 앞의 글)가 있다.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는데 이는 고구려계 유이민들이 전래한 적석묘의 영향으로 생각되며035)봉토 위에다 돌을 덮는 착상이라든지 매장주체부의 위치가 地上化하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林永珍,<石村洞一帶 積石塚系와 土壙墓系 墓制의 性格>(≪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考古學篇-, 1987), 486쪽.
李賢惠, 앞의 글, 18쪽.
다른 지역에서는 대형 옹관묘나 목곽묘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지배층을 구성하였던 세력들은 각각 다른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남하하여 한강유역 각지에 정착하였던 것 같다. 온조왕대에 右輔로 임명된 北部人 解婁는 본래 부여인이었다고 하므로036)≪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41년. 백제 후기까지 중요 귀족세력이었던 해씨집단은 부여계통임이 분명하다. 해씨와 함께 북부에 속하였던 眞氏세력이나 말갈과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東部人 屹于, 高木城 昆優 등도 대개 유사한 성격으로 파악된다. 춘천에 貊國이 존재하였다는 설037)≪三國史記≫권 35, 雜志 4, 地理 2, 朔州.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백제의 주민구성에 신라·고려(고구려)·왜·중국인들이 섞여 있는 상황038)≪北史≫권 94, 列傳 82, 百濟.
≪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은 4세기 전반 중국의 군현이 축출된 이후 활발해진 삼국간, 나아가서는 중국·왜와의 긴밀한 교섭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개로왕대와 동성왕대에 중국에 보낸 국서에 등장하는 張茂,039)≪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 高達·楊茂·王茂·張塞·陳明 등과040)≪南齊書≫권 58, 列傳 39, 百濟. 高興,041)≪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말미. 王仁042)≪日本書紀≫권 10, 應神天皇 15·16년.
≪古事記≫中, 應神天皇.
등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는 와중에서 백제에 흡수된 중국계 인물들일 가능성이 크다.043)이전에도 낙랑지역의 주민들이 다양한 원인으로 백제지역으로 이주하는 일이 잦았을 것이다. 後漢 桓帝·靈帝代의 “民多流入韓國”(≪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이 가장 현저한 예이다. 양 세력간의 전투에서도 民에 대한 약탈이 빈번하였을 것이다(≪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13년).

<權五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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