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국과 목지국

1) 백제국과 목지국

 마한의 여러「國」중의 하나였던 伯濟國은 한강 하류지역, 현재의 서울시 강남구·송파구 일대를 중심으로 삼았다. 백제국이라는 정치적 실체가 최초로 확인되는 시점은≪삼국지≫에 의하면 3세기 중반 무렵에 해당된다. 서울시 송파구의 가락동과 석촌동 일원에 분포하는 목관묘계통의 유적이 당시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 무덤들이 북방계인 백제국 최고 지배세력의 무덤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서울시 강동구의 몽촌토성은 백제국의 중심세력이 거주하였던 생활유적으로서 백제국의 國邑에 해당된다. 축성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성내에서 발견된 西晋의 錢文陶器片044)夢村土城發掘調査團,≪夢村土城發掘調査報告≫(1985), 140쪽.은 이 성의 사용시기가 3세기대로 소급함을 보여준다. 아마도 최초의 모습은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盛土築城한 토성이었다기보다는 자연구릉을 최대한 활용하고 주위에 목책을 두른 형태였을 것이다.045)外城의 정상부, 本城의 서북벽, 동벽의 바깥쪽에서 목책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夢村土城發掘調査團,≪整備·復元을 위한 夢村土城發掘調査報告書≫(1984), 91∼93·242∼245쪽.
―――――――――, 앞의 책(1985), 53∼54쪽.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대에 이미 영토를 북으로는 浿河, 남으로는 熊川, 서로는 大海, 동으로는 走壤으로까지 뻗쳐 마한과의 경계를 정하고046)≪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13년. 곧이어 마한을 공격하여 병탄한047)≪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26·27년.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의 마한은 마한 전체라기보다는 目支國을 중심으로 결집된 일부 세력으로 판단된다. 따라서≪삼국사기≫온조왕조 기사에 반영된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는 한강 하류지역에서 성장한 백제국 중심의 연맹과 기존의 선주민사회를 바탕으로 성장하여 온 목지국 중심의 연맹간의 관계로 이해된다.

 여기서의 패하는 현재의 임진강, 대해는 서해, 주양은 춘천에 해당되며, 웅천은 安城川으로 보는 견해048)李丙燾,<目支國의 位置와 그 地理>(≪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1), 248쪽.와 錦江으로 보는 견해049)李道學,≪百濟集權國家形成過程硏究≫(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991), 170∼171쪽.로 대립되어 있다.≪삼국사기≫온조왕조의 영역관은 당대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사실이 소급, 부회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큰 이유는≪삼국지≫의 내용을 볼 때 3세기 중반까지도 의연히 목지국이 존재하고 있으며, 백제국은 아직 전체 마한을 대표하는 위치에까지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삼국사기≫온조왕조의 영역기사와 마한(목지국)의 멸망기사는 3세기 중반 이후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天安 淸堂洞,050)徐五善·權五榮,<천안 청당동유적 발굴조사보고>(≪休岩里≫-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22책-, 1990).
徐五善·權五榮·咸舜燮,<천안 청당동 제2차 발굴조사보고서>(≪松菊里≫Ⅳ-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23책-, 1991).
徐五善·咸舜燮,<천안 청당동 제3차 발굴조사보고서>(≪固城貝塚≫-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24책-, 1992).
韓永熙·咸舜燮,<천안 청당동 제4차 발굴조사보고서>(≪淸堂洞≫-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25책-, 1993).
淸州 松節洞,051)車勇杰·趙詳紀·禹鐘允·吳允淑,≪淸州 松節洞 古墳群≫(忠北大 博物館, 1994). 公州 下鳳里052)徐五善,<公州 下鳳里遺蹟 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5,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3). 등지에서는 3세기대의 목관묘와 목곽묘들이 발견되었는데 묘광의 주위에 周溝를 돌린 점이 큰 특징이며 입지, 유구의 구조, 출토유물면에서도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의 목관묘들은 서울지역의 같은 시기의 목관묘들과 내용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백제국 중심의 세력권과 목지국 중심의 세력권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053)權五榮,<중서부지방 백제 토광묘에 대한 시론적 검토>(≪百濟硏究≫22,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1).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유역에서는 목관묘와 함께 적석묘가 사용되고, 반면에 충청 이남에서는 서울의 목관묘와는 다른 특징적인 목관묘들이 발견되는 현상은 백제국 중심의 연맹과 목지국 중심의 연맹간의 문화적 차이를 반영하는 셈이므로, 결국 목지국의 위치는 천안-청주를 잇는 선의 이남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을 멸망시킨 후, 즉시 大豆山城을 쌓았다고 한다.054)≪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27년. 이 성의 기능은 목지국의 저항을 제압하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그 위치는 목지국의 국읍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것이다. 온조왕 36년(18)에는 湯井城을 쌓고 大豆城의 민호를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고 하므로, 대두성은 탕정성(현재의 溫陽)에 근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055)최근에 大豆山城의 위치를 牙山 靈仁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발표되었다(兪元載,<百濟 湯井城硏究>,≪百濟論叢≫3,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2, 84쪽). 따라서 목지국의 위치는 온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 특히 천안 일대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056)天安郡 稷山일대는 예전부터 목지국의 중심지로 비정되어 왔으며(李丙燾, 앞의 글), 역시 天安의 花城里유적은 인근의 淸州市 新鳳洞유적과 함께 이 일대에서는 가장 중요한 유적이다.

 목지국을 중심으로 하였던 마한연맹체는 백제국의 성장, 목지국의 쇠락과 함께 분열·퇴축되어 갔을 것이며 차츰 영산강유역의 세력이 마한 잔여세력을 대표하는 중심체로 떠올랐던 것 같다. 5세기대를 중심 연대로 하는 羅州·靈巖 등지의 대형 옹관묘들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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