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2) 백제국 성장의 배경

2) 백제국 성장의 배경

 북방 유이민들이 주체가 된 백제국 중심의 연맹이 목지국 중심의 연맹을 압도할 수 있었던 원인은 몇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들 수 있다. 한강유역의 春川 中島,057)國立中央博物館,≪中島Ⅰ-國立博物館 古蹟調査報告 제12책-≫(1980).
國立中央博物館,≪中島Ⅱ-國立博物館 古蹟調査報告 제14책-≫(1982).
朴漢卨·崔福奎·盧爀眞·崔恩珠,≪中島發掘調査報告書≫(江原大 博物館, 1982).
中原 荷川里,058)尹容鎭,<中原 荷川里 F地區 遺蹟發掘調査報告-1983·1984年度->(≪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考古·古墳分野 Ⅱ-≫, 忠北大 博物館, 1984). 提川 陽坪里059)裵基同,<堤原 陽坪里 A地區 遺蹟發掘調査報告>(≪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考古·古墳分野Ⅰ-≫, 忠北大 博物館, 1984).·桃花里060)崔夢龍·李熙濬·朴洋震,<堤原 桃花里地區 遺蹟發掘調査報告>(≪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考古·古墳分野Ⅰ-≫, 忠北大 博物館, 1984). 등의 유적에서는 鑄造鐵斧 이외에 鍛造鐵器, 특히 농공구와 무기들이 상당량 출토되고 있다. 반면에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까지 금강유역 철기문화의 발달은 지금까지의 자료로 보는 한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기원전 3세기 단계만 하더라도 금강유역이 한반도의 중부 이남에서는 철기문화의 보급이 가장 이른 지역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다.

 鉾·鏃·斧·刀 등의 발달된 철제 무기류는 기원 이후 중부지방의 각지에서 성장해 오던 지역집단간, 소국간의 분쟁에서 우열의 격차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도끼·삽날·괭이·낫·손칼 등의 철제 농공구는 황무지 개간을 비롯한 起耕·제초·수확 등 일련의 과정에서 석제나 목제 농공구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였을 것이다.061)李賢惠,<三國時代의 농업기술과 사회발전>(≪韓國上古史學報≫8, 韓國上古史學會, 1991).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농업생산력의 문제이다. 최근에 발굴 조사된 河南 渼沙里유적에서는 늦어도 4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밭의 흔적이 발견되었다.062)崔鍾澤,<渼沙里出土 밭의 構造와 年代에 대해서>(≪서울大學校 博物館年報≫5, 서울대 박물관, 1993).≪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가뭄·홍수·蝗害 등의 자연재해와 그로 인한 보리·콩 등의 곡물피해, 나아가서는 가뭄·기근 등의 사건이 자주 나타나고 있어서 당시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고 있다. 왕에 의한 勸農 조치가 자주 내려지고 있으며 때로는 구체적으로 논의 설치, 홍수피해를 입은 밭의 보수, 제방 보수, 흉년으로 인한 釀酒의 금지령 등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논농사, 또는 쌀의 재배는 초기에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다루왕 6년(33)에 가서야 처음으로 논을 만들었다는 점, 미사리유적의 경우도 논이 아닌 밭이라는 점, 하천리의 주거지 내부에서 보리알을 포함한 밭곡물이 토기 속에 보관된 상태로 발견된 점 등에서 이러한 유추가 가능하다.063)청동기시대에 이미 한강유역의 驪州 欣岩里遺蹟(≪欣岩里住居址≫4-서울대 고고인류학총간 제8책-, 1978), 금강유역의 扶餘 松菊里遺蹟(≪松菊里≫Ⅰ-國立博物館 古蹟調査報告 제11책-, 1979)에서 쌀재배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 초기에 쌀농사가 본격화하지 못한 이유는 단정할 수는 없으나 백제의 지배집단이 북방계란 점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백제에서 쌀농사의 시행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권장되기 시작한 것은 고이왕대에 南澤에서 논이 개척06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9년 2월.되면서 부터이다. 이 때는 3세기 중반경으로서 백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맹의 남쪽 경계가 확장되면서 경기도 남부의 평야지대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철기의 보급은 금강유역이 한 걸음 앞서 나갔으나 이 지역의 철기가 주조철부와 鐵鑿의 단조로운 조합상을 보이는 점065)池健吉,<長水 南陽里出土 靑銅器·鐵器 一括遺物>(≪考古學誌≫2, 1990).
李健茂,<扶餘 合松里遺蹟 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2, 1990).
―――,<唐津 素素里遺蹟 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3, 1991).
에서 유추되듯이 사회적 생산력의 급속한 증진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반면에 한강유역에서는 한걸음 늦게 철기문화가 등장하기는 하였으나 발달된 단조기술을 기반으로 농공구류가 풍부하게 제작되었으며 이러한 생산도구를 이용한 농업의 확대는 여러 측면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추동하였을 것이다.

 漢城期 백제의 鐵産地는 현재 분명히 드러난 것은 없으나≪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남한강 상류인 寧越·提川·忠州 등지와066)李道學, 앞의 책, 78쪽. 황해도의 瑞興·平山·鳳山·海州·牛峰 등지의 철산이067)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 文化財管理局, 1973), 79쪽. 중요시된다.

 다음으로는 한강 하류지역의 입지적인 조건을 꼽을 수 있다. 고대의 항해로가 바다를 직접 횡단하지 못하고 연안을 따라 진행되었음을 감안할 때 한강하구는 중국-낙랑·대방-가야-왜를 잇는 해상교통로상의 중요지점이었다. 弁辰 狗耶國의 성장 배경으로 풍부한 철산지와 함께 낙동강유역의 여러 정치체에 대한 관문으로서의 기능을 들 수 있다는 견해068)李賢惠,<4세기 加耶社會의 交易體系의 변천>(≪韓國古代史硏究≫1, 韓國古代史硏究會, 1988).는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제국의 경우도, 인천지역의 미추홀집단을 병합하면서 한강하구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내륙지방, 나아가서는 낙랑군과 대방군, 晋과의 교역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069)이와 함께 인천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소금의 산지를 장악하게 된 백제국이 소금의 독점적인 생산과 공급을 통해서 한강유역의 각 세력들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李道學, 앞의 책 68∼82쪽).

 한반도 중부와 서부지방에서는 3∼5세기 무렵의 서진과 동진의 물품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3세기 후반의 서진대 물품들은 서울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錢文陶器,070)夢村土城發掘調査團, 앞의 책(1985), 140쪽. 洪城 神衿城 출토의 전문도기,071)成正鏞,<漢城百濟期 中西部地域 百濟土器의 樣相과 그 性格>(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93), 64쪽. 益山 胎峰寺址 출토의 西晋鏡072)洪思俊,<全北 益山出土 六朝鏡>(≪考古美術≫1-1, 韓國美術史學會, 1960).
柳佑相,<胎峰寺出土 晋鏡에 對한 小考>(≪湖南文化硏究≫4, 1966).
등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것들은 마한 소국들이 독자적인 교역을 통하여 구입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4세기 이후의 동진제 물품은 서울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 석촌동고분군에서 자주 발견되며 原州 法泉里,073)金元龍,<原城郡 法泉里 石槨墓와 出土遺物>(≪考古美術≫120, 韓國美術史學會, 1973). 天安 花城里074)三上次男,<漢江流域發見の四世紀越州窯靑磁と初期百濟文化>(≪朝鮮學報≫81, 1976).
小田富士雄,<越州窯靑磁를 伴出한 忠南의 百濟土器>(≪百濟硏究≫특집호, 1982).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백제 중앙에 의하여 수입된 후 분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075)權五榮,<4세기 百濟의 地方統制方式 一例>(≪韓國史論≫18, 서울大 國史學科, 1988).

 대외교섭 창구의 일원화로 인하여 백제국은 중서부지방의 여러 정치체 안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을 것이며, 역으로 이러한 우세는 백제국의 위치를 한층 공고히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076)이러한 양상은 삼국 전기에 공통적이었을 것이다(盧泰敦,<三國時代의「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1975, 10∼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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