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3) 백제국의 성장

3) 백제국의 성장

 백제국 성장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내부적으로는 백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집단들, 그리고 주로 유이민집단이 중심이 되었을 경기도 북부, 강원도 서부의 여러 정치체들077)이러한 세력들은≪三國史記≫百濟本紀에 北部와 東部로 표현되었을 것이다.의 원심분리적인 운동력을 제거하면서 지배세력들을 관료체제 내부로 흡인하는 방향이었다. 외부적으로는 북방의 군현세력, 동북방의 靺鞨(濊)과 항쟁하고, 남쪽으로는 기존의 목지국 중심의 마한연맹체를 잠식해가면서 전체 마한사회의 패권을 장악하는 방향이었다.078)盧泰敦,<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171∼172쪽.

 2세기 후반 이후 韓濊가 강성해져 중부 이남지역의 정치체들에 대한 낙랑군의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요동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누리고 있던 公孫康에 의해 3세기 초에 설치된 대방군은 이러한 추세를 저지하게 위한 방편이었다. 이 시도는 부분적인 효과를 거두어 유민을 모으고 한예를 공격하면서 주민이 점차 돌아오게 되었고, 이후 왜와 한은 대방군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079)≪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대방군의 설치는 2세기 이후 삼한사회의 정치적 성장이 현저하여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그 주역은 백제국을 중심으로 한 마한 북부의 여러 정치체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국을 중심으로 마한의 북부 세력들이 결집되어 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080)그 연대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대체적인 흐름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온조왕대에는 말갈·낙랑·마한과 전투할 때, 항상 온조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에 온조의 뒤를 이은 다루왕 3년(30)에는 동부 屹于가, 4년에는 고목성 昆優가 각각 말갈과의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간에는 온조왕 31년(13)·32년에 남북·동서부의 설치, 41년에 右輔였던 族父 乙音의 후임으로 북부인 解婁의 임명 등이 있다. 다루왕대에는 우보의 직위가 북부인 해루에서 동부인 흘우로 옮겨졌고 동왕 10년에는 左輔를 신설하여 전임 우보였던 흘우를 좌보로 이동시키고 새로이 북부인 眞會를 우보로 임명하고 있다. 고이왕 7년(240)에는 역시 북부인으로 여겨지는 眞忠을 左將에 임명하여 內外 兵馬使를 통괄시키고 14년에는 진충을 우보로, 眞勿을 좌장에 임명하고 있다.081)이 가운데 해씨와 진씨는 이른바「大姓八族」으로서 백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漢城期에는 王妃族으로 기능하였다(李基白,<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569∼579쪽). 이렇듯 중앙의 정치무대에 참여하는 집단의 폭이 확대되어 가는 양상은 백제국 중심의 연맹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관계조직의 성립이 지방세력의 흡수 및 편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魏의 景初연간(237∼239)에 접어들며 요동의 공손씨정권은 붕괴되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의 직접 관할로 들어갔다.08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序. 새로이 파견된 대방태수 劉昕과 낙랑태수 鮮于嗣는 각 소국간의 통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국의 우두머리인 臣智들에게 邑君·邑長 등의 印緩를 분배하고, 이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에게는 衣幘을 하사하였다.08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성장해 나가던 세력집단들과 낙랑·대방과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3세기 중반 魏의 正始연간에는 대규모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그 발단은 幽州刺史 毋丘儉의 고구려 침공이었다. 고구려 동천왕 18년(244;고이왕 11) 步騎 1만명으로 시작된 관구검의 침공은 고구려의 패주로 본대는 일단 회군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는 玄菟太守 王頎가 파견되어, 동천왕을 추적하여 함경도의 동옥저를 거쳐 두만강 너머 북옥조지역에까지 이르렀다.084)≪三國志≫권 28, 魏書 28, 毋丘儉傳 및 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東沃沮. 그리고 이 해에는 낙랑태수 劉茂와 대방태수 弓遵이 영동지방의 濊를 침공함으로써08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 이 전쟁은 현도·낙랑·대방을 주축으로 한 유주와 고구려의 대결이 되고 동시에 동옥저·북옥저·동예마저 전화에 휩쓸려 들어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파급은 곧 남쪽에도 미치게 되었다. 백제의 고이왕은 유주자사, 낙랑·대방태수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그 틈에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의 변방 주민을 습격하여 잡아왔다고 한다.086)≪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13년. 이 사건은≪삼국지≫한조에서는 약간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辰韓八國」을 분할하여 낙랑군에 통할시키는 분리책에 대항하여 어떤 신지가 韓의 분노를 격발시켜 대방군을 선공하면서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087)弓遵은 正始 6년까지도 대방태수로 재직하였음이≪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條에서 확인되며, 이 해의 고구려 공격을 담당하였던 현도태수 王頎(≪三國志≫권 28, 魏書 28, 毋丘儉傳)가 8년에는 대방태수로 등장하기(≪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倭人) 때문에 그 사이, 즉 245∼247년 사이에 사망한 셈이다. 따라서 전쟁은 이 기간에 전개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삼국사기≫와≪삼국지≫에 나타난 사건은 동일사건임이 분명하다.≪삼국지≫에 나타난 전쟁의 원인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이면서 배경을 이룬다면,≪삼국사기≫의 내용은 그 발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전쟁을 주도한≪삼국지≫에 보이는 한의 신지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삼국사기≫의 기사와 결부시켜 이를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088)千寬宇,<『三國志』韓傳의 再檢討>(≪震檀學報≫41, 1976), 32∼33쪽. 목지국의 신지로 보는 견해,089)이 전쟁은 目支國 중심의 마한의 패배로 귀결되었고 그 결과 소국들의 이탈로 목지국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백제가 목지국을 제압하고 마한 전체의 영도권을 차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논리이다(盧重國,<馬韓의 成立과 變遷>,≪馬韓·百濟文化≫10, 1987, 36∼38쪽). 그리고 제3의 세력으로 보는 견해090)≪三國志≫百衲宋本에는 “臣智激韓忿”이란 귀절이 “臣幘沾韓忿”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臣幘(濆)沾(沽)이 노하여”로 해석하고 대방군을 공격한 주체를 백제국이 아닌 馬韓諸國 중의 하나인 臣濆沽國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末松保和,≪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518쪽의 後註 65). 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문제는 현재 명쾌히 해명하기 곤란한 상태인데 여기에서는 첫번째의 견해를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낙랑·대방군과의 전투는 마한의 여러 정치체 중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세력들이 주도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246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091)池內宏,<公孫氏の帶方郡設置と曹魏の樂浪·帶方二郡>(≪滿鮮史硏究≫上, 제1책, 吉川弘文館, 1951), 247쪽. 이 해는≪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이 낙랑을 습격한 때와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약간씩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2郡이 드디어 韓을 멸망시켰다”라는 기록09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에서부터 “낙랑태수가 노하니 왕(고이왕)이 침공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빼앗았던 民口를 돌려주었다”093)≪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13년. “韓那奚 등 수십국이 각기 種落을 이끌고 항복하였다”094)≪三國志≫권 4, 魏書 4, 齊王芳紀 正始 7년. 등으로 분분하다.095)≪三國志≫齊王芳紀에서는 正始 7년에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예맥토벌, 한나혜 등의 항복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였으며≪삼국사기≫고구려본기와≪資治通鑑≫권 75, 魏紀 7, 邵陵厲公에서도 이 연대를 좇고 있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삼국지≫관구검전과 고구려·예·한·왜인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침공은 정시 5년부터 시작하여 7년까지 지속되었고 齊王芳紀에서는 이 전역이 완전히 마무리된 정시 7년조에서 일련의 사건을 간략히 압축,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궁준의 사망 이후 두 세력간의 대규모 충돌은 더 이상 없게 되었고 韓(백제국)측에서 빼앗았던 주민을 송환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약 30년 동안 두 세력간에는 별다른 충돌이나 교섭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백제 내부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27년(260)에 6佐平의 설치와 직무분장, 좌평 이하 克虞까지의 16관등의 설치, 紫·緋·靑으로 3분된 관인들의 복색규정, 奈率(6품) 이상 銀花로 장식한 冠의 착용,096)銀製 花形冠飾은 扶餘 下黃里(洪思俊,<扶餘 下黃里 百濟古墳 出土의 遺物>,≪然齋考古論集≫, 1967), 論山 六谷里(安承周·李南奭,≪論山 六谷里 百濟古墳 發掘報告書≫,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88), 南原 尺門里(洪思俊,<南原出土 百濟飾冠具>,≪考古美術≫9-1, 韓國美術史學會, 1968), 羅州 興德里(有光敎一,<羅州潘南面古墳の發掘調査>,≪昭和十三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1940) 등지의 석실분에서 그 실물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 무덤에 묻힌 피장자는 奈率 이상의 관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內臣佐平 임명 등이 이루어지고 다음해에는 왕의 冠制와 服式제정,097)왕의 冠인 금으로 장식한 烏羅冠은 公州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金製 冠飾 1쌍을 검은 비단 모자에 결합시킨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文化財管理局,≪武寧王陵≫, 三和出版社, 1973, 18쪽). 南堂에서의 聽事, 내신좌평 이외에 나머지 다섯 좌평의 임명 등이 이루어진다. 그 다음해에는 관인으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도둑질한 자에 대한 처벌령이 내려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와 문물의 정비는 고이왕대를 백제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시기로 설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098)이런 까닭에≪周書≫에 전하는 백제 시조인 仇台를 古爾와 동일시하며 고이왕 27∼28년 경을 백제의 진정한 건국 연대로 보기도 한다(李丙燾,<百濟의 建國問題와 馬韓中心 勢力의 變動>, 앞의 책, 474∼477쪽).

 그런데≪삼국사기≫에 나타난 6좌평의 구성과 직무분장, 왕의 복식과 관인의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의 내용은≪舊唐書≫와, 16관등의 명칭과 서열은≪周書≫·≪北史≫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099)약간씩의 차이는 존재한다. 예컨대 5품관의 경우≪삼국사기≫와 ≪주서≫에는 扞率로,≪北史≫·≪隋書≫·≪翰苑≫는 杅率로 표기되어 있다. 官人의 帶色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중국측 사서에서 紫·皁·赤·靑·黃·白의 순서로 나열하고 있지만≪삼국사기≫본기에는 해당내용이 없고 권 32, 色服에서 중국측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관인의 服色에 대해 중국측 자료에서는≪구당서≫의 緋色,≪신당서≫의 絳色 이외에 더 이상의 설명이 없으나≪삼국사기≫본기에는 紫·緋·靑의 3단계의 구분이 있다. 따라서≪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측 자료를 그대로 옮겨 실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까닭에≪삼국사기≫의 기사처럼 고이왕대에 정연한 체제정비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泗沘期 이후의 사실이 부회되었다고 보는 것이다.100)盧重國,<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서울大 國史學科, 1978), 80∼83쪽.

 하지만≪삼국사기≫와≪일본서기≫에 나타난 바로는 고이왕 27년과 28년에 최초의 좌평 임명이 이루어진 이후, 동성왕대까지는 內頭佐平을 제외한 5좌평의 관등을 지닌 인물들이 골고루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오히려 무령왕대 이후부터는 구체적인 직능을 갖지 않은 형태의 좌평, 상·중·하좌평, 대좌평만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6좌평제도는 漢城 및 熊津期에 이미 정비된 형태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101)한편 6좌평제도 자체가≪周官≫에 입각하였을 것으로 보면서 문주왕 원년(475) 웅진 천도를 전후한 시기부터 6세기 전반의 어느 시기에 채택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李基東,<百濟國의 政治理念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69, 1990), 11∼13쪽.
―――,<百濟國의 成長과 馬韓 倂合>(≪百濟論叢≫2,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0), 9∼10쪽.
達率 이하의 관등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冠制의 경우는 현재까지 출토된 冠飾을 검토할 때 고이왕대의 규정에 들어맞는 관식이 사용되는 것은 6세기 초반 이후이기 때문에, 관제 역시 6세기 이후에야 실행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02)李南奭,<百濟 冠制와 冠飾>(≪百濟文化≫20, 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1990), 15∼19쪽..

 고이왕대에 율령이 반포되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무릇 관인으로서 受財한 자와 도둑질한 자는 3배로 변상케 하고 종신 禁錮에 처한다”라는≪삼국사기≫고이왕 29년의 기사를 인정하고 이 때에 율령의 반포가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하는 입장103)李鍾旭,<百濟의 佐平>(≪震檀學報≫45, 1978), 30∼32쪽.과 이를 부정하고 근초고왕 내지 근구수왕대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입장104)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266∼267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율령의 반포가 불교의 전래 및 공인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105)불교와 율령은 종교와 법제라는 형식의 차이는 있으나 고대국가 성장과정에서 중층적인 지배구조를 극복하고 일원적인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데에 동일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할 때 백제도 역시 불교 전래와 공인의 시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그럴 경우 4세기 후반 이전으로 소급시키기는 곤란할 것 같다.

 이상의 모든 사건들이 과연 고이왕대에 한꺼번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삼국사기≫에서 일련의 제도와 문물에 관한 정비의 내용들을 고이왕 27∼29년의 사건으로 일괄 기재하고 있는 점은 이 시기가 앞선 시기와 구분되는 하나의 획기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새로이 통일왕조 西晋이 등장하게 되며 서진과「東夷」와의 교섭이 급증한다.106)≪晋書≫武帝紀와 馬韓條에 나타난 양자의 교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武帝紀>  <馬韓條>
咸寧 2년(276) 2월  東夷八國歸化  
7월  東夷十七國內附  
3년(277) 是歲  東夷三國…各帥種人部落內附  復來
4년(278) 3월  東夷六國來獻  又請內附
是歲  東夷九國內附  
太康 원년(280) 6월  東夷十國歸化  其主遣使入貢方物
7월  東夷二十國朝獻  
2년(281) 3월  東夷五國朝獻  其主遣使入貢方物
6월  東夷五國內附  
3년(282) 9월  東夷二十九國歸化  獻其方物
7년(286) 8월  東夷十一國內附  又頻至
是歲  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  
8년(287) 8월  東夷二國內附  又頻至

≪진서≫에서의 동이는 夫餘國·馬韓·辰韓·肅愼氏·倭人·裨離等十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숙신은 함녕 5년(279)에 楛矢石弩를 바친 것이 서진과의 교섭으로는 유일하고,107)≪晋書≫권 97, 東夷傳, 肅愼氏條에는 武帝 元康 초에 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원강은 惠帝代에 속하므로 이는 착오이다. 무제기에 의할 때 함녕 5년에 교섭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倭人은 태시(265∼274) 초에 사신을 보낸 이후 함녕(275∼279), 태강(280∼289), 태희(290) 연간에는 교섭이 보이지 않으며 裨離等十國은 태시 3년(267)과 태희 원년(290), 합쳐서 2회의 교섭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武帝紀의 동이는 대개의 경우 부여·마한·진한으로 압축된다.108)부여는 서진과의 교섭이 東夷諸國 중에서 제일 잦았을 것이며, 특히 태강 6년 慕容鮮卑의 침공으로 망국의 위기에 처하면서 서진과 더욱 긴밀히 연결되었을 것이다. 진한의 경우는≪晋書≫권 97, 東夷傳 辰韓條에 의하면, 태강 원년, 2년, 7년 등 모두 3회에 걸쳐 遣使·朝貢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진서≫동이전에서는 누락되어 있으나 고구려도 당연히 이 시기에 서진과 교섭하였을 것이다.

 태강 3년(282)의 “東夷29國歸化”는≪진서≫張華列傳의 “東夷馬韓新彌諸國에서 … 대대로 귀부하지 않았던 20여 국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과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설명인 것으로 보인다.109)張華가 ‘持節 都督幽州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이 된 것은 태강 3년(282)이다(≪晋書≫권 3, 武帝, 太康 3년 정월 및 권 36, 張華列傳). 따라서 무제기의 동이 29국은 馬韓·新彌諸國을 가리키는 셈이다.110)이 구절은 흔히 “동이에 속하는 마한의 新彌諸國이”로 해석하여 新彌國 등을 마한의 하위개념으로 이해하지만, 해석상 마한과 新彌는 대등한 단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동이에 속하는 마한과 新彌의 諸國이”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태강 7년 8월의 동이 11국 來附도 ‘是歲條’에서는 마한 등 11국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무제기와 마한조 양자에 모두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무제기에서만 확인되는 동이 관계기사도 대개의 경우 마한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80·281년의 馬韓主는 전체 마한세력권 안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伯濟國王, 따라서 고이왕일 가능성이 크다. 282년에 이루어진 ‘東夷馬韓新彌諸國의 遣使朝獻’에서「마한」은 백제국 중심의 연맹을,「신미」는 그 나머지, 즉 마한 잔여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11)태강 연간의 마한이란 표현을 구분하여, 277∼281년까지의 마한은 백제국 중심의 마한, 282년의 마한은 신미국 등 20여 국이라고 보는 견해(盧重國,<목지국에 대한 일고찰>,≪백제논총≫2, 1990, 88쪽)도 있다. 이 경우에도 282년 단계에서 마한연맹체가 백제국 중심의 세력권과 신미국 중심의 세력권으로 양분되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본고와 동일한 이해에 도달하고 있다. 백제국이 기존의 목지국을 대체하여 전체 마한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마한을 칭하고 그 왕은「馬韓主」로 불리웠을 것이므로, 백제국 세력권 밖의 마한 제국들은 다른 명칭으로 불리웠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미제국이 아닌가 한다. 신미국의 위치는 대체로 전라남도 일대에 해당된다.112)≪日本書紀≫神功皇后 49년조의 ‘南蠻忱彌多禮’의 忱彌多禮를 일본어 훈독인 ‘도무다레(トムタレ)’로 읽지 않고 심미다례로 읽어 이를 新彌國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忱彌多禮의 위치는 제주도로 보는 견해(三品彰英,≪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上, 吉川弘文館, 1962, 154∼155쪽)와 康津으로 보는 견해(李丙燾,<近肖古王拓境考>, 앞의 책 512쪽)가 있어 왔다. 新彌國을 忱彌多禮와 동일시하는 입장에서는 전라도 해안지역, 특히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조영집단을 주목하는 견해(盧重國, 앞의 책, 118쪽)와, 해남으로 좁혀 보는 견해(李道學, 앞의 책, 192∼193쪽)가 있다.

 당시의 교섭은 歸化·內附·(遣使)來獻·朝獻·朝貢·遣使入貢方物·上獻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東夷校尉113)이 때의 東夷校尉는 平州刺史가 겸임하였으며(權五重,≪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124쪽의 주 74), 소재지는 襄平(遼寧省 遼陽市)이었다.를 거쳐서 입조하거나 東夷校尉府까지 가는 선에 머물렀을 것으로 이해된다.

 서진과 마한과의 교섭이 있었던 시기는 백제로서는 고이왕 43년(276)에서 책계왕 6년(291)까지의 시기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와 2郡과의 관계도 우호적이었던 듯, 군사적 충돌이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책계왕은 고이왕이 재위할 때에 ‘帶方王女寶菓’와 혼인하였으며, 그 원년(286) 고구려의 대방 침공에 임하여 대방이 구원을 청하자 ‘舅甥之國’이라면서 군사를 내어 구원하기까지 하였다.11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책계왕 원년.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에 마한 등의 동이세력들이 서진과 긴밀한 교섭을 가졌던 것과 잘 부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밀월관계는 곧 깨어지게 된다. 서진의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면서 전개된 8王의 亂(291∼306), 5胡의 발흥 등으로 서진은 전반적인 붕괴기에 돌입한다. 이와 함께 동이의 입조도 영평 원년(291)을 마지막으로 끊기게 된다.≪삼국사기≫에는 백제와 2군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양상이 나타나 있다. 책계왕 13년(298)에 漢(2郡)과 貊人의 침공을 방어하던 책계왕이 전사하면서, 이어 즉위한 분서왕은 304년 樂浪西縣을 습격하다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였던 것이다.115)≪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책계왕 13년 및 분서왕 7년.

 2군과 백제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이유는 이전부터 쇠락해가던 낙랑·대방이 서진 중앙의 혼란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를 감지한 백제가 강공책을 감행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책계·분서 두 왕이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대가를 치르기는 하였지만116)고이계의 마지막 왕인 契가 죽은 후 고이계는 절멸된 듯 이후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다.≪新撰姓氏錄≫에 기재된 백제계 씨족 중에는≪삼국사기≫에 이름을 전하는 백제왕들의 후예를 칭하는 씨족들이 다수 눈에 뜨이지만 고이·책계·분서·계의 후손을 칭하는 씨족들은 전혀 없다. 이 항쟁은 고이왕 이후 진행된 체제정비를 기반으로 백제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어 2군과 정면으로 승부를 벌일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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