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4) 정복전쟁과 마한통합

4) 정복전쟁과 마한통합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는 것을 고비로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낙랑·대방의 옛땅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분쟁이 시작되었고 400년 이상을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동방세계를 조정하던 군현세력이 물러간 힘의 공백상태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제국·왜 사이에는 복잡한 교섭이 전개되었다.

 4세기 중반, 백제는 왕위를 둘러싼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외세로 말미암아 책계·분서 두 왕이 갑작스럽게 피살된 이후, “구수왕의 둘째 아들로서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으나 개인적인 출중함에 의해 汾西王의 어린 맏아들(契)을 대신하여 臣民의 추대에 의해 즉위”하였다는117)≪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비류왕 즉위년. 비류왕의 등장은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계통118)≪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조에서는 고이왕이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고이왕의 생존년수는 123년 이상이 되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직접적인 혈연관계라기보다는 다분히 의제적인 관계일 것으로 여겨진다(金哲埈,<百濟建國考>,≪百濟硏究≫특집호, 1982, 13∼14쪽).과 초고-구수-비류로 이어지는 계통119)비류왕 역시 구수왕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는 110세 이상 생존한 셈이 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직접적인 혈연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李道學,<百濟의 起源과 國家形成에 관한 재검토>,≪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民音社, 1990, 135쪽).의 알력을 반영하고 있다. 비류왕이 죽은 뒤에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으나 2년만에 사망하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왕위계승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20)근초고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서는 당시 유력한 귀족가문이었던 眞氏세력과의 연합을 들 수 있다. 진씨와의 연결은 비류왕대에 이미 이루어졌으며 그 형태는 왕비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盧重國, 앞의 책, 126∼129쪽). 계왕은 초고계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아니면 일시 근초고왕과 양립하다가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의 이름에서「近」자는 혈통의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이며121)金哲埈, 앞의 글, 14쪽. 초고계가 왕권을 장악하였음을 안팎으로 천명하는 것이었다.

 왕위가 초고계로 고정된 근초고왕대에는 활발한 대외정복이 이루어졌다.122)이 정복전쟁의 배경에는 국력의 성장이란 측면과 함께 초고계와 고이계간의 왕위계승과정에서 야기된 내분을 외부적으로 발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지적되고 있다(梁起錫,≪百濟 專制王權成立過程 硏究≫, 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66쪽). 북으로는 대방의 옛땅을 두고 고구려와 항쟁을 벌이는 한편, 남으로는 마한 잔여세력에 대한 통합을 시도하였고, 동남쪽으로는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지역에까지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

 ≪일본서기≫신공황후 섭정 49년(369)123)≪日本書紀≫의 연대로는 249년이지만 神功紀의 연대는 120년 내려서 다루어야 한다.조에는 백제·신라·가야·왜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신공황후가 파견한 倭兵이 卓淳에 모두 모여 신라를 격파하니 이로 인해 比自㶱(昌寧)·南加羅(金海)·㖨國(昌寧 靈山?)124)이를 경북 경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安羅(咸安)·多羅(陜川)·卓淳(昌原?)125)이를 대구, 또는 칠원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加羅(高靈) 등의 7국을 평정하게 되었다. 거듭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古奚津(강진)에 이르고 南蠻 忱彌多禮를 정벌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肖古(근초고왕)와 왕자인 貴須(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니 比利·辟中·布彌支·半古 四邑126)이는≪日本書紀≫에서의 끊어 읽기와는 달리 ‘布彌·支半·古四의 邑’으로 읽는 것이 합리적이다(全榮來,<周留城·白江 位置比定에 關한 新硏究>, 한국문화재보호협회전라북도지부·부안군, 1976). 그럴 경우≪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條에 보이는 馬韓의 不彌國, 支半國, 狗素國에 대응된다. 比利는 역시 馬韓 小國 중의 하나인 卑離國일 가능성이 있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와 荒田別·木羅斤資 등은 意流村에서 회합한 후 千熊長彦만이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에 올라 백제왕은 이후 변함없이 西蕃으로서 끊임없이 조공할 것을 맹세했다.

 한때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는 데에 이용된 근거자료 중의 하나였던 이 기사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음이 분명하지만 정벌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치환할 경우 역사적인 진실을 일부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127)千寬宇,<復元加耶史(中)>(≪文學과 知性≫, 8-3, 1977), 916∼919쪽.
李丙燾,<近肖古王拓境考>(앞의 책), 511∼514쪽.
대체적인 줄거리는 백제와 왜병이 연합한 전쟁의 결과 백제에 대한 比自㶱 등 7국의 종속, 忱彌多禮의 정벌, 比利 등의 항복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가야정벌」은 군사적인 무력침공이라기보다는 백제를 정점으로 比自㶱 등 7국이 동맹을 맺거나 통교하게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128)金泰植,≪加耶聯盟史≫(一潮閣, 1993), 333쪽. 그것은 뒷날 성왕이 “옛날 나의 선조 速古王(近肖古王), 貴首王(近仇首王)의 치세에 安羅·加羅·卓淳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게 되어 우호관계를 두터이 맺게 되었다. 그래서 子弟로 삼아 항상 도탑게 잘 지내기를 바랐었다”129)≪日本書紀≫권 18, 欽明天皇 2년 4월.고 한 회고담을 통하여 짐작된다. 실제로 4세기 중반부터 백제가 가야지역을 직접 지배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가야유적에서 종종 발견되는 백제계의 유물들은 대개가 5세기 후반, 즉 웅진기 이후에 해당된다.130)崔鍾圭,<濟羅耶의 文物交流>(≪百濟硏究≫23, 1992).

 백제가 가야지역에 진출한 이유는 왜와의 교역로를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131)이외에도 고구려와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배후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金鉉球,<4세기 가야와 백제·야마토왜의 관계>,≪韓國古代史論叢≫6,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4, 116쪽). 윤색이 심하기는 하지만≪일본서기≫의 신공섭정 46년·47년조를 통해 볼 때, 아래의 사실들이 추출된다.

 근초고왕 19년(364) 久氐 등 백제 사신 3인이 왜와의 통교를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은 탁순까지 나아간 후 해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동왕 21년 왜에서 파견된 斯摩宿禰는 이 사실을 알고 종자인 爾波移와 탁순사람 1인을 백제에 파견하였다. 초고왕(근초고왕)은 기뻐하며 이들을 후대하였고 五色綵絹·角弓箭·鐵鋌 등을 이파이(니하야)에게 주고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물건들을 보여줌으로써 왜측의 교역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였다. 이파이가 돌아와 사마숙녜(시마노스쿠네)에게 보고하고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근초고왕 22년 백제는 신라와 동시에 왜에 교역단을 파견하였다. 이에 왜의 조정은 선왕대부터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다고 감격하였다. 백제와 신라. 양국은 왜와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백제측의 우세로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근초고왕 24년(369)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왜와의 교역을 독점하여 동아시아 교역권의 중심축으로 발돋움하려는 백제의 의도와 낙랑·대방의 퇴축 이후 한동안 선진문물의 공급에 곤란을 겪던 왜측의 욕구가 부합되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132)李賢惠, 앞의 글(1988), 174쪽. 가야에 대한 작전은 백제와 왜 사이의 원활한 교통로의 확보, 신라에 의한 교역 방해의 방지 등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이듬해 多沙城(河東)을 확보하여133)≪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攝政 50년 5월. 왜와의 교역에서 확고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忱彌多禮와 比利 등에 대한 정벌은 교역로의 확보와 마한 잔여세력의 통합이라는 측면이 결부되었을 것이다. 침미다례는 마한 잔여세력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세력이었다. 그것은 침미다례가 3세기 후반에 나타났던 新彌國과 동일한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근초고왕 24년의 전역에서 남만이라는 수식어가 별도로 붙어 있다는 점, 침미다례를 무찌르자 비리 등의 소국들이 자연히 항복해 왔다는 점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침미다례는 강진이나 해남지역으로 비정되며 비리 등도 대개 오늘날의 전남 해안지방에 비정된다. 반면에 백제국의 영내로 표현된 벽지산은 金堤 부근,134)李丙燾, 앞의 책, 513쪽. 고사산은 古阜 부근135)古沙山을 沃溝 臨陂로 보는 견해(李丙燾, 위의 글)도 있으나 古沙夫里, 즉 古阜 부근으로 보는 것(末松保和,≪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61, 51∼52쪽)이 합리적이다.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근초고왕 24년 이전 백제의 영토는 이미 노령산맥 이북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통합은 내부의 지배세력들을 온존시키면서 이들을 통한 공납적 지배의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다. 이는 이 지역에서 5세기에 접어들어 대형의 옹관묘가 조영되고, 그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칼 등의 화려한 물건들을 부장한 지배세력이 의연히 존재했던 사실136)有光敎一,<羅州潘南面新村里第9號墳發掘調査記錄>(≪朝鮮學報≫94, 1980).
穴澤口禾光·馬目順一,<羅州潘南面古墳群>(≪古代學硏究≫70, 古代學硏究會, 1973).
國立光州博物館·全羅南道羅州郡,≪羅州潘南古墳群≫-國立光州博物館學術叢書 제13책-, (1988).
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근초고왕대의 마한통합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일원적인 지방제도의 정비와 지방관의 파견으로까지 진전되지는 못하였으나 이 때부터 백제는 전체 마한세력을 대표하게 되었다. “晋代 이후 諸國을 병탄하여 마한의 옛땅에 자리잡았다”137)≪通典≫邊防門, 東夷傳 百濟.라는 표현은 이러한 양상을 반영한다.

 낙랑·대방의 축출 이후 고구려와의 관계는 4세기 전반부터 중반까지는 자료의 공백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완충지대가 없어지면서 국경을 직접 맞닿게 된 양국이 대방의 옛땅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팽팽하던 긴장관계는 마침내 근초고왕 24년(고구려 고국원왕 39) 폭발하였다.

 고구려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투는 초기에는 帶方故地의 남쪽에 해당하는 예성강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38)전쟁 초기에 백제군이 고구려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던 雉壤과 半乞壤은 모두 黃海道 白川으로, 浿河는 禮成江으로 비정되고 있다(李丙燾, 앞의 책, 509쪽). 半乞壤은 白川의 半月岡(≪新增東國輿地勝覽≫권 43, 白川郡, 古蹟)일 가능성이 크다. 전세는 차츰 백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근초고왕 26년에는 왕과 태자인 근구수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지역에 깊숙이 진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이 와중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기에 이르렀다.139)≪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24·26년, 근구수왕 즉위년 및 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39·41년.

 이 때 백제는 黃州에서 新溪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4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해당하는 백제토기류가 황주지방에서 출토된 점,140)崔鍾澤,<黃州出土百濟土器類>(≪韓國上古史學報≫4, 1990). 근초고왕 30년(375) 백제의 북변 水谷城(황해도 신계)을 고구려가 쳐서 함락시키는 상황141)≪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30년.에서 유추된다. 황해도 谷山 근처로 비정되고 있는 谷那鐵山142)≪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攝政 52년조에는 근초고왕이 七枝刀와 七子鏡 등을 倭에 보내면서 한 말 가운데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谷那鐵山에서 발원한다. 그 거리가 멀어 7일을 가도 미치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신공황후 52년은 근초고왕 27년(372)에 해당된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때에 백제는 水谷城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谷那鐵山은 현재의 谷山일원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나라 서쪽의 강”은 예성강이 된다.은 이무렵 개발되었을 것이다.

 대고구려전의 성공적인 수행, 왜와의 교역로 확보와 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 증대, 마한 잔여세력의 통합이 일단락 된 근초고왕 27년(372) 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냈고 ‘鎭東將軍 領樂浪太守’에 제수되었다.143)≪晋書≫권 9, 簡文帝 咸安 2년 정월·6월. 이제는 伯濟國王으로서 북부 마한연맹의 영도권을 가지고 있는 정도의「馬韓主」가 아니라 전체 마한을 아우른「百濟王」을 칭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 조정의 공식적 역사서인≪書記≫가 편찬되었다. 그 목적은 伯濟國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흡수되어 들어온 다양한 세력들의 활동과 경험들을 백제 전체의 역사로 용해시키고, 왕실 내부적으로는 초고계를 근간으로 하는 일원적 계보를 마련하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내용의 많은 부분이 당대 근초고왕의 치적을 과시하는 데에 할애되었을 것이다.

 당시 백제의 국력과 왕권의 성장은 서울시 석촌동 3호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무덤은 시기적으로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해당되며, 한 변의 길이가 50m에 달하는 초대형의 적석묘로서 여기에 묻힌 피장자는 근초고왕으로 추정되고 있다.144)金元龍·李熙濬,<서울 石村洞 3號墳의 年代>(≪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31∼32쪽.

<權五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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