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1. 한성시대 후기의 정치적 변화
  • 1) 한강유역의 상실
  • (1) 왕위계승 분쟁과 왕권의 쇠퇴

가. 4세기 후반의 왕위계승 분쟁

 방계인 古爾王系를 물리치고 肖古王系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한 근초고왕(346∼375) 이후 근구수왕(375∼384), 침류왕대(384∼385)까지는 영역의 확대,≪書記≫의 편찬 및 불교의 수용 등 일련의 왕권강화책에 힘입어 고대 귀족국가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의 한성시대 후기는 백제의 역사상 일대 격동의 시기였다.145)한성시대 후기의 정치과정을 종합적으로 다룬 연구는 다음과 같다.
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129∼149쪽.
―――,<4∼5世紀 百濟의 政治運營>(≪韓國古代史論叢≫6, 1994).
梁起錫,≪百濟 專制王權 成立過程 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73∼89·119∼128쪽.
李道學,<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百濟論叢≫2,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0), 287∼302쪽.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침공세와 함께 대내적으로 잇따른 왕위계승 분쟁과 이에 따른 眞氏·解氏·木氏 등의 유력한 정치세력의 발호로 인하여 왕권은 극도로 쇠미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권력구조는 왕족과 왕비족간의 연합체제를 이루는 가운데 왕권과 유력한 귀족세력 사이의 타협물인 上佐平制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근구수왕 이후 백제는 왕의 단명, 이에 따른 비정상적인 왕위계승, 정변에 의한 왕의 피살 등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내분을 겪게 되면서 왕권은 극도로 동요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왕위계승 분쟁 중 첫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진사왕의 즉위를 둘러싼 왕위계승 분쟁이다. 침류왕이 재위 2년만에 죽자 그의 동생인 진사가 태자 阿莘이 어리다는 구실로 왕위를 잇고 있다. 진사왕(385∼392)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앞선 고이왕과 비류왕의 즉위 예에서도 나타나듯이146)≪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즉위년 및 비류왕 즉위년. 태자가 연소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는 비상시기의 경우 왕위계승이 부자상속이 아닌 형제상속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日本書紀≫에서는 진사왕이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서147)≪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65년 을유. 진사왕의 즉위과정에 어떤 정변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의 인물됨을 평하여 “강용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고 한 점으로 보아148)≪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진사왕 즉위년. 진사는 태자 아신이 연소함을 틈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149)盧重國은 진사에 의한 왕위찬탈 배경을 침류왕의 불교공인에 따른 지배세력 사이의 갈등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앞의 책, 132∼133쪽). 짐작된다.

 이와 같이 변칙적으로 즉위하였던 진사왕은 빈번한 토목공사 등을 실시하여 왕권을 신장하고자 하였다. 진사왕 2년에는 고구려와 이에 부용된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 북쪽 국경지대인 靑木嶺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곳까지 15세 이상의 민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축성사업을 벌였으며,150)≪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진사왕 2년 춘. 동왕 7년에는 궁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그 부속시설들을 호화스럽게 꾸미는 등151)≪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진사왕 7년 정월. 토목공사를 일으켜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려 하였다. 또한 狗原(豊壤152)酒井改藏,<三國史記の地名考>(≪朝鮮學報≫54, 1970), 46쪽.), 강화도, 橫岳(서울 북한산153)金正浩,≪大東地誌≫권 1, 漢城府, 山水·典故.
金瑛河,≪三國時代 王의 統治形態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88), 38∼39쪽.
) 등 서울 근교지역에서 사냥을 빈번히 실시하였는데, 이는 국왕으로서의 군사통수권을 확인하여154)金瑛河, 위의 책, 58∼60쪽. 대고구려전을 독려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무모한 토목공사의 실시와 특히 진사왕 8년(392) 고구려군의 대규모 공세로 인해 그 북방의 요새인 關彌城을 상실하는 등 대고구려전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는 백제의 지배세력간에 동요를 일으켜 진사왕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그 자신도 재위 8년만에 죽고 말았다.

 진사왕의 죽음에 대해서는≪三國史記≫에서는 구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행궁에서 죽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155)≪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진사왕 8년 10월·11월.≪일본서기≫에서는 진사왕이 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어서156)≪日本書紀≫권 10, 應神天皇 3년 임진. 아마 그는 어떤 모종의 정변에 의해 희생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아신왕(392∼405)의 즉위도 일련의 내분을 거치고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침류왕 사후 진사왕의 변칙적 즉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침공세의 강화, 진사왕의 피살로 이어지는 당시 백제의 대내외적인 정치정세의 불안은 왕족은 물론 지배세력간의 대립과 갈등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지배세력들간의 구체적인 동태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진사왕대에 眞嘉謨가 병관좌평이었고, 아신왕대에 左將 眞武는 國舅로서 각기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이 시기에 진씨의 정치적 영향력이 보다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위와 같은 왕위계승 분쟁에도 크게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157)아신왕 2년에 眞武가 左將에 임명된 사례에 주목하여 진무가 이 정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盧重國, 앞의 책, 150쪽). 이러한 왕비족 진씨세력의 역할 증대는 점차 왕권이 쇠미해지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먼저 왕권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지배세력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시조묘인 동명묘에 배알함과 동시에 범부여족사회에서 거행되던 전통적인 의례인 祭天祀地를 南壇에서 거행하였다.158)≪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2년 정월. 이어 즉위 3년에 원자 전지를 태자로 조기 책봉하여 왕위계승상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고, 서제인 洪을 수석좌평인 內臣佐平에 임명하여 왕실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리고 국구인 진무를 좌장에 임명하여 병마권을 위임함으로써 내정은 왕족, 병권은 왕비족인 진씨세력에게 각각 역할을 분담시켜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아신왕의 왕권은 근초고왕대 이래로 구축된 왕족-왕비족 연합체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유지되었다.

 그런데 백제 진사왕대부터는 대외적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의 적극적인 남하공세에 밀려 한강유역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신왕 5년(396)에는<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 보듯이 한강유역에 있는 58성 700촌을 고구려군에게 공취당하였다. 이에 아신왕은 굴복하고 그 복속의 표시로 왕제와 대신 10명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내고, 남녀 1,000명과 細布 1,000필을 바치는 한편, 한때나마 고구려왕의「奴客」으로서 고구려세력권에 예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159)武田幸男,<高句麗好太王碑文にみえる歸王について>(≪末松保和博士古稀記念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上, 1978), 79∼88쪽. 이와 같은 굴욕을 씻기 위하여 아신왕 6년에는 왜와 비밀리에 통교하고 태자 전지를 왜에 청병사의 성격을 가진 인질로 파견하여 백제를 후원토록 하였다. 태자 전지가 인질로 왜에 파견된 이후 아신왕은 한강 남쪽에서 열병을 실시하여 왕으로서의 군사통수권을 확인하였고, 이듬해에는 진무를 좌장에서 병관좌평으로, 沙豆를 좌장으로 승진시켰다.160)≪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7년 2월. 이 인사조치는 지금까지 병마권을 장악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패하였던 진씨세력에 대한 책임 추궁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雙峴城을 축조하거나 西臺에서 활쏘기를 하는 등161)≪三國史記≫권 5, 百濟本紀 3, 아신왕 7년 3월·9월. 왕이 일선에 나서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으나 기대하는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재위 14년만에 죽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함으로써 이후 백제는 대내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농민들의 생활고는 더욱 가중되었다. 아신왕 4년 백제는 고구려와 패수에서 전투를 할 때 8,00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동왕 8년에는 군역을 기피하는 농민들이 신라로 집단적으로 도망하는 사례도 속출하여 왕정의 지배기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 후 백제의 정치권은 지배세력의 대립과 갈등으로 혼미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전지왕의 즉위 초에 벌어진 왕위계승 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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