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2. 웅진천도와 중흥
  • 1) 동성왕의 활동
  • (2) 웅진시대의 정치적 변화상

(2) 웅진시대의 정치적 변화상

 무령왕 즉위 이전까지의 웅진시대에 나타난 정치적인 변화 가운데 먼저 개로왕 직계의 왕통이 단절됨으로 인하여 왕위계승상의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고구려가 한성을 침공할 때 개로왕을 비롯하여 왕후와 왕자들이 거의 피살되었던 것으로212)≪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20년 所引≪百濟記≫. 여겨지는데,≪新撰姓氏錄≫에 개로왕의 후예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개로왕 직계의 왕통이 단절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왕통이 끊어진 비상시국을 당하여 대통을 이을 만한 인물로는 왕제인 문주와 곤지 정도였다. 곤지는 개로왕 4년(458) 당시의 작호가 行征虜將軍左賢王으로서213)≪宋書≫권 97, 列傳 57, 百濟國. 작호를 받은 11명 중 서열이 제일 높았을 뿐 아니라 문주보다도 서열이 더 높았다. 그는 고구려의 직접적인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청병사로 활동하였고, 그 후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다지기 위해 왜에 파견된 상태였기 때문에(461)214)≪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5년 所引≪百濟新撰≫. 문주와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동성왕이나 무령왕의 즉위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215)후술하겠지만 동성왕과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었다고 한다. 웅진시대의 왕위계승은 한동안 부계직자의 계승원리에 따라 이루어지기보다는 일정 가계의 범위 안에 있는 왕족들이 유력한 귀족세력들과 정치적으로 제휴하여 왕위에 오르는 경향이 나타난다.≪일본서기≫에 이들 왕의 친족관계에 대해 여러 이설을 전하고 있는 것은216)≪日本書紀≫雄略天皇 5년조에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武烈天皇 4년조의≪百濟新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배다른 형인 것으로 서술하고 있어 웅진시대 왕계기록의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왕계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종래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는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으나,217)사반왕·계왕·아신왕이 이 경우에 속한다. 이 시기에는 삼근왕과 동성왕의 경우처럼 어린 나이에도 왕위를 계승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왕비족의 역할과 지위상에 있어서 점차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종래에는 왕족과 왕비족이 정치적으로 제휴하여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으며, 한성시대에 진씨와 해씨세력이 왕비족으로 큰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개로왕대부터 駙馬都尉 餘禮의 경우처럼218)≪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 왕족간에 근친혼을 하거나, 또 동성왕이 신라에 청혼하여 이벌찬 比智의 딸과 혼인을 맺는 것 등에서 219)≪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왕 15년 3월. 점차 왕비족과의 세력연합을 통한 기존의 정국운영 방식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엿보이고 있어서 주목된다.

 한편 웅진천도로 인해 귀족세력들의 지위와 위상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한성에 세력기반을 가졌던 귀족세력들이 일단 남천함에 따라 지배세력의 구성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웅진시대의 귀족세력은 진씨·해씨·목씨 등과 같은 구귀족세력과 금강유역의 토착 세력기반을 갖고 웅진천도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백씨·연씨·사씨 등과 같은 신진 귀족세력으로220)신진세력들의 경우 백씨는 공주, 사씨는 부여, 연씨는 온양일대에 각기 세력근거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李基白, 앞의 글, 10∼18쪽). 대별해 볼 수 있다. 웅진시대 초기에는 여전히 구귀족세력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천도로 인해 그 세력기반이 삭감된 상태였기 때문에 한성시대 후기에 나타나는 왕족-왕비족에 의한 권력 독점현상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웅진천도 이후 내부정정의 불안으로 인해 왕권의 귀족 통제력이 이완됨에 따라 종전의 공적인 권력체제인 상좌평제나 왕비족과의 세력연합을 통한 정치운영이 붕괴되고, 대신 물리적 지배수단인 병권을 장악한 실세귀족이 병관좌평직을 통해 정치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들 실세귀족은 권력기반을 넓히기 위해 재지의 유력한 신진세력들과 정치적으로 제휴하고자 하였다. 웅진시대 초기의 권신 해구와 신진세력인 은솔 燕信간에 이루어진 세력연합이 그 좋은 예라221)≪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삼근왕 2년 춘. 할 수 있다. 실세구족은 배타적으로 정치권력을 독점해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고, 심지어 그들의 이해관계와 배치되면 국왕마저 살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해구는 유력한 왕족인 내신좌평 곤지와 웅진천도의 주역인 목협만치를 제거하였고,222)木協滿致가 解仇와 권력을 다투다가 패퇴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477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山尾幸久,<日本書紀のなかの朝鮮>,≪日本と朝鮮の古代史≫, 三省堂選書 57, 1979, 136쪽). 한편 이 목협만치를 구이신왕대의 木滿致와 같은 인물로 보고 목만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으나(鈴木靖民,<木滿致と蘇我氏>,≪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50, 1981, 66∼69쪽), 양자의 활동시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명이인으로 보고 있다(盧重國, 앞의 책, 139쪽). 문주왕마저 살해한 다음 어린 삼근왕을 옹립하여 국정을 농단하였던 것이다. 실세귀족들은 형세가 불리해지면 자신의 세력 근거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삼근왕 때에 해구가 진씨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당하자 연합세력인 연신과 함께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실이 바라 그러한 예에 속한다. 해구의 세력이 몰락한 이후 동성왕대에는 해구의 난을 평정한 진씨세력의 眞老가 한동안 실세귀족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 19년(497)부터는 종래 세력을 누렸던 해씨와 진씨 대신에 신진세력들이 부상하고 있어서 신·구세력간의 어떤 변화의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즉 병관좌평 진로가 죽은 뒤 그 후임에는 신진세력인 달솔 燕突이 기용되었고, 숙위병사의 업무를 관장한 위사좌평 苩加는「왕의 左右」로 지칭될 정도로223)동성왕이 임류각을 짓고 거기서 밤새도록 환락을 같이한「左右」는 백씨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李基白, 앞의 글, 18쪽). 실세귀족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동성왕이 신진귀족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작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신진세력들은 구귀족들의 정치적 역할을 견제하였고, 왕은 신·구세력간의 대립과 조정을 통해 왕권을 보다 강화해 나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신진세력이 크게 중용되었다고 하더라도, 백가의 경우 그가 가진 관직이 종래와 같이 병관좌평이 아니고 숙위병사를 담당하는 위사좌평이었다는 점은 이제 왕권을 배경으로 국왕의 측근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백가가 가림성으로 전보될 정도로224)≪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3년 8월. 이들 신진세력은 왕권의 일정한 통제 아래 있었다. 이와 같이 동성왕대 이후 금강유역에 기반을 가진 신진세력이 크게 중용되었던 점은 구귀족세력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던 한성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제왕권의 지배력 행사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백제 세력권에 있던 탐라국과225)≪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0년 8월. 가야 제국이 한때 반기를 들어 이탈을 꾀한 적이 있었다. 즉 동성왕 원년 가라왕 荷知가 남제로부터「輔國將軍 本國王」으로 책봉을 받았는데,226)≪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 加羅國 建元 원년. 가라왕 荷知는 고령의 대가야왕으로 보고 있다(金泰植,≪加耶聯盟史≫, 一潮閣, 1993, 106쪽). 이는 가야 제국이 근초고왕대 이래로 백제와 일정한 부용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을227)千寬宇,<復元加耶史(中)>(≪文學과 知性≫29, 1977), 915∼918쪽. 감안해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도 이후 백제왕권의 지배력 행사에 한계가 드러난 셈이다. 또한 백제의 해상활동 및 중국과의 교섭도 고구려에 의해 빈번히 차단당하기도 하였다. 문주왕 2년과 동성왕 6년(484)에 중국으로 가던 사행이 고구려의 항로차단으로 인해 중단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제해권의 상실은 해상무역을 통한 왕정의 물적 기반의 약화를 가져왔고, 왕위계승에 따른 정통성 확보와 백제국가의 존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거듭된 자연재해의 발생과 무리한 토목공사는 농민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웅진시대의 水·旱災 등 자연재해와 토목관계 기사는 거의 동성왕대에 집중되고 있다.228)동성왕대 수·한재 등 자연재해가 발생한 시기는 4년 10월(대설), 13년 6월(수재), 동 7월(기근), 14년 4월(대풍), 19년 6월(수재), 21년(한재), 동 10월(역질), 23년 5월(한재)이다. 동성왕 13년과 21년에는 극심한 기근으로 대규모의 유민이 발생하여 신라와 고구려로 도망하는 사례가 있었다. 농민의 유리현상은 웅진시대에 들어와서 남천과 정치적 혼란, 전쟁, 역질, 자연재해 등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대규모 유민의 발생은 국가의 조세수취나 역역동원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왕정의 인적·물적인 기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대에는 그 동안 쇠미해진 왕권을 진작시키려는 의도에서 무리한 토목공사가 빈번하게 벌어졌는데, 이 또한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자연재해와 농민들의 과중한 역역부담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마련치 못한 상황에서 농민의 유리현상은 더욱 조장되었다. 동성왕 21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과 도적이 횡행하였으나 왕이 이재민에 대한 진휼책을 거부하는 바람에 한산인 2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왕궁 안에 호사스러운 임류각을 지어 그 주위에 못을 파고 기이한 새들을 기르게 하였는데,229)≪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3년 춘. 왕권을 과시하려는 데 급급한 나머지230)≪三國史記≫권 49, 列傳 9, 倉助利. 과중한 역역의 부담과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거듭된 자연재해의 발생과 진휼대책의 불비 및 무모한 토목공사의 실시 등으로 대규모의 유민들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이들이 왕권의 지배력을 이탈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왕정의 인적·물적인 기반을 축소시켜 왕권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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