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2. 웅진천도와 중흥
  • 1) 동성왕의 활동
  • (3) 동성왕의 왕권강화책과 신진세력의 등장

가. 동성왕의 즉위와 신진세력의 등장

 천도 후 한동안의 정정불안을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시켜 왕권의 전제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동성왕(479∼501) 때의 일이었다.≪삼국사기≫의 인물평에서 보듯이 동성왕은 과단성 있게 왕권강화정책을 추진하여 후일 성왕의 중흥정치의 밑바탕을 마련하였다.

 천도 직후 왕권의 기반이 취약한 문주왕을 시해한 다음 어린 삼근왕을 옹립하였던 권신 해구세력이 난을 일으켰으나 진씨세력인 덕솔 진로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어 삼근왕 역시 겨우 재위 3년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문주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는 삼근왕의 사촌이었고, 그다음 왕인 무령왕의 배다른 동생이었다.231)≪日本書紀≫권 16, 武烈天皇 4년 所引≪百濟新撰≫.≪일본서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왜에 체류하고 있다가 삼근왕이 죽자 왜군의 도움을 받아 백제로 건너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232)≪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23년 4월. 물론 이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동성왕의 즉위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도래씨족의 전승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를 옹립한 핵심세력은 해구의 난을 평정한 덕솔 진로로 대표되는 진씨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동성왕 4년에 해구의 난을 토평할 때 핵심적 역할을 한 덕솔 진로가 兵官佐平兼知內外兵馬事로 임명되어 동성왕 초반에 병권을 장악한 사실이 참고된다.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즉위하게 된 배경은 우선 개로왕과 문주왕의 직계왕통이 끊어진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고구려군의 갑작스런 침입에 따른 한성함락으로 인해 개로왕의 직계가 단절되었고,233)≪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20년 所引≪百濟記≫. 또 문주왕의 직계왕통도 어린 삼근왕이 일찍 죽음에 따라 거의 단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구가 어린 삼근왕을 옹립하여 군국정사의 일체를 농단했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진씨세력 역시 이러한 의도에서 정략적으로 어린 동성왕을 옹립하였을 가능성이 높다.234)李道學, 앞의 글, 16쪽. 동성왕은 왜에 오랫동안 체류했던 관계로 국내사정에 어두웠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력기반마저 미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왕은 그의 옹립에 관여했던 실세귀족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제어해 나아가면서 왕권강화를 이루어 나아가는가의 문제는 그에게 부여된 당면과제였다.

 동성왕이 추진한 일련의 왕권강화책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 지배세력의 구성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신진세력 연돌이 병관좌평으로 기용되는 동성왕 19년(497)을 기준으로 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의 경우≪삼국사기≫에 의하면 구귀족세력은 진로 이외에는 별다른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는 해구의 난을 토평하고 동성왕을 옹립한 공으로 병마권을 장악한 실세귀족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동성왕 6년부터는 신진세력인 사씨·백씨·연씨가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제에 사행을 떠났던 내법좌평 沙若思(동성왕 6년 7월), 새로이 위사좌평에 임명된 백가(동 8년 2월), 달솔이 된 연돌(동 12년 9월)이 보이고 있다. 그 밖에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동성왕 12년의 경우 7명의 수작 대상자는 왕족 餘氏가 3명, 都漢王 姐瑾, 중국식 성을 가진 외교사절 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동성왕 17년의 경우 沙氏 1, 贊氏 1, 解氏 1, 木氏 1, 중국식 성을 가진 외교사절 4명 모두 8명이 보이고 있다.235)≪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 百濟國.

 이와 같이 전기에는 왕족과 구귀족세력 진씨·해씨·목씨, 그리고 신진세력인 사씨·백씨·연씨 등의 지배세력이 다양한 분포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여기서 동성왕 이전에 비해서 백씨 등 새로운 성씨세력들이 현저하게 활동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왕족과 구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에 이제부터 신진세력이 가세하게 된 것이다. 신진세력이 대거 등용된 배경은 동성왕이 실세인 구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구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금강유역에 토착적 기반을 갖고 세력 확장을 꾀하던 신진세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신진세력의 등장은 지배층의 폭을 넓혀 왕권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백제사의 새로운 전기를 이루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성왕대 전기에는 아직도 웅진시대 초기의 관행인 실세귀족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으나, 금강유역의 신진세력들이 점차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데 따라 신·구세력간의 균형 위에서 왕권의 안정기반을 보다 강화하려 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한편 후기에는 신진세력들이 더욱 중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진로가 죽고난 이후 연돌을 병관좌평에 기용하였는데, 신진세력이 병마권을 담당하는 병관좌평에 임명된 것은 처음 있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숙위병사의 업무를 관장한 위사좌평 백가가「王의 左右」로 지목될 정도로236)李基白, 앞의 글, 18쪽. 성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사료상에 구귀족의 활동이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많은 신진세력이 중앙의 요직에 기용되고 있었다. 여기서 동성왕대 후기의 정국운영 방향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이제 신진세력이 병권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독주는 왕권의 강화와 안정기반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방해물이 되었다. 이에 동성왕은 신진세력의 비대화를 막기 위해 세력개편을 단행하였다. 沙井城을 축조하여 한솔 毗陁를 보내 진수케 하였으며,237)≪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0년 7월. 가림성을 축조하여 웅진에 세력기반을 가진 위사좌평 백가를 보내238)≪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3년 8월. 관장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동성왕의 견제책은 신진세력으로부터 큰 반발을 사게 되어 결국 왕은 백가세력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과감히 등용하여 새로운 지배세력 확립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으나, 신진세력을 과도하게 등용함으로써 오히려 신·구세력간의 대립과 조정 역할을 통한 왕권강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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