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2. 웅진천도와 중흥
  • 2) 무령왕의 활동
  • (1) 무령왕의 출자와 즉위과정

(1) 무령왕의 출자와 즉위과정

 백제 성왕대(523∼554)에 국가체제가 크게 정비되고 국력이 신장될 수 있었던 것은 전대의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왕권 전제화 시책에 힘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무령왕이 추진한 왕권강화책의 해명은 뒤이어 전개되는 사비시대 초기 성왕대 정치개혁의 성격을 밝혀주는 고리가 될 뿐 아니라 백제의 고대 중앙집권국가를 확립하는 과정을 해명해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령왕(501∼523)은 동성왕과 함께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서, 중흥의 영주인 성왕의 아버지이다. 그의 출생연대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이나 그의 출생설화를 담고 있는≪일본서기≫雄略天皇 5년조의 기사를 참고해 볼 때 개로왕 7년(461)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무령왕의 왕통계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 서로 다르게 서술되어 있어서 많은 이설과 혼란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웅진시대 백제왕계의 대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이는 웅진천도와 같은 어쩔 수 없는 비상시기를 거치면서 왕계 그 자체는 물론 그 관계 기록상의 혼란에서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러 사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웅진시대의 백제 왕통계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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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시대 백제왕위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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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문주왕은≪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다같이 개로왕의 아들로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문주왕이 역임했던 상좌평직에 왕제가 취임하는 것이 통례였고,250)李基白,<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27쪽. 또한≪신찬성씨록≫에 개로왕의 후예씨족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성함락으로 인해 개로왕의 직계가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 보면 양자의 관계는≪삼국사기≫보다 오히려≪일본서기≫의 기사에 따라251)≪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21년 3월의 割註. 동복의 아우 즉 형제관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곤지는≪삼국사기≫나≪일본서기≫에 모두 개로왕의 동생 또는 문주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결국 삼자는 형제관계임을 알 수 있다.

 다음 무령왕의 왕통계보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제기되고 있으나,<武寧王陵 誌石>이 발견됨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무령왕의 계보는 여러 사서에 의거해 볼 때 주로 세 가지설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성왕의 둘째 아들설이다. 이 설은≪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국내 사서에 서술되어 있는데, 웅진시대 백제의 왕통계보를 거의 부자상속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개로왕과 문주왕은 부자관계가 아니고 형제간이므로 이 서술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설을 따를 경우 동성왕과 무령왕 양자간의 연령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무령왕릉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은 삼근왕이나 동성왕보다 나이가 더 많으며,252)李道學,<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韓國史硏究≫45, 1984), 13∼14쪽. 또 왕위에 오를 때는 이미 40세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동성왕과 무령왕은 부자관계로 설정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설은 성립될 수 없다.≪梁書≫백제전에도 웅진시대 백제왕계가 부자상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중국인의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관에 따라 이 시기의 백제왕계를 일률적으로 기록한 데에 불과하다.253)坂元義種,≪百濟史の硏究≫(塙書房, 1978), 183쪽. 그러나 무령왕(隆)에 대해서는 즉위 사실만을 전하고 있을 뿐, 그의 왕통계보를 이례적으로 밝히지 않아서 왕위계승 과정상에 어떤 문제가 있었지 않았나 짐작하게 한다.254)이를 무령왕 즉위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시키는 견해가 있다(坂元義種, 위의 책, 183쪽). 즉 무령왕이 형이면서도 동성왕보다 늦게 즉위했다는 사실이 그의 왕위 즉위에 대한 정통성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255)무령왕 이후 사비시대 왕계는 거의 무령왕의 후손들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무령왕은 사비시대 왕실의 중시조적 위치에 있게 된다. 따라서 직계가 단절된 개로왕과 직결시켜 무령왕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의도에서 이 설화가 생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道學, 앞의 글, 1984, 14쪽).

 둘째, 개로왕의 아들설이다. 이는≪일본서기≫雄略天皇 5년조와 武烈天皇 4년조의 割註 기사에 보이는 설이다. 웅략천황 5년조 기사에는 무령왕의 출생담을 기술하고 있는데, 개로왕을 그의 생부로, 곤지를 의부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이러한 兄弟共妻說話는 너무 기괴하여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이 설화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령왕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배경에서 생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53) 즉 무령왕이 실제 곤지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개로왕을 생부로 내세워 개로왕의 혈통을 정통적으로 이어받았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의도에서 개로왕의 아들설이 생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설이다. 이는≪일본서기≫무열천황 4년조의 본문기사에 인용되어 있는≪百濟新撰≫에 서술되어 있는데,≪일본서기≫웅략천황 23년조의 동성왕 즉위기사를 참고하여 그의 출생연령을 산출한 다음<무령왕릉 지석>에 의해 밝혀진 무령왕의 나이와 비교하는 방법으로≪백제신찬≫의 설을 따르고 있다.256)李道學, 위의 글, 14쪽. 즉 동성왕이「幼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과 그가 곤지의 다섯 아들 중에서 둘째라고 명기한 사실에서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결국 무령왕이 동성왕의 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이 동성왕과 무령왕과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 설을 검토해 본 결과 무령왕의 계보는 결코 부자관계로 성립될 수 없으며,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다섯째 중의 첫째 아들이고 동성왕과는 배다른 형의 관계였음이 보다 설득력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무튼 무령왕은 동성왕을 살해한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성왕의 형이면서도 삼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아마 해구의 난을 토평한 진씨세력이 왜에 체류하고 있던 어린 동성왕을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무령왕을 기피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즉위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즉 동성왕 23년(501) 11월 백가가 자객을 보내 사비지역에서 사냥중이던 왕을 찌르게 하였고, 왕은 12월에 죽어 결국 무령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듬해 정월 백가는 加林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牛頭城에 이르러 한솔 解明을 시켜 이를 토평하게 하였다.

 여기서 백가가 왜 난을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백가로 대표되는 반왕세력이 동성왕을 시해한 다음 의도한 대로 차기 왕을 옹립하려 하였다. 해구나 진로가 어린 삼근왕을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한 사례가 참고된다. 당시 40세의 연만한 나이의 무령왕은 백가세력에 의해 기피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무령왕과 그의 지지세력이 동성왕의 시해에 대한 책임 추궁을 구실로 백가세력을 견제하고 나서자 형세가 불리해진 백가세력이 난을 일으켰으나257)무령왕이 동성왕의 시해사건에 배후세력으로 역할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盧重國,<百濟 武寧王代의 集權力 强化와 經濟基盤의 擴大>,≪百濟文化≫21, 1991, 12∼13쪽). 무령왕과 해명에 의해 평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령왕 즉위 초의 정변은 삼근왕대 해구의 난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다만 무령왕은 해구에 의해서 옹립된 나약한 삼근왕과는 달리 진두 지휘하면서 난을 진압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 점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셈이 된다.258)盧重國, 위의 글, 13쪽.

 그리고 이 난은 왕권과 신·구세력간의 역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난을 일으킨 백가는 유력한 신진세력이었고, 반면 이를 평정한 해명은 남천해 온 구귀족세력이었다. 동성왕은 구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거 기용한 금강유역의 신진세력에 의해 오히려 견제당하다가 시해되고만 것이다. 이 난의 평정을 계기로 한동안 정국운영에서 소외되어 있던 해씨세력과 같은 구귀족세력이 정치적 입지를 넓혀 나감으로써 비대해진 신진세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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