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2. 웅진천도와 중흥
  • 2) 무령왕의 활동
  • (2) 무령왕의 왕권안정을 위한 시책

가. 지배세력의 개편과 중앙집권력 강화

 무령왕은 불의의 천도와 이에 따른 정국의 혼란상을 직접 체험하면서 40세의 연만한 나이로 즉위하였다. 특히 동성왕의 무리한 전제권력 강화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통하였다. 따라서 무령왕은 동성왕대 신진세력 중심의 정국운영에 대한 반성에서 왕권안정의 실마리를 찾았던 듯하다. 그는 동성왕이 말년에 비대해진 신진세력을 견제하려다가 도리어 시해되었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세력이 증대된 신진세력의 권한을 일정하게 견제하면서 신·구세력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왕권의 안정을 추구해나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무령왕은 백가의 난을 평정한 것을 계기로 일단 왕권에 협조하는 일부 구귀족세력을 다시 등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가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구귀족 출신의 한솔 해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그런데 구귀족세력은 웅진시대 초기만큼 융성한 위세를 드러내지 못했던 듯하다. 사료에는 해씨세력인 해명과 목씨세력으로 木劦不麻甲背만259)≪日本書紀≫권 17, 繼禮天皇 10년 5월. 보이고 있을 뿐이다. 반면 신진세력은 즉위 초기에는 타격을 받았지만, 좌평 因友와 달솔 沙烏 등이 무령왕 후반기에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260)≪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무령왕 23년 2월. 구귀족과 함께 일정한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위 초에는 신·구세력보다도「骨族」으로 지칭되는261)≪日本書紀≫권 16, 武烈天皇 7년 4월. 왕족이 무령왕의 권력기반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262)盧重國, 앞의 글(1991), 17∼18쪽. 왕족의 중용은 귀족들의 세력신장을 견제하고 친정체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위 초에 왕족으로 보이는 달솔 優永이263)優氏를 왕족인 優台-沸流系로 보고 있다(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下)>,≪韓國學報≫3, 1976, 137쪽). 고구려를 공격한 일이 있었고, 또 지방통치를 위해 설치한 담로에264)≪梁書≫권 54, 列傳 48, 百濟.「子弟宗族」으로 지칭되는 왕족들로 임명되었던 점이 참고된다. 동성왕대에는 비대해진 신진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백가와 같은 신진세력을 지방의 거점지역에 전보시킨 것과는 달리 무령왕대에는 22개의 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담로제는 왕의 혈연집단에 의한 지방통치 방식으로서, 중앙의 왕권 확립과 각지에 산재되어 있던 독립적인 재지세력을 중앙의 통치질서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이러한 담로제의 실시는 지방에서의 묘제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5세기 후반의 재지수장묘로 알려진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과265)穴澤口禾光·馬目順一,<羅州潘南面古墳群>(≪古代學硏究≫70, 1973), 27∼29쪽. 중앙의 묘제인 나주 반남면 흥덕리의 석실분을 감안해 볼 때266)姜仁求,≪三國時代圓丘墓硏究≫(영남대출판부, 1984), 51∼52쪽. 영산강유역에서의 지배세력의 묘제가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전통적인 대형의 전용옹관묘에서 중앙의 석실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령왕이 담로제를 실시함으로써 점차 재지세력의 기반을 해체하면서 중앙의 집권력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고 관등급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확대된 신·구세력을 통제해 나갔다.≪삼국사기≫에는 무령왕대부터 직책이 없는 좌평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일본서기≫에서는 상좌평·중좌평·하좌평·대좌평 등으로 분화된 좌평의 명칭이 보인다.267)≪日本書紀≫에 上·中·下佐平이 欽明天皇 4년 12월(543)에 보이고 있고, 敏達天皇 12년 10월(583)에「太佐平」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좌평제를 포함한 어떤 정치조직의 변화가 있었음을268)동성왕 말년에 좌평제 개편을 포함한 정치개혁이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李鍾旭, 앞의 글 참조). 시사해 준다. 그 구체적인 개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동성왕대 이후 적극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신진세력들로 인해 지배층의 폭이 확대되자 국왕을 정점으로 이들을 서열화하고, 또한 정무를 분담하기 위해 기존의 좌평제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이 무려 41명이나 되는 왕자들에 대하여 좌평직과 식읍을 준 사례로 보아269)≪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7년 정월. 백제 말기에는 좌평이 숫적으로 증가하고 질적으로도 이전 시기와 다른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좌평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최고 합좌회의인 좌평회의에 참여하는 최고 신분으로서의 좌평신분을 지칭하는 경우와 행정관료로서의 기능을 가진 좌평이다. 후자의 경우 신라의 大等이 일정한 정무를 담당했을 경우 上大等, 典大等, 使大等, 仕大等 등으로 보임되는 것과 같이270)李基白,<上大等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96쪽.
盧鏞弼,<新羅眞興王代 大等의 分化와 그 政治的 背景>(≪歷史學報≫, 1990), 11쪽.
위의 좌평신분 중에서 일정한 정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령왕대에 개편된 좌평제는 귀족세력들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비시대 좌평제 운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편 무령왕은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민들을 귀농시키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왕정의 물적인 기반을 강화하여 나갔다. 무령왕 10년(510)에 실시한 제방의 축조와 정비 및 유민대책이 그것이다. 이는 백제의 경제적 터전이었던 한강유역의 상실 이후, 수리시설의 확충을 통해 금강유역권과 호남평야를 개발함으로써 경제력 기반을 넓히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그리고 천도 이후 야기된 정치적 혼란과 거듭된 수·한재와 역질로 인해 민이 유망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동성왕대에 가장 극심하였고, 무령왕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이어졌다.271)무령왕대의 자연재해는 2년 춘(역질), 6년 춘(역질)과 5월(가뭄·기근), 21년 5월(수재)와 8월(기근), 22년 10월(지진)에 보이고 있다. 유망민을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진휼책이 마련되었으나,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였다. 유민들은 국가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조세수취나 노동력 자원을 그만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대해 무령왕은 귀농정책을 추진하여 유망민들을 강제로 출신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백제를 이탈하여 한동안 가야지역에 거주했던 백제인들을 쇄환하여 이들을 귀농시킨 사례가272)≪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3년 2월. 참고된다. 이러한 유민의 귀농 조처는 곧 농업노동력의 확보와273)盧重國, 앞의 책, 164쪽. 아울러 조세 및 노동력 수취기반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천도 이후 야기된 사회적 혼란이 이 때에 이르러 거의 안정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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