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3.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재편
  • 1) 성왕의 사비천도

1) 성왕의 사비천도

 성왕은 재위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였는데, “사비(일명 소부리)로 수도를 옮겼다.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는 간략한 기록만이≪三國史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 기록만으로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알 수가 없다. 정작 궁금한 것은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이유와 배경, 그로 말미암은 정치세력간의 변동 등이다. 이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제는 동성왕·무령왕대를 거치면서 웅진천도 이후의 불안한 사회상황을 극복하여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를 보다 확충시키기 위하여 협착한 웅진을 벗어나 사비로 천도하였다는 것이다.284)李丙燾,≪韓國史≫古代篇(震檀學會, 1959), 436쪽. 둘쨰, 웅진시대에 연이어 일어난 왕의 피살과 반란 등의 내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285)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下)>(≪韓國學報≫3, 1976), 142쪽. 대세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견해는 전적으로 옳다고 하겠으나 단지 성왕의 사비천도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을 따름이다.286)성왕의 사비천도를 본격적으로 다룬 논고도 있다. 이 글에는 성왕의 사비천도에 관련된 이모저모가 잘 정리되어 있다(梁起錫,<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韓國古代史硏究≫4, 1991).

 여기서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으며, 개혁정치를 통한 국왕의 권력강화가 어떻게 가능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함께 웅진천도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귀족세력들이 어떻게 국왕의 세력속에 편제되어질 수 있었는가를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비천도는 동성왕 때부터 시도되었다고 한다. 동성왕은 여러 차례 사비로 사냥을 나갔다. 그가 여러 차례 전렵지로서 사비를 택했던 것은 그의 사비천도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87)盧重國,<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서울大 國史學科, 1978), 93∼94쪽. 이 때의 사비천도는 결국 동성왕이 苩加에 의해서 살해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사비천도가 일단 좌절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동성왕의 피살에서 기인되었지만, 보다 더 깊은 이유는 다른 방향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천도와 같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 백가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국왕을 살해하는 단순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다는 것은 얼핏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웅진시대 귀족세력의 동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한강유역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解氏와 眞氏는 웅진 부근의 토착세력이었던 燕氏와 苩氏의 세력과 각각 결탁하여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288)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金周成,≪百濟泗沘時代政治史硏究≫(全南大 博士學位論文, 1990), 34∼42쪽 참조. 이들 세력이 각각 대립하면서 동성왕의 사비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면, 沙氏와 木氏세력은 사비천도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던 세력으로 파악된다. 성왕의 사비천도 이후 사씨와 목씨가 좌평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즉 사씨와 목씨의 세력이 떨쳤던 것은 이들 세력이 사비천도에 적극 협조적이었던 까닭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289)이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金周成, 위의 글, 40∼42쪽 참조.

 동성왕은 이들 귀족들의 세력균형 위에서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균형 위에서의 안정 추구는 담력이 세고 무예가 뛰어난 동성왕에게는290)“동성왕은 …담력이 다른 사람보다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즉위년). 불만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동성왕은 이들 귀족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사비천도를 적극 추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동성왕의 사비천도의 추진은 이들 양대세력으로부터 반발을 초래하였을 것이며, 이들은 동성왕을 포악한 국왕으로 인식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291)≪百濟新撰≫에는 末多가 무도하여 백성에서 포악하게 대하니 국인이 함께 제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日本書紀≫권 16, 武烈天皇 4년).

 이러한 가운데 무령왕은 즉위하였다. 무령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대단히 급변하는 사회상황 속에서 성장하였다.292)李基白,<百濟史上의 武寧王>(≪武寧王陵≫, 文化財管理局, 1973), 64쪽. 특히 동성왕대에 20∼30대를 보낸 그는 백제의 정치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통하였을 것이며, 동성왕의 무리한 전제권력 강화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체험은 즉위 이후 그의 통치방식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무령왕은 먼저 사회안정을 추구했다. 제방을 튼튼히 하고 내외의 유식자를 다시 귀농시켰다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안정은 앞에서 살펴본 웅진시대의 귀족들의 정치세력을 인정한 기반 위에서 출발한 무령왕의 정치적인 역량에서 기인된 것이다.

 무령왕이 다져놓은 사회적인 안정 위에서 성왕이 즉위하였다. 성왕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 처리에 결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결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무령왕 때의 왕권강화처럼 귀족들의 세력균형 위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성왕의 즉위 이후 국왕과 귀족세력과의 갈등이 재현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으나, 성왕의 계율 강조와 예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추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왕 4년(526) 백제 율종의 시조인 謙益이 인도에서 5부율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때에 성왕은 국내의 고승 28인을 초청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하도록 하였으며, 曇旭·惠仁 두 사람이 저술한 律疏 36권에 자신이 직접 毘曇新律序를 썼다.293)李能和,≪朝鮮佛敎通史≫上(新文館, 1918), 33∼34쪽. 뿐만 아니라 성왕은 양으로부터 講禮博士 陸珝를 초청하였다.294)陸珝는 어려서부터 崔靈恩의 三禮義宗을 익혔는데, 梁나라 때에 백제국이 表를 올려 講禮博士를 구하자 詔를 내려 珝로 하여금 가게 했다(≪陳書≫권 33, 列傳 27, 儒林 鄭灼). 周一良은 “육후는 吳郡陸氏로 五經博士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가 싶고, 다만 어느 때에 백제에 왔었는가는 고찰할 수 없다. 육후에 관한 사적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사후의 자취는 살필 수 있다”고 했다(<百濟와 中國 南朝와의 관계에 대한 몇가지 考察>,≪百濟史의 比較硏究≫,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3, 226쪽).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위 사료를≪梁書≫백제전의 中大通 6년(534)과 大同 7년(541) 기사와≪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성왕 19년(541)의 기사와 연결시키고 있다. 즉 육후의 백제파견 시기를 성왕대로 파악하고 있다(李基東,<百濟國의 政治理念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69, 1990, 12쪽 및 梁起錫, 앞의 글, 1991, 83쪽 참고). 성왕은 불교의 계율과 유학의 예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이는 국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귀족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동성왕대와 마찬가지로 국왕과 대립되었던 귀족세력으로서 해씨와 연씨, 진씨와 백씨를 들 수 있다. 성왕은 이들 귀족세력으로부터 벗어나 강력한 전제권력을 형성하고자 했다. 동성왕이 사씨와 목씨세력과 결탁하여 사비천도를 기도했었던 것처럼, 성왕 역시 이들 귀족세력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사비천도를 단행하였다고 생각된다.

 또 성왕은 사비천도와 동시에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성왕이 사비천도와 함께 국호를 변경할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국내 귀족세력의 제압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대외관계 역시 이를 잘 도와주고 있었다. 어쩌면 사비천도가 동성왕 이후 성왕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였다는 것은 대외관계의 비중이 더 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웅진으로 천도하게끔 백제를 곤경에 빠뜨렸던 고구려는 안으로는 細群派와 추群派로 분열되어 심각한 정쟁이 계속되었으며, 밖으로는 신흥하고 있었던 돌궐족의 침입에 대비하여야만 했다.295)盧泰敦,<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韓國史硏究≫13, 1976). 또 성왕의 가야지역으로의 진출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5세기 후반에 형성된 대가야연맹은 백제의 곤경을 틈타 서진하여 한때 소백산맥을 넘어 阿莫山城까지 그 세력이 미치고 있었다.296)金泰植,<後期 加耶聯盟의 成長과 衰退>(≪韓國古代史論≫, 1988), 102쪽. 이에 대해 백제는 6세기 초반에 己汶·帶沙(하동)를 확보하였다. 530년대에는 진주를 넘어 마침내 安羅(함안)에 군사를 주둔시키기에 이르렀다.297)田中俊明,<王都로서의 泗沘城에 대한 豫備的考察>(≪百濟硏究≫21, 1990), 164쪽. 성공적인 가야진출은 성왕의 국내에서의 권위를 신장시켰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의 변화는 성왕으로 하여금 그만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나름의 개혁정치를 추구하게끔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