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3.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재편
  • 2) 정치체제의 개편
  • (1) 5방제의 실시

(1) 5방제의 실시

 성왕은 사비천도 이후 여러 가지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중앙의 행정관부인 22부사의 정립, 지방통치조직인 5方制의 실시, 16관등제의 확립 등이 그것이다. 먼저 5방제를 살펴보겠다.

 웅진시대까지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擔魯制였다. 담로제는 거점지배 방식으로 토착세력의 일반민에 대한 지배권이 대단히 컸었던 지배방식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담로체제하에서는 토착세력의 권한을 중앙의 통치권 속에 아직 완전히 편제 혹은 흡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298)金周成,<百濟 地方統治組織의 變化와 地方社會의 再編>(≪國史館論叢≫35, 1993), 30∼41쪽.

 사비천도 이후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담로체제에서 5방조직으로 바뀌게 되었다.299)노중국은 사비천도 이후 왕정의 물질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중앙집권 강화와 무령왕대에 새로 편입된 己汶·帶沙지역에 군령·성주의 설치, 백제가 망할 때의 5부-37군-200성에 대한 기록을 검토한 결과 5방조직은 사비천도 이후에 실시되었음을 논증하였다(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1988, 247∼250쪽). 5방은 중앙인 古沙城, 동방인 得安城, 남방인 久知下城,300)≪翰苑≫에는 卞城으로 되어 있다. 서방인 刀先城, 북방인 熊津城으로, 각 방에는 方領 1인·方佐 2인이 파견되어 있었다. 각 방은 6·7 내지 10여 개의 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5방조직의 역동적인 면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6세기에 들어와 빈번하게 이루어진 병력동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6세기 이래 삼국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에 병력을 어떻게 신속하게 동원할 것인가가 전쟁의 승패에 중요한 관건이었으므로, 병력동원 방식은 곧 중앙이 어떻게 지방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는가를 선명히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삼국사기≫백제본기에 빈번히 나오는 병력동원과 지휘관의 관등 사이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는 견해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301)金周成, 앞의 글(1993), 41∼43쪽. 즉 좌평이 거느린 병력은 대략 3만∼4만 명이었는데 비하여, 達率 혹은 將軍·左將이 거느린 병력은 대략 7·8천∼1만 명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각 방의 장관인 달솔 방령은 대략 1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동하였으며, 중앙의 좌평은 각 방의 병력을 수합하여 3∼4만 명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추구하기 위하여 방령이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했었던 7·8천∼1만 명의 병력은 어떻게 동원되었을까를 살펴보자.

 이에 각 방에 소속된 군에서 거느리고 있었던 병력이 주목된다. 각 군에는 대략 700·800∼1,2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302)金周成, 위의 글, 41∼45쪽. 그렇다면 각 방에서 동원된 1만여 명의 병력은 각 방에 소속된 6·7∼10여 개의 군에서 동원된 병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방령이 각 군에서 동원된 병력을 거느리고 전투에 출동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의 동원명령은 각 방을 통해서 각 군에 하달되지만, 병력동원은 역순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명령의 하달과 시행은 단지 병력동원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행정적인 면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는 지방통치조직과 군사조직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담로제하에서는 지방토착세력이 일반민을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면, 5방 조직하에서는 지방토착세력이 일반민에 대한 권한의 상당한 부분을 국가권력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담로제에서 5방제도로의 개편은 단순한 제도의 변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방사회의 재편에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은≪翰苑≫에 인용된 括地志에 어느 정도 드러난다. 즉 “城 가운데 戶口의 수가 많은 경우는 1,000인이고, 적은 경우는 7∼800인이며 城 가운데 많은 경우는 500家”라 하였는데, 戶와 家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또 전반부의 城과 후반부의 城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호를 구성하는 단위가 人과 家의 둘로 나뉜 이유 등 의문점이 상당히 많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료는 각 성의 가구수가 일정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5방제하에서 병력을 동원할 때 각급 지방행정단위 상호간에 큰 차이가 없었던 점도 전정호구에 의한 개편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군단위에서는 대략 700∼800 혹은 1,2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방단위에서는 대략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러하다. 이와 같이 방과 방, 군과 군 사이의 병력동원 규모에 차이가 극소화되고 있었던 것은 각급 행정단위의 호구전정의 균질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담로제하에서는 각 담로마다 각각 그 규모에 있어서 대단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담로의 전신은 일반적으로 삼한시대의 소국에서 유래된다고 한다. 삼한 소국 중 큰 것은 1만여 가가 넘었으나, 작은 것은 수천 가에 이르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각 담로의 규모는 대단한 차이가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담로제하에서는 전정호구의 균질화를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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