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4. 지배세력의 분열과 왕권의 약화
  • 2) 귀족세력의 분열

2) 귀족세력의 분열

 위덕왕 이후 혜왕·법왕의 뒤를 이어 약 50여 년 이상 국왕은 정치권력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한편 좌평은 국가의 중대사를 그들간의 합의를 통하여 결정하였으며, 그 결정사항을 22부사를 통하여 직접 시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대된 좌평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었던 세력은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했더라도 국왕 이외의 세력은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비록 형식적인 존재였던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대성8족의 끊임없는 견제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혜왕이 70여 세의 나이로 阿佐를 대신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이나 법왕이 즉위 3년만에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것도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록 대성8족 내부에서는 권력다툼이 있었을지라도 국왕과 대립되는 면에서는 그들간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국왕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성8족과는 결탁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대성8족 이외의 새로운 세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마침내 무왕은 아막산성전투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강화하였다. 무왕은 좌평의 관료화를 추진하면서 이를 통하여 22부사를 장악하였으며, 미륵사의 건립을 통하여 귀족세력과의 타협을 모색한 뒤에는 王興寺의 건립을 통하여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무왕의 권력강화가 무왕 개인의 힘만으로 가능하였을까. 아마도 무왕의 권력강화의 이면에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었던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세력이 바로 신진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327)대성8족과 또 대성8족이 아니면서 달솔 관등에 머무르고 만 사람들도 같은 시기에 정치활동을 했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신진귀족이라고 해서 정계에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진귀족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새롭게 접근했었던 인물들이라는 의미로써 신진귀족의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무왕의 권력강화를 뒷받침해 주었던 신진세력으로는 먼저 왕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왕은 당의 국학에 왕족의 자제를 입학시켜 유교정치사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었다.328)盧重國,<武王 및 義慈王代의 政治改革>(≪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1988), 209쪽. 위덕왕 이후 대부분의 왕족은 대성8족의 귀족세력에게 계속적인 견제를 받아 왔던 까닭에 왕실을 중심으로 강인한 결속력을 다졌을 것이다.329)물론 왕족이라고 해서 모두 친왕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자왕 2년에 저명한 40여 인과 함께 섬으로 귀양보내어진 제왕자와 그의 자매 등은 아무래도 반왕적인 성격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왕대의 정치적인 흐름으로 보아 대부분의 왕족을 친왕세력으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의자왕(641∼660)이 재위 17년에 왕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여 대성8족의 세력기반이었던 좌평을 무력화시켜 버렸다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왕 때 백제왕족으로서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으로 福信이 있다. 복신은 당나라로부터 당 태종의 璽書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무왕대에 15차례의330)申瀅植,<三國의 對外關係>(≪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315쪽. 입당사가 파견되지만 입당사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경우는 복신이 유일한 경우인데 그는 왕의 조카였다. 비록 15사례 중 하나의 경우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하여 추측컨대, 입당사 중 많은 사람이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무왕은 당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무왕은 당 태종에게 갑옷과 무기를 바치어 당의 고구려정벌을 유도하였던 듯하다.331)≪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37년·38년 12월·40년 10월. 이렇게 중요한 대당외교에 비중이 컸다는 것은 무왕의 왕권강화 과정에서 왕족의 세력이 적지 않은 힘이 되었던 것을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대성8족이 아니면서 달솔 관등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을 신진세력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달솔은 중앙에서는 5부의 책임자였으며, 지방에서는 5방의 장관직인 방령을 역임할 수 있다. 제2관등인 달솔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백제사회내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치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국왕과 결탁하면서 점차로 세력을 성장시켰을 것이다. 이를 階伯과 黑齒常之를 통하여 살펴보자.

階伯은 百濟 사람으로, 벼슬이 達率이 되었다(≪三國史記≫권 47, 列傳 7, 階伯).

 黑齒常之는 百濟 西部人이었다.(…) 百濟의 達率로서 風達郡將을 겸임하였다(≪三國史記≫권 44, 列傳 4, 黑齒常之).

 계백과 흑치상지는 모두 달솔이었다. 특히 최근에 발견된<흑치상지묘지명>에 의하면 그 가문의 경우 4대가 모두 달솔까지밖에 승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음 사료에 의하면 이들이 모두 대성8족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계백은 이름이 升이고 百濟同姓이었다. 관은 달솔이었으며, 의자왕 20년(660)에 싸우다 죽었다(≪大東地志≫권 5, 夫餘祠院).

 위의 사료를 보면 계백은 성씨였음을 알 수 있다.332)百濟同姓의 의미는 잘 알 수 없다. 혹 黑齒氏의 유래가 백제왕성인 扶餘氏에서 유래된 것처럼, 계백씨 역시 백제의 왕성에서 비롯되었던 까닭에 백제동성이라고 표기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편찬된≪大東地志≫의 기록이기 때문에 미심한 점이 남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없이 기술되었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백과 흑치상지는 신진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국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계백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전투에 임했을 때, 그는 이미 백제의 패전을 예견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처자가 노비로 전락하는 것이 싫어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5천 결사대에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도록 독려하였다.333)≪三國史記≫권 47, 列傳 7, 階伯. 이러한 계백의 충성심은 의자왕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평소에 의자왕과 계백 사이에 굳은 유대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흑치상지는 蘇定方에게 항복하였는데, 소정방이 의자왕을 하옥시키는 것을 보고 도망하여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켜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고 한다.334)≪三國史記≫권 44, 列傳 4, 黑齒常之. 의자왕과 함께 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에는 각각 大佐平과 大首領인 沙宅千福과 國辯成이 있었다.335)<唐平百濟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16쪽. 그런데 이들은 도망을 하지 않았다. 흑치상지가 의자왕을 하옥시키는 것을 보고 남달리 두려워하여 도망간 까닭은 의자왕과 그와의 특별한 관계에서 연유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즉 항복한 의자왕이 하옥당하는 것을 보고 평소 의자왕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까닭에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계백과 흑치상지와 같은 신진세력이 국왕과 결탁하려고 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가 궁금해진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은솔 이하는 정원이 없었던 반면에 좌평과 달솔만이 정원이 있었던 점이다. 좌평은 5인,336)佐平의 정원은 5인 혹은 6인이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5∼6인 정도였을 것이다(武田幸男,<六世紀における朝鮮三國の國家體制>,≪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4, 學生社, 1980, 60쪽). 달솔은 30인의 정원규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달솔에서 좌평으로 승진하려면 약 6:1의 치열한 경쟁을 치루어야만 했을 것이다.337)이것은 산술적인 계산이지 실제로는 30:1의 경쟁을 치루어야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佐平은 임기제가 아닌 종신제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좌평 중 한 명이 결원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보충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좌평이 정원제로 묶여 있는 한 달솔 중에서 좌평으로 승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누적되어 가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 때에 좌평으로 승진하였던 사람들은 대성8족의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338)金周成,<義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과 百濟滅亡>(≪百濟硏究≫19, 1988), 271쪽.
李基文,<百濟 黑齒常之父子 墓誌銘의 檢討>(≪韓國學報≫64, 1991), 167쪽.

 그렇다면 대성8족이 아니었던 까닭으로 좌평으로 승진하지 못하였던 달솔 관등을 지닌 사람들은 대성8족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위덕왕 즉위 이후에는 왕권은 대성8족과 줄곧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권이 결탁할 수 있었던 가장 적합한 세력은 백제사회에서 상당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대성8족의 세력에 눌려 정치권력의 핵심부에339)여기서 정치권력의 핵심부라고 표현한 것은 좌평 중심의 귀족회의체인 政事巖會議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던 까닭이다. 접근하지 못하였던 달솔 관등을 지닌 대성8족이 아닌 귀족들이었을 것이다.340)의자왕의 결탁세력을 이와 달리 파악한 견해가 있다(金壽泰,<百濟 義慈王代의 政治活動>,≪韓國古代史硏究≫5, 1992). 대성8족이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성8족 가운데서도 왕권강화에 계속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던 부류들과 그렇지 못한 부류들을 구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의자왕대 초기에 활동하였던 允忠·義直·殷相과 좌평 成忠·興首·任子들을 의자왕과 결탁했었던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계백과 흑치상지의 충성심은 그들이 지닌 유학사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흑치상지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春秋左氏傳≫·≪史記≫·≪漢書≫등의 역사서를 읽었다고 한다. 이것은 흑치상지만이 아니라 그와 동류의 귀족, 즉 계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서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의 유학사상의 특성을 추출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하지만 의자왕을 海東曾子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그들이라면,341)의자왕을 해동증자라고 불렀던 사람들이라면 의자왕에게 음황탐락과 음주를 그만두라고 간언하였다는 좌평 성충과 같은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의자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계백과 흑치상지와 같은 무리들이었을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충효사상에 특히 관심이 깊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계백과 흑치상지는 대성8족이 아니면서 달솔 관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왕과는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왔다고 할 수 있다. 국왕의 권력강화를 뒷받침해 주었던 덕분으로 점차 그 세력이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사료는 이들 세력의 성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고된다.

하물며 밖으로는 直臣을 버리고, 안으로는 妖婦를 믿었다. 그리하여 형벌이 미치는 바는 오직 忠良이었으며, 寵任이 더 해지는 바는 반드시 謟幸이었다(<唐平百濟碑>,≪朝鮮金石總覽≫上, 3쪽).

 이 비문은 백제가 멸망한 해인 의자왕 20년(660)에 지어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日本書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342)≪日本書紀≫권 26, 齊明天皇 6년. 君大夫人 妖女가 무도하여, 국권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현량을 주살한 까닭에 멸망의 화를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비록 당에 의해서 기록된 비문이기는 하지만, 이 사료는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사료에서는 형벌이 미치는「忠良」의 무리와 총임이 더해가고 있었던「謟幸」의 무리를 대구로 사용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서로 대비될 수 있는「충량」의 무리와「도행」의 무리가 있었다고 하겠다. 당은 백제의 침공을 이웃 나라인 신라와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않았던 의자왕의 군사행동에 그 책임을 돌리려고 하였다.343)의자왕 11년에 당 고종이 보낸 글에 의하면 백제가 신라의 침공을 그치지 않는다면 결전을 치룰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당의 입장에서 볼 때「충량」의 무리는 의자왕의 군사행동을 견제하려고 했었던 세력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의 행동을 견제하다가 형벌이 미쳤던 세력은 의자왕에게 간언을 했다가 옥에 갇혀 죽음을 당했던 좌평 성충으로 대표되는 대성8족의 무리를 충량의 무리로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왕의 총애가 더해 갔었던「도행」의 무리는 의자왕과 뜻을 같이 했던 세력을 의미할 것이다. 계백과 흑치상지와 같은 신진세력을「도행」의 무리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신진세력의 세력이 국왕의 권력강화를 배경으로 마침내 대성8족의 세력과 대립할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살펴보려고 한다면 의자왕대에 보이는 심상치 않은 정계 동향은 주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성충·임자·흥수 모두 좌평이었다. 성충은 의자왕의 음황을 간언하였다가 옥에 갇혀 죽었으며,344)≪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6년 3월. 임자는 백제의 국사를 전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金庾信과 내통하였다고 한다.345)≪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中. 그리고 대좌평이었던 沙宅智積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奈祇城으로 퇴거하였다.346)黃壽永 編,<百濟沙宅智積碑>(≪韓國金石遺文≫, 一志社, 1976), 53쪽. 흥수 역시 죄를 얻어 古馬旀知縣으로부터 유배되었다.347)≪三國遺事≫권 1, 紀異 1, 太宗 春秋公.

 좌평 관등에 있던 인물들이 대략 의자왕 15년을 전후하여 크게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좌평 임자가 김유신과 내통한 해는 의자왕 15년이며, 성충이 간언한 해는 동 16년이다. 대좌평 사택지적이 퇴거한 갑인년은 의자왕 1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348)洪思俊,<百濟 沙宅智積碑에 대하여>(≪歷史學報≫6, 1954), 256쪽. 좌평 흥수가 유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좌평 흥수가 여러 해 동안 고마며지현에서 귀양생활을 했었다거나,349)≪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0년 6월. 나당연합군의 방어책에 대하여 성충의 견해와 비슷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성충의 극간에 연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좌평 흥수가 유배된 시기는 의자왕 15년을 전후로 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의자왕 15년을 전후하여 크게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았던 것은 아무래도 의자왕과의 정치적 대립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성충이 의자왕에게 간언하다 투옥되었다거나, 임자가 김유신과 내통하였다는 점은 이를 잘 반영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대좌평 사택지적이 정치적인 관계에 연루되어 퇴거하였다고 추정되는 것은 이를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다.350)盧重國,<泗沘時代 百濟 支配體制의 變遷>(≪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72쪽. 뿐만 아니라 흥수가 성충의 간언에 연루되어 귀양보내졌다는 앞의 추측이 옳다면 역시 의자왕과의 정치적 대립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51)金壽泰, 앞의 글, 66쪽에서는 좌평 성충과 흥수·임자 역시 의자왕의 권력강화를 도왔던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의자왕과 대립하였다는 말은 의자왕과 결탁하였던 계백과 흑치상지로 대표되는 신진세력과 대립하였다는 말로 해석해도 무관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왕 15년을 전후로 하여 대성8족을 중심으로 한 좌평층에 심각한 정치적 동요가 일어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유명한 의자왕 2년(642)의 정치변동은 이의 해명에 큰 도움이 된다. 이 때에 의자왕 아우의 아들인 翹岐 및 그의 자매 4인, 그리고 내좌평 岐味 등 고명한 40여 인이 섬으로 귀양보내어졌다. 이 때 귀양간 고명한 40여 인의 신원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40여 명 중에는 왕족 및 내좌평 기미와 같은 고위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들이 백제의 유력한 귀족출신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의자왕의 즉위 초기에 취했던 왕권확립을 위한 하나의 조치로서 이 사건을 파악해 볼 때 왕족을 제외한 고명한 40여 인은 아마도 대성8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 이후 대성8족은 의자왕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352)물론 대성8족 내부에서도 각 성씨끼리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왕권과 대성8족의 대립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만큼 그 내부의 대립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왕권에 대항하는 측면에서의 대성8족은 똑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의자왕 9년에 좌평 正福이 싸움 한 번 변변히 하지 않은 채 김유신에게 내항하였다는 점은353)≪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中.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의자왕 15년에 이르러 마침내 대성8족의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義慈)王은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 30여 성을 쳐부수었다. 신라왕 金春秋가 사신을 당에 보내어 表를 올려 백제와 고구려·말갈이 우리의 북계 30여 성을 점령하였다고 하였다(≪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5년 8월).354)이 사료는≪三國史記≫百濟本紀의 내용이다. 그런데 같은 책 新羅本紀·高句麗本紀와≪資治通鑑≫권 199, 唐紀 15, 高宗 上에 의하면 같은 해 정월로 되어 있다. 아마 정월이 맞는 듯 싶다.

 義慈王 15년에 백제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계 30여 성을 쳐부수었다. 신라의 북계 30여 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의 북계라는 명칭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지금의 한강유역 아니면 강원도지역일 것이다. 신라는 북계 30여 성을 빼앗기자 즉시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가 이같이 기민한 반응을 보였던 점으로 보아 북계 30여 성의 위치는 강원도지역이라기 보다는 한강유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신라의 한강유역 통치 중심지인 唐項城을 위협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을 것이다. 의자왕이 신라 북계 30여 성을 쳐부수었다는 것은 왕권확립에 대단히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한다. 한강유역을 재탈환하기 위한 관산성전투에서 패한 이후 왕권은 대성8족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왔다. 이러한 까닭에 왕권을 확립해 가던 무왕과 의자왕은 한강유역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무왕과 의자왕은 각각 한 차례씩 한강유역 정벌을 시도하였다.355)≪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28년 7월 및 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3년 11월. 무왕과 의자왕이 한강유역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신라가 재빨리 당에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두 차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왕실측의 한강유역에 대한 집요한 집념을 읽어 볼 수 있다.356)무왕 말부터 의자왕대에 걸쳐 백제는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계속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의자왕 2년에는 한때 미후성 등 40여 성을 공략한 적도 있었다(≪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년 7월). 그러나 무왕과 의자왕의 최종 목표는 신라의 서쪽 변경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한강유역의 회복이 목표였다고 하겠다.

 그것은 다름아닌 신라의 당과의 교통로를 차단함으로써 신라를 고립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관산성전투에서 패한 이후 대성8족으로부터 계속적인 견제를 받아왔던 왕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명분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자왕은 신라의 북계 30여 성을 차지함으로써 대성8족이 왕권을 견제하려는 명분을 제거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로 말미암아 좌평의 정치적 지위도 크게 변화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다음의 기록을 검토해 봄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다.

7월 9일 庾信 등이 진군하여 黃山벌에 이르렀다. 백제장군 階伯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진영을 셋이나 베풀고 신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3군이 이를 보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대패하여,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忠常과 常永 등 20여 인은 사로잡혔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위의 내용은 의자왕 20년 황산벌전투의 상황이다. 달솔 계백이 그 전투의 총지휘자로 되어 있다. 좌평 충상과 상영357)여기에 보이는 좌평 상영은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한 전략회의에 참여한 달솔 상영과 같은 인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대성8족이 아닌 인물로 생각되는 달솔 상영이 좌평으로 승진한 셈이 된다. 의자왕 17년 이후에는 좌평 관등이 대성8족의 전유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좌평의 정치적 지위가 낮아졌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하겠다.이 달솔 계백의 참모나 그의 단위부대의 장군으로 참전하였다고 생각된다. 좌평이 달솔의 지휘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좌평을 역임하였던 대성8족의 정치적 세력이 달솔을 역임하였던 신진세력의 그것에 비하여 점차 열세한 위치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에 의자왕 말기에 이르러 대성8족과 신진세력은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당해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급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좌평층과 달솔층이 각각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쳐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대성8족과 신진세력과의 정치적 대립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것은 백제 국내의 사회 불안을 고조시켰으며, 대외항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맞아 계백의 황산벌전투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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