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2) 대중관계의 전개
  • (1) 한성시대

(1) 한성시대

 백제가 한강유역의 한성을 중심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동북쪽에 위치했던 말갈,378)兪元載,<三國史記 僞靺鞨考>(≪史學硏究≫29, 韓國史學會, 1979). 북쪽의 낙랑·대방, 그리고 남쪽의 마한세력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현안문제였다. 이들 세력을 극복하고 한반도 서남부의 대표적 세력으로 대두하여 중국의 진과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대부터였다. 그 후 백제와 중국 사이에는 조공·봉책·견사·청구 및 허락·전쟁·회맹 등의 관계가 지속되었다. 중국은 그들 나름대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지배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백제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백제와 중국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상호관계로서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각 시기마다 다른 변화상을 보인다. 이 변화상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대중관계가 시작된 근초고왕 27년부터 고구려의 남침에 의하여 백제가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했던 시기까지의 대중관계를 정리하면 앞의<표 1>과 같다.

번호 연 도 내 용 삼 국 사 기 중 국 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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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진)
봉책(진)
조공(진)
조공(진)
조공(진)
봉책(진)
조공(진)
봉책(진)
봉책(송)
조공(송)
견사(송)
조공(송)
조공(송)
봉책(송)
조공(송)
조공(송)
조공(송)
기타청구(송)
허가(송)
관작청구(송)
봉책(송)
관작청구(송)
봉책(송)
조공(송)
조공(송)
조공(송)
기타청구(위)
견사(위)
견사(위)
근초고왕 27년

근초고왕 28년
근구수왕 5년
침류왕 원년

전지왕 2년
전지왕 12년



비유왕 3년
비유왕 4년
비유왕 4년
비유왕 14년











개로왕 18년
개로왕 ?년
함안 2년
함안 2년


태원 9년
태원 11년

의희 12년
영초 1년
경평 2년
원가 2년
원가 6년
원가 7년
원가 7년
원가 17년
원가 20년
원가 27년
원가 27년
원가 27년
대명 1년
대명 1년
대명 2년
대명 2년
대명 7년
태시 3년
태시 7년
연흥 2년
연흥 ?년
연흥 5년
晋 書
晋 書


晋 書
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宋 書
冊府元龜
宋 書
宋 書
魏 書
魏 書
魏 書

<표 1>한성시대의 대중관계

 처음으로 대중관계를 갖게 된 진과는 모두 8회에 이르는 교류가 있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대중관계의 내용은 조공과 봉책으로 일관되고 있다. 처음으로 근초고왕이 진에 조공하고 간문제가 근초고왕을「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봉책한 이래, 이러한 조공과 봉책의 외교관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처음으로 근초고왕에게 주어진 봉책명은「진동장군영낙랑태수」였다. 이를 통하여 당시 진이 조공을 시작한 백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즉 진은 백제에 대하여 이전의 왕조로부터 전통적인 관념인 낙랑의 범주 속에서 인식하였으며, 동시대적인 관념인 백제로 독립하여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379)兪元載,<中國正史의 百濟觀>(≪韓國古代史硏究≫6, 1992), 183∼191쪽. 그러나 그 뒤 餘暉와 餘映에 대한 봉책에서는 그 실체를 인정하고 있었다.380)兪元載, 위의 글, 183∼186쪽. 이처럼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조공과 봉책은 당시 중국의 남북조시대와 한반도의 삼국정립기에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외교적 행위였던 것이다.

 중국에서 진을 대신하여 송이 서게 되니 백제의 대중관계 또한 송과 이루어지게 되었고, 송은 진이 하던 대로 백제와의 관계를 지속시켰다. 즉 백제의 전지왕을「鎭東將軍」에서「鎭東大將軍」으로 봉책하여 진대의 외교관계를 계승하였다. 그 후 계속된 조공과 봉책의 관례적인 관계에서 백제의 비유왕은 송에 易林·式占·腰弩 등을 요청하였으며 송 태조는 이에 응했던 것이다.381)≪宋書≫권 97, 列傳 57, 百濟國傳, 元嘉 27년. 이는 조공과 봉책의 형식적인 관계보다는 오히려 백제가 바라는 강렬한 문화적 욕구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으며, 당시 백제의 적극적인 대중관계의 일면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개로왕 이전의 봉책관계란 백제의 왕에게 국한된 형태였으나, 개로왕대에 이르게 되면 송에 사신을 보내어 신하들에게까지 관작을 요청하고 있다. 즉 餘紀 등 11인에 대한 관작 청구가 그것이다.382)≪宋書≫권 97, 列傳 57, 百濟國傳, 大明 2년.

 이들 11인은 모두 왕의 측근들로 보이는데383)梁起錫,≪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123∼124쪽. 봉책관계를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요청하였다는 것은 바로 심화된 대중관계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종래 백제의 대중관계는 진·송 등 남조와의 교류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개로왕대에 이르러 이러한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북조인 魏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가 남조 일변도의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북조인 북위와도 교류하려고 하였던 것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연유한다. 이 때 고구려는 장수왕대로서 그의 남하에 따른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백제는 이러한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북위와 연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개로왕 18년(472) 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餘禮와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張茂 등을 북위에 보내어 고구려의 잘못을 열거하고 군대를 청하였으나384)≪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 延興 2년. 북위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결과 백제와 북위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임으로써 백제의 한성시대는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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