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2) 대중관계의 전개
  • (2) 웅진시대

(2) 웅진시대

 백제는 장수왕의 남침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음을 당하자 문주왕 원년(475)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한성은 약 5세기간에 걸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도읍지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침입에 의한 갑작스러운 천도에 따라 한성지방에 두었던 모든 기반을 잃게 되었다. 이처럼 문주가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 가운데는 고구려의 세력을 저지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대중관계 및 대왜관계상 필요한 금강 중심의 수로 확보라는 점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385)兪元載,<百濟熊津城硏究>(≪國史館論叢≫45, 1993), 85∼89쪽. 따라서 웅진천도 이후의 대중관계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되었다.

 웅진천도 후 다시 사비로 천도하기까지의 대중관계를 정리하면 다음의<표 2>와 같다.

번호 연 도 내 용 삼 국 사 기 중 국 사 서
기 년 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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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
495
502
512
521
521
522
524
534
조공(송)
조공(남제)
봉책(남제)
기타청구(남제)
허가(남제)
조공(남제)
조공(남제)
전쟁(위)
전쟁(위)
관작청구(남제)
봉책(남제)
봉책(남제)
관작청구(남제)
봉책(남제)
봉책(양)
조공(양)
조공(양)
봉책(양)
조공(양)
봉책(양)
조공(양)
문주왕 2년


동성왕 6년
동성왕 6년
동성왕 6년
동성왕 8년
동성왕 10년







무령왕 12년
무령왕 21년
무령왕 21년

성왕 2년
성왕 12년

건원 2년
건원 2년





영명 8년
영명 8년
영명 8년
영명 8년
건무 2년
건무 2년
천감 1년
천감 11년
보통 2년
보통 2년
보통 3년
보통 5년
중대통 6년

南 史
南 史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南 齊 書
梁 書
梁 書
梁 書
梁 書
冊府元龜
梁 書
梁 書

<표 2>웅진시대의 대중관계

 문주왕 2년(476)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국제적인 연계를 위하여 다시 송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들의 해로를 막은 까닭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386)≪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2년 3월. 이와 같이 웅진시대 초기에는 고구려가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해로가 막혀버리자 중국에는 도달하지도 못하고 돌아온 경우가 동성왕대에도 있었다.387)≪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6년 7월. 웅진천도 이후 백제의 대중관계는 고구려의 해상권 제압으로 매우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 전하는 웅진시기의 대중관계에 관한 기록은 많은 차이가 있다. 상당부분의 대중관계 내용 가운데 중국사서에 기록된 내용들이≪삼국사기≫에 빠져 있으며,≪삼국사기≫의 기록들이 중국사서에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시기에도 보이지만 웅진도읍기에 두드러진다. 그것이 어떠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백제가 웅진천도 후 내정의 불안과 국제적 고립으로 내외적으로 가장 어려웠다는 점과, 고구려에 의하여 제해권까지 위협을 받고 있어 대중관계의 항로가 완전히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상황의 일단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대에는 남제와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즉 고구려의 계속되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남제로부터 봉책을 받고 있었으며, 조공과 청구 등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에 의한 대중항로의 차단에서 비롯되었던 어려움이 어느 정도 극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중관계는 주로 백제에서는 남제가 조공하거나 청구하는 형태였고, 남제에서는 백제가 청구한 관작 등에 대하여 봉책하는 형태였다. 당시 웅진천도 이후 어려웠던 상황에서 백제가 대중관계를 추진한 목적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기간 동안에 주목되는 사실은 갑작스럽게 백제와 위가 전쟁하였다는 것이다. 즉≪삼국사기≫동성왕 10년(488)조에 위가 백제를 침입하였다가 백제에게 패했다는 것이다.388)≪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10년. 이 내용은≪송서≫에서 비롯되어 중국 정사의 남조계통 사서에만 전하고 있는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관한 방증자료로서 자주 인용되는 것이기도 하다.389)김세익,<료서지방에 있었던 백제군에 대하여>(≪력사과학≫1967-3), 17쪽.≪삼국사기≫의 이러한 내용은≪남제서≫에 기재된「魏虜」와의 전쟁기록과 같은 것이다.390)≪南齊書≫권 58, 列傳 39, 百濟國.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기년상 2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위나라 군사의 백제침략에 관한 기록은 침략 당사국으로서 위의 정사인≪魏書≫에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의 역사서임에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주목된다. 다만≪資治通鑑≫에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齊 永明 6년(488)의 사실로 기록되어391)≪資治通鑑≫권 137, 齊紀 2, 武帝 永明 6년.≪삼국사기≫와 같은 기년으로 되어 있다. 기년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로 되어 있어≪삼국사기≫의 내용과 문구의 구성에 있어서도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삼국사기≫동성왕 10년에 보이는 위와의 전쟁기록은≪삼국사기≫편찬 이전의 백제자료로부터 전해진 내용은 아닌 듯하며,≪자치통감≫의 내용이≪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동성왕기에 편입된 것 같다.392)兪元載,<中國正史 百濟傳硏究>(≪韓國上古史學報≫4, 1990), 271쪽. 이러한 추측을 더욱 굳게 만드는 것은≪삼국사기≫동성왕대의 기록이 기술의 형식은 모두 사건의 발생년도·계절·월 등을 예외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오직 위와의 전쟁기록이 있는 동성왕 10년기에만 계절이나 발생월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계절이나 월의 내용이 없는≪자치통감≫의 내용을≪삼국사기≫의 기년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일 것으로 판단된다.393)兪元載,<魏虜의 百濟侵入記事>(≪百濟硏究≫23, 1992), 94쪽.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이 전하는「魏虜」와의 전쟁기록은 위와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바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해석된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이처럼 위와의 전쟁으로 기록하게 된 것은 남북조시대의 특수상황에서 비롯된≪남제서≫찬자의 역사인식에 의한 것이었다.394)兪元載, 위의 글, 83∼94쪽.≪남제서≫의 이러한 내용은 기년이 모호하게 기록된 관계로≪자치통감≫에서는 제 영명 6년에 기록되었고, 또 이를 그대로≪삼국사기≫에서 취했던 것이다. 동성왕은 천도 이후 계속되었던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 고구려를 무찌르고, 이 때 전공을 세운 사람에 대해 남제에 관작을 청구하여 허락받았던 것인데, 이러한 내용을 바로≪남제서≫가 전하고 있다.395)兪元載, 위의 글, 94쪽. 그러므로 웅진시대 특히 동성왕대까지의 대중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사서와≪삼국사기≫기록에 보이는 차이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중국의 남북조시대로서 남조와 북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특수한 정세였으므로 이러한 중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초래된 역사인식과 함께 사료의 철저한 분석과 비판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대중관계에 대한 기록의 혼란이 무령왕대에 이르면 보이지 않는다. 무령왕대의 대중관계 기록은 중국사서나≪삼국사기≫에 모두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무령왕 12년(512)에 사신을 양에 보내었다. 동 21년에는 다시 양에 조공하고 표문을 보내어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비로소 우호를 통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396)≪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무령왕 21년. 이 때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받았던 어려움이 극복되었음을 양에 알렸고, 그러자 양 고조는 무령왕을 봉책하였던 것이다.

行都督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 餘隆은 바다 밖에서 변방을 지키며 멀리서 직공의 예를 닦아 그 충성심이 환히 드러났다. 짐이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전례에 따라 영예로운 관직을 내리노니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 百濟王의 관직을 허락한다(≪梁書≫권 54, 列傳 48, 諸夷 東夷列傳 百濟).

 양에서도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무령왕에게 寧東大將軍의 봉책을 행하였던 것이다. 무령왕대의 이러한 대중외교에 관한 자료들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잃고 웅진천도를 단행한 후에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웅진천도 후 고구려가 제해권을 장악한 데 따른 대중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해권을 재확보함으로써 정상적인 대중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 사서의 내용과≪삼국사기≫의 내용이 그 이전과 달리 서로 일치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대중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무령왕의 이러한 업적에 의해 백제는 고구려가 차지하는 대중관계에서의 국제적 지위에 대항하여 대등한 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성왕은 즉위한 이듬해 양으로부터 봉책을 받고, 성왕 6년(528)에는 조공을 하였다. 그 후 성왕 16년에 이르러 백제는 마침내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지형적으로 협소하여 도성으로서 적당하지 못하던 웅진에서 다시 사비로 천도를 단행케 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침략에 의해 이루어진 웅진천도 후 63년간의 웅진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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