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2) 대중관계의 전개
  • (3) 사비시대

(3) 사비시대

 성왕 16년(538) 봄, 백제는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南扶餘로 고쳤다.≪삼국사기≫에는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기 전의 준비계획 등에 대하여 실제적인 내용들이 전하지 않고 있다.397)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166쪽에서 동성왕의 사비지역 사냥을 백제의 사비천도와 연계시켜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존하는 사비도성의 나성·궁궐지·도로 등의 정연한 도성 유적을 통해서 천도 이전에도 상당한 준비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웅진은 고구려세력을 피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서는 훌륭한 도읍지였으나, 협소하고 궁벽져 재도약하려는 백제의 도읍지로서는 적합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상당기간의 준비를 거쳐 사비로 천도하였던 듯하다. 백제의 사비천도는 국호를 남부여라 개칭할 정도로 의욕에 찬 천도였다. 그러므로 사비시대의 대중관계 또한 이에 짝하여 상당히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표 3>과 같다.

번호 연 도 내 용 삼 국 사 기 중 국 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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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책(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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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북제)
조공(진)
조공(주)
조공(주)
조공(수)
봉책(수)
조공(수)
조공(진)
조공(진)
조공(수)
견사(수)
조공(수)
기타청구(수)
불허(수)
조공(수)
조공(수)
기타청구(수)
허가(수)
조공(수)
조공(수)
기타청구(수)
견사(수)
견사(수)
조공(수)
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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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책(당)
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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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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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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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사(당)
견사(당)
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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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조공(당)
견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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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작청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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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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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19년
성왕 19년
성왕 19년
성왕 27년

위덕왕 14년

위덕왕 17년
위덕왕 18년
위덕왕 19년
위덕왕 24년
위덕왕 24년
위덕왕 25년
위덕왕 28년
위덕왕 28년
위덕왕 29년
위덕왕 31년
위덕왕 33년
위덕왕 36년
위덕왕 36년
위덕왕 45년
위덕왕 45년
위덕왕 45년
무왕 8년
무왕 8년
무왕 8년
무왕 8년
무왕 9년
무왕 12년
무왕 12년
무왕 12년
무왕 13년

무왕 22년
무왕 25년
무왕 25년

무왕 25년

무왕 26년
무왕 27년
무왕 27년
무왕 27년
무왕 28년
무왕 28년
무왕 28년
무왕 30년
무왕 32년
무왕 33년

무왕 37년
무왕 38년
무왕 38년

무왕 40년
무왕 41년
무왕 42년
의자왕 1년
의자왕 1년
의자왕 1년
의자왕 2년
의자왕 3년
의자왕 4년
의자왕 4년
의자왕 4년

의자왕 11년
의자왕 11년
의자왕 12년
대동 7년
대동 7년
대동 7년
대청 3년
천가 3년
광대 1년
천통 3년
무평 1년
무평 2년
무평 3년
태건 9년
건덕 6년
선정 1년
개황 1년
개황 1년
개황 2년
지덕 2년
지덕 4년
개황 9년
개황 9년
개황 18년
개황 18년
개황 18년
대업 3년
대업 3년
대업 3년
대업 3년
대업 4년
대업 7년
대업 7년
대업 7년
대업 8년
대업 10년
무덕 4년
무덕 7년
무덕 7년
무덕 7년

무덕 7년


무덕 9년
무덕 9년
정관 1년
정관 1년
정관 1년



정관 9년

정관 11년
정관 11년
정관 12년


정관 15년
정관 15년
정관 15년




정관 18년

정관 19년
영휘 2년
영휘 2년
梁 書
梁 書
梁 書
梁 書
陳 書
陳 書
北 齊 書
北 齊 書
北 齊 書
北 齊 書
陳 書
周 書
周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陳 書
陳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隋 書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冊府元龜

冊府元龜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冊府元龜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舊 唐 書

冊府元龜
舊 唐 書
舊 唐 書

<표 3>사비시대의 대중관계

 백제는 사비천도 후 성왕 19년(541) 양에 조공하고, 毛詩博士·涅槃等經義·工匠·畵師 등을 요청하니 양에서 이에 응해 주었다.398)≪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성왕 19년. 이는 천도 후 성왕이 가졌던 문화중흥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대에 이르면 기존의 백제의 대중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백제는 종래 남조와 일관하게 유지하던 대중관계에서 벗어나 북조와도 그 관계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위덕왕 14년(567)에는 남조인 陳에 조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다시 북조인 北齊에도 조공하였다. 그 뒤 17년에는 북제에서 위덕왕을 ‘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399)≪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위덕왕 17년.에 봉책하였으며, 다시 이어 18년에는 ‘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400)≪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위덕왕 18년.에 봉책하였다. 뿐만 아니라 19년에는 북제에 또 조공하였다. 이처럼 위덕왕 17·18·19년에 연이어 계속되는 북조와의 교류는 그전까지의 남조 일변도의 대중관계 노선과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위덕왕 24년 진에 다시 조공하기도 하여 남조·북조와 모두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후에도 남조인 진과, 북조인 周에 대한 외교관계를 모색하고 있어 이러한 대중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덕왕대에 이르러 대중관계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은 한반도내의 삼국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이 狗川에서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제까지 유지되던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한 나제동맹은 일시에 결렬되고, 동맹관계였던 신라세력이 적대국가로 바뀌어 버렸다. 이러한 삼국간의 정세변화는 곧바로 대중관계에 변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나제동맹이 깨지자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북조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위덕왕대에 이루어진 빈도 높은 사신파견은 이 시기의 급박하였던 백제의 형편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중국에서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수가 통일왕조를 세우게 되자, 백제는 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위덕왕 28년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수의 高祖는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에 봉책함으로써 그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고 나서 백제는 ‘帶方郡公’, 고구려는 ‘遼東郡公’, 신라는 ‘樂浪郡公’ 등에 봉책함으로써 형식적이나마 그들 나름대로의 지배질서를 확립하려고 한 점이었다. 이러한 질서관념은 당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데, 남북조시대와 비교하면 상당한 관념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겠다.401)兪元載, 앞의 글(1992a), 186∼190쪽. 반면 고구려와의 불화가 계속되던 백제로서는 진을 평정한 수와 보다 적극적으로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위덕왕 45년(598)에 백제는 관례적인 대중관계에서 벗어나 長史 王辯那를 수에 보내 조공하고 고구려에 대한 협공을 제의하였다.402)≪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위덕왕 45년 9월. 그러한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왕대에도 고구려 협공에 대한 상호협조에 대한 교섭은 계속되었다. 무왕 12년(611) 수에 사신을 보내고 수의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함에 행군날짜를 물으니까 수는 尙書起部郞 席律을 보내서 왕과 상의하도록 하였다.403)≪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12년 2월. 이것은 수가 고구려세력을 의식하여 백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을 말해주며, 또한 백제로서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와의 긴밀한 관계가 요구되었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적인 협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수가 멸망하고 당이 서게 되었다. 그러자 무왕 22년 사신을 당에 파견하면서 果下馬를 보냄으로써 당과의 외교를 시작하였다. 무왕 25년에는 당 고조가 무왕을 ‘帶方郡王百濟王’에 봉책하였으며404)≪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25년 정월. 백제에서는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도 수와 마찬가지로 백제를「帶方郡王」에 봉하고 있어, 수대 이래의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관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후 무왕 27년에는 당에 明光鎧를 바치고, 고구려와의 불화를 토로하자 당에서는 화친을 종용하였다. 무왕 28년에는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다시 찾으려고 하자, 신라가 급히 이러한 사실을 당에 알리게 되었고 백제의 시도는 실행되지 못하였다.405)≪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28년 7월. 이처럼 당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백제·신라의 끝없는 외교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당으로서 중재자적 입장에서 삼국의 관계를 조정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삼국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이후에도 이러한 대당관계는 계속되어 무왕 41년에는 자제를 당의 國學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다.406)≪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41년 2월.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었지만 백제와 당과의 관계 또한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무왕이 죽자 당에서는 애도와 함께 ‘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 뒤를 이어서 의자왕이 즉위하니까 당 태종은 祠部郞中鄭文表를 보내 의자왕을 ‘柱國帶方郡王百濟王’에 봉책하였다.407)≪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원년. 그러자 의자왕은 그 해 8월에 사은사를 보내었다. 그 후 백제는 신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 대야성의 성주 品釋과 그의 처를 잡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의자왕 3년(643)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도모하게 되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모하여 신라 대당외교의 전초기지인 당항성을 공격하였다.408)≪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3년 11월. 신라가 황급히 당에 군대를 청하였으므로 백제는 공격을 멈추었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이르면 다시 국제정세는 변화하여, 백제와 고구려는 화친의 상대였고 신라는 당과 밀착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의자왕 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에서 병사를 징발하였으므로 이 틈을 노려서 신라의 7성을 습취했던409)≪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5년 5월. 사실로서도 당시의 정세를 헤아릴 수 있다. 당으로서는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타개해보려고, 의자왕 11년 당 고종이 종주국의 자세에서 백제에게 극단적으로 신라와의 화친을 종용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백제는 이러한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합세하여 의자왕 15년에 신라의 30여 성을 또 다시 쳐부수었다.410)≪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5년 8월.
金周成,≪百濟泗沘時代政治史硏究≫(全南大 博士學位論文, 1990), 158∼159쪽.
이는 당과의 관계가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김춘추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군대를 청하였다. 그 결과 당은 의자왕 20년에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공식적인 백제의 대당외교는 끝나게 되었다.

 사비시대에 이루어진 빈도 높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보듯이, 백제는 당시의 어려운 국제정세 속에서도 대중외교를 매우 역동적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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