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3) 대중관계의 성격

3) 대중관계의 성격

 백제가 근초고왕대부터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의자왕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되기까지, 그리고 멸망 이후 당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개되었던 이들 교류의 내용은 다음의<표 5>와 같다.

조 공 봉 책 견 사 청구 및 허락 전 쟁 회 맹
65회 25회 14회 17회 7회 1회 129회

<표 5>백제의 대중관계

 백제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공과 봉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이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대중관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성격은 조공과 봉책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의 조공과 봉책은 백제와 중국의 관계가 시작된 이래 끝날 때까지 일관되고 있다. 조공의 성격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연구되기 시작했다. 조공의 근본 의의를 선진문화의 수입에서 찾는 견해도 있고,411)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4∼7쪽. 문화적인 관계보다 정치적 관계에 주목하여 종주국과 종속국과의 관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412)全海宗,<韓中朝貢關係考>(≪東洋史硏究≫1, 1966), 10∼27쪽. 뿐만 아니라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내부의 물리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외교로 해석하기도 한다.413)徐榮洙,<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149∼178쪽. 하지만 백제의 대중관계에서 보이는 조공의 성격은 조공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봉책과 함께 해석되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남북조시대와 수·당시대로 그 성격도 나누어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조시대에 이루어진 백제에서의 조공과, 중국에서 행한 봉책은 남북조시대라는 중국의 특수한 시대성과, 삼국의 정립이라는 한반도내의 시대성에서 파악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조공은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전한 이후 한반도내의 고구려·신라와의 역학관계를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유지하려 했던 외교적 행위였다. 그리고 남조에서 백제에 행한 봉책 또한 남북조의 대혼란을 맞이하여 봉책이라는 외교적 행위를 통해 북조에 대한 연합세력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외교적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삼국을 바라볼 때 한반도에 위치했던 낙랑·대방의 인식속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남북조시대의 백제와 중국과의 관계는 동북아시아의 혼란기에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상호적 외교형태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수·당시대에 이르면 성격을 달리하게 된다. 수·당은 남북조를 통일하여 나름대로의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고구려를 요동군공, 백제를 대방군공, 신라를 낙랑군공의 전통적이고 도식적인 그들 중심의 질서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백제와의 관계를 ‘帶方藩國’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414)兪元載, 앞의 글(1992a), 199∼202쪽. 그러므로 수당시대에는 그 이전의 상호적 외교관계가 아닌 종속적인 관계로 인식케 되었고, 이러한 바탕 아래 한반도 안에서 야기되는 삼국항쟁의 조정자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공과 봉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백제의 대중관계는 시기에 따라 성격을 달리 하였지만 조공과 봉책으로 일관된 외교관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 관계 위에서 부수적으로 시대변화에 따른 기타의 목적들이 더하여진 관계였다고 할 것이다.

<兪元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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