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2. 백제의 요서영유(설)
  • 1) 요서영유설에 대한 여러 견해

1) 요서영유설에 대한 여러 견해

 요서영유설에 대한 견해를 종합하면 백제의 요서영유 사실에 대한 긍정설·부정설, 그리고 백제가 아닌 馬韓·扶餘·樂浪 등 다른 세력이 주체였다는 견해들로 압축된다.

 우선 백제의 요서영유를 긍정하는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실학자인 申景濬415)申景濬,<輿地考>(≪東國文獻備考≫, 1770).으로부터 비롯한다. 그 후 林壽圖·丁謙 등의 중국인과 申采浩 등에게 이어져 근자에 이르렀다.416)林壽圖,<啓東錄>권 1(≪中華文史叢書≫30, 1879).
丁 謙,≪梁書夷貊傳 地理考證≫(浙江圖書館叢書, 1915).
申采浩,≪改訂版 申采浩全集≫(1972).
鄭寅普,≪朝鮮史硏究≫(서울신문사출판국, 1947).
金庠基,<百濟의 遼西經略에 대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百濟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李玟洙,<百濟 遼西經略에 대한 考察>(≪韓社大論文集≫1, 1980).
井上秀雄,≪古代朝鮮≫(日本放送出版協會, 1972).
특히 신채호는 백제가 근구수왕대에 요서지방을 영유하였다 하고, 그 위치를 遼西·山東·江蘇·浙江 등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중국의 북조계 사서에서 이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북조의 사관들이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누락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와는 달리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기 위하여 근초고왕 말기에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다.417)金庠基, 위의 글. 그리고 중국의 사민정책과 관련하여≪南齊書≫에 나타나는 지명들을 검토함으로써 화북지방에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418)方善柱, 앞의 글. 요서영유설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측의 자료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며, 여러 견해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도 백제가 요서를 영유하게 된 시기·위치 등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요서영유를 부정하는 입장은 실학자인 韓鎭書를 비롯하여 일본인 연구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419)韓鎭書,≪海東繹史≫續編 권 8(1823).
那珂通世,<朝鮮古史考>(≪那珂通世遺書≫, 故那珂通世博士功績記念會, 1919).
池內宏,≪日本上代史の一硏究≫(近藤書店, 1947).
和田博德,<百濟の遼西領有說について>(≪史學≫25-1, 1951).
이들은 주로 중국측 사료에서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했다는「晋末」에는 慕容氏가 요서지방을 점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과 백제의 지리적 관계를 볼 때 부당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들에 대하여≪梁職貢圖≫의 기록으로 미루어 요서영유의 주체는 낙랑420)李弘稙,<梁職貢圖論考>(≪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밖에 부여421)金廷鶴,≪百濟と倭國≫(大興出版社, 1981). 또는 마한422)徐榮洙,<古代韓·中關係硏究試論>(≪檀國大學院學術論叢≫5, 1981).
李明揆,<百濟의 對外關係에 관한 一試論>(≪史學硏究≫37, 1983).
과 관련된 세력으로 파악하는 입장도 있다. 그리고≪양직공도≫의 기록으로 보아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을 영유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직 정설로 하기엔 미흡하다고 보기도 한다.423)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古代篇(一潮閣, 1982). 주로 사료의 분석을 통한 중국의 사민책에 유의하여 앞으로 연구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424)金煐二,<百濟の遼西經營について>(≪東洋文化學術年譜≫1, 追手文學院大學 文學部 東洋文化學科, 1986).

 결국≪송서≫에서 비롯되어 남조계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요서영유설은 아직도 백제의 대중관계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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