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2. 백제의 요서영유(설)
  • 2) 요서영유 기사의 분석

2) 요서영유 기사의 분석

 백제의 요서영유에 관한 기록은 사실 자체를 기록하고 있는 것과, 직접적으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있다.

책 명 찬 자 편찬년도 내 용
宋 書 沈 約 488년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 1,000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遼西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晋平郡 晋平縣이라 한다.
南 齊 書
建康實錄
蕭子顯 537년 이전 백제는 弁辰의 나라로 晋代에 일어나 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百濟郡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梁職貢圖 蕭 繹 526∼539년 백제는 옛부터 내려오는 東夷의 馬韓에 속한다. 晋말에 駒驪가 요동을 차지하니 樂浪 역시 요서 晋平縣을 차지하였다.
梁 書 姚思廉 629∼639년 그 나라는 본래 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晋代에 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遼西·晋平의 두 군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百濟郡을 다스렸다.
南 史 李延壽 627∼649년 그 나라는 본래 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晋代에 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遼西·晋平의 두 군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百濟郡을 두었다.
通 典 杜 佑 801년 처음 百家로써 바다를 건넜다 하여 백제라 한다. 晋代에 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遼西·晋平의 두 군을 차지했다(지금의 柳城·北平 사이)

 사실 자체의 기록은≪송서≫백제국전을 처음으로≪建康實錄≫에 의하여 보완된425)田中俊明,<南齊書東夷傳の缺葉について>(≪村上四男博士和歌山大學退官記念朝鮮史論文集≫, 1982), 212∼220쪽.≪남제서≫백제국전,≪양직공도≫,426)李弘稙, 앞의 글, 385∼427쪽.≪양서≫백제전,≪남사≫백제전,≪通典≫등에 전하는데 이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의 표와 같다.

 요서영유에 대하여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송서≫는 梁의 沈約이 南齊 永明 6년(488)에 편찬한 사서이다.≪송서≫백제전은 모두 451자로 구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백제의 대중관계 기사가 403자로서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요서영유 기사가 26자, 그리고 원류기사가 16자, 왕계기사가 6자이다.427)兪元載,<周書 百濟傳 硏究>(≪百濟硏究≫19, 1988), 260∼261쪽. 그 중에서 원류기사에는 백제의 출자나 시조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단지 위치에 대하여 고구려를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다.≪송서≫백제전에는 백제의 문화관계 기사가 수록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송서≫가 편찬된 시기에는 백제에 대한 인지도가 상당히 낮았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송서≫에 기록된 내용은 주로 백제의 대중외교자료에 의존하여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다.≪송서≫백제전에 실린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 또한≪송서≫가 편찬된 5세기 후반경 백제와 중국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된 사실의 반영일 가능성이 높다.≪송서≫의 내용은 모두 당대의 외교기록인데 요서영유 기록만이 전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건기록으로서, 이렇게 전시대의 사실을 기록해야 했던 당시의 시대적 필연성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송서≫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고구려와 상대되는 백제는 요서지방을 영유하여 이곳을 晋平郡 晋平縣이라 하였다는 대목이다.

 다음은≪건강실록≫에 의하여 보완된≪남제서≫의 내용이다.≪남제서≫는 蕭子顯에 의하여 梁 大同 3년(537) 이전에 편찬되었다.≪남제서≫백제전은 전반부분의 일부가 결실되어 있다. 근래≪남제서≫에 대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428)田中俊明, 앞의 글, 219∼220쪽.≪건강실록≫의 내용 중에서 “스스로 百濟郡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는 내용이 이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알려졌다.≪남제서≫백제전의 내용도≪송서≫와 같이 대중관계가 대부분이며 백제의 문화상태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이 없다. 이 또한≪송서≫와 내용·구성상의 변화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송서≫에는 보이지 않는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는 내용이 새로이 나타나고,≪송서≫의「진평군 진평현」이「백제군」으로 바뀌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므로≪남제서≫의 내용은≪송서≫를 답습하면서도 당대의 변화된 인식의 일면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되풀이되지만 요서영유설의 전거가 되어 있는≪송서≫와≪남제서≫의 기록들은 단지 백제의 대중외교자료에 의존하여 편찬되었던 것이므로, 요서영유 기록의 해석은 당연히 그들 사서의 편찬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면밀히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송서≫·≪남제서≫의 내용 중에서 오직 요서영유에 관한 부분만이 전시대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이처럼 초시제적으로 기록하여야만 했던 것은 편찬을 전후한 시기의 외교적 상황의 반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양직공도≫에는 백제의 使臣圖와 함께 백제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데, 그 편찬연대가 대략 普通 7년(526)∼大同 5년(539)으로 알려져 있다.429)李弘稙, 앞의 글, 386∼396쪽. 그 내용은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문화관계의 기사를 담았다. 특히 백제의 원류기사 중에서 출자를 마한으로부터 구한 것이나, 22담로제와 의복에 대한 것은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430)李弘稙, 위의 글, 396∼425쪽. 그런데 비교적 정확한 찬자의 인식에도 불구하고≪양직공도≫에서는 백제의 사신도와 함께 백제가 아닌 낙랑이 요서지역을 영유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양직공도≫의 사료로서의 성격상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당시 낙랑과 백제와의 관계를 남조의 입장에서 이해하여야 하는 중요한 단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서영유의 시기를「晋末」로 지적한 점은 요서영유 시기에 대한 결정적 자료로서 평가된다.

 ≪양서≫는 남북조시대에 편찬되지 못하고 당대에 편찬되었다.≪양서≫에는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제도, 언어 등에 관하여 전하고 있다.431)兪元載,<中國正史 百濟傳 硏究>(≪韓國上古史學報≫4, 1990), 165∼167쪽. 하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이 이전 사서들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부분이 많으며, 東夷에 文身이나 扶桑國들의 내용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서 백제문화에 대한 내용은 다양하지만, 대중관계에 관한 기사를 제외하고 동시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432)高柄翊,<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硏究≫, 서울大 出版部, 1983), 27∼29쪽.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 또한 대체적으로≪송서≫를 옮겨 적고≪남제서≫의 내용을 첨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치소인 百濟郡을 요서·진평의 땅에 두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사≫도 당대에 편찬된 사서이다. 백제의 위치에 대하여는≪송서≫를, 요서영유에 대하여는≪양서≫를 그대로 옮기고 있다.433)兪元載, 앞의 글(1990), 170∼171쪽.≪통전≫에 의하면 요서·진평의 위치를 “今柳城北平之間”으로 기록하고 있어434)≪通典≫권 185, 百濟. 위치 추적에 참고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백제의 요서영유에 관한 직접사료는≪송서≫·≪남제서≫·≪양직공도≫·≪남사≫등 제삼자적인 남조계 사서에만 전하여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요서영유의 사실은 당사국인 백제와 북조의 사료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요서영유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료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백제가 요서를 영유했다는 시기를 전후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백제와 관련된 馬韓·樂浪·帶方·靺鞨435)靺鞨과의 관계는 東濊와의 관계로서 兪元載,<三國史記僞靺鞨考>(≪史學硏究≫29, 1979)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어 생략한다. 신라·고구려·왜의 내용 또한 생략한다. 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삼국사기≫에 나타난 이들의 활동과 중국측의 사료에 등장하는 요서영유에 관한 간접사료를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 책 명 연 대 내 용
1 三國史記 온조왕 4년(B.C. 15) 사신을 보내 낙랑과 修好
2 三國史記 온조왕 8년(B.C. 11) 馬首城과 甁山柵을 쌓아 낙랑과 失和
3
4
三國史記
三國史記
온조왕 10년(B.C. 9)
온조왕 11년(B.C. 8)
神鹿을 마한에 보냄
낙랑이 甁山柵을 습격, 禿山·狗川柵을 세워 낙랑의 길을 막음
5 三國史記 온조왕 13년(B.C. 6) 사신을 마한에 보내 천도를 알림
6 三國史記 온조왕 17년(B.C. 2) 낙랑이 침입하여 慰禮城을 불태움
7 三國史記 온조왕 18년(B.C. 1) 靺鞨長 素牟를 마한에 바침. 낙랑의 牛頭山城을 습격하려 함
8 三國史記 온조왕 24년(6) 熊川柵을 쌓아 마한왕과 분쟁, 결국 파괴함
9 三國史記 온조왕 26년(8) 마한을 습격하였는데 오직 圓山·錦峴 2성이 항전함
10 三國史記 온조왕 27년(9) 2성이 항복하여 마한을 드디어 멸함
11 三國史記 온조왕 34년(15) 마한의 옛장수인 周勤이 牛谷城에서 반란, 진압
12 三國史記 온조왕 43년(25) 남옥저의 仇頗解 등이 귀순하니 漢山의 서쪽에 안치
13 後 漢 書 建光 1년(121) 고구려·마한·예맥이 玄菟城을 포위하자 부여왕이 격파함
14 後 漢 書 延光 1년(122) 부여왕이 玄菟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마한·예맥을 파함
15 三國史記 고이왕 13년(246) 幽州刺史인 毋丘儉과 樂浪太守인 劉茂, 帶方太守인 王遵이 고구려를 치려 하자 左將 眞忠으로 낙랑의 변경주민을 습취, 그 주민을 돌려보냄
16 三國史記 책계왕 1년(286)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이 구원을 청해 군대를 내어 구원함. 蛇城을 쌓아 고구려에 대비함
17 三國史記 책계왕 13년(298) 漢과 貊人의 침입을 막다 왕이 죽음
18 三國史記 분서왕 7년(304) 낙랑의 西縣을 습취,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왕이 죽음
19 晋 書 永和 1년(345) 句麗·百濟·宇文·段部人들을 서쪽 변경으로 옮겨 감독케 할 것을 요구함
20 資治通鑑 永和 2년(346) 부여가 鹿山에 있을 때 백제의 침략을 받아 서쪽으로 옮김
21 三國史記 동성왕 10년(488) 魏가 침입하였으나 패함
22 南 齊 書 永明 8년(490) 魏虜가 기병 수십만으로 침입하였으나 牟大에게 패함
23 三國史記 崔致遠傳 고려·백제의 전성기에 강병 100만으로 남으로 吳越, 북으로 幽燕 齊魯을 침

 위의 내용을 시기적으로 분류해보면≪삼국사기≫에 의한 온조왕대의 낙랑·마한과의 관계 및≪후한서≫의 마한, 그리고 3∼4세기에 이르는≪삼국사기≫의 백제와 낙랑·대방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중국측 사료에 의한 기록들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서 19·20·21·22 등이 백제의 요서영유에 관한 간접사료로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삼국사기≫에 전하는 백제와 낙랑·대방과의 관계와 중국사서에 나타나는 간접사료 내용의 연계성이다. 즉 낙랑과 대방이 요서지방으로 옮긴(313) 이후에는 중국측 사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백제관계 내용들이 연속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국측 사서에서 이 시기에 나타나는 백제의 존재에 대하여 실로 시사하는 바 크다. 중국측 사서에서는 백제의 요서영유 시기를「晋末」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들 간접사료에 나타나는 내용의 연계성으로서부터 진대 백제와 관련된 낙랑·대방의 활동은 주목되어져야 할 대상이다. 이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고대국가 발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세력이었다. 요서지방으로 이동하기 전에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토착인에 의해서 지배된436)三上次男,≪古代東アジア史硏究≫(吉川弘文館, 1977). 세력이었다. 이러한 낙랑과 대방의 역사활동은 그들의 요서이동으로 인해≪삼국사기≫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에 비정하는 일반적인 관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중국측 사서에서는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백제관계 기록들이 요서지방과 관련하여 연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요서영유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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