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2. 백제의 요서영유(설)
  • 3) 남북조의 백제·고구려관

3) 남북조의 백제·고구려관

 남북조시대 남조 및 북조에서 당시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에 대하여 어떻게, 또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는 남북조시대 이루어졌다고 하는 요서영유의 이해에 앞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우선의 과제이다. 그 일단은 남북조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왕들에게 행한 봉책관계에서 살필 수 있다.437)남북조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왕들에게 봉책했던 봉책명은 바로 그들의 백제·고구려에 대한 관념의 표식인 것이다.

 진에서는 백제의 근초고왕을 ‘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봉책하였으며,438)≪晋書≫권 9, 帝紀 9, 簡文帝 咸安 2년 6월. 송에서는 고구려의 장수왕을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에 봉책했다.439)≪宋書≫권 97, 列傳 57, 東夷, 高句麗, 晋安帝 義熙 9년. 고구려나 백제의 왕들에게 준 봉책명을 의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440)坂元義種,<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古代の朝鮮≫, 學生社, 1974).
江畑 武,<四∼六世紀の朝鮮三國と日本>(≪古代の日本と朝鮮≫, 學生社, 1974).
오히려 이러한 의례적인 봉책명이야말로 당시 남북조에서의 백제·고구려에 대한 관념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441)高柄翊, 앞의 책. 진과 송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국왕들에게 모두 낙랑과 결부된 봉책명을 주었다는 것은 당시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백제나 고구려의 실체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게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음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남제에서는 백제의 高達을 龍驤將軍帶方太守로, 慕遺를 龍驤將軍樂浪太守로 봉책하는442)≪南齊書≫권 58, 列傳 39, 百濟國. 한편 고구려왕에게도 高句麗王樂浪公을 봉책하였다.443)≪南齊書≫권 58, 列傳 39, 高麗國. 이처럼 남제에서도 백제·고구려를 전통적인 낙랑·대방의 관념 속에서 혼동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뒤를 이은 梁 나라도 역시 같았다. 그러므로 남조의 진·송·제·양에서는 전통적인 낙랑과 대방에 대한 관념 때문에 백제·고구려에 대한 독자적인 관념이 형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남조에서는 동시대적인 백제보다 전통적인 낙랑·대방의 관념 속에서 이해하였던 것이다.

 남조에서의 백제·고구려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북조에서는 보다 동시대적인 관념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봉책관계에서 설명된다. 북조의 봉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燕代에는 남조와 같이 고구려의 국왕에게 아직도 ‘樂浪公’이나 ‘遼東帶方二國王’을 봉책하였지만, 그 뒤의 북조국가들은 고구려왕에게 모두 ‘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遼東郡公高句麗王’·‘遼東郡開國公遼東王’ 등을 봉책하여 낙랑·대방과 관련된 봉책명이 사라진다는 점이다.444)兪元載,<中國正史의 百濟觀>(≪韓國古代史硏究≫6, 1992), 191∼195쪽. 여기에서 다시 상기할 것은 남조에서도 晋末 백제왕에게 ‘樂浪太守’를 봉책하였던 점이다. 그러므로 진말, 연대에 진은 백제왕에게 ‘樂浪太守’를 봉책하였고, 연은 고구려왕에게 ‘樂浪公’·‘遼東帶方二國王’을 봉책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미 요서지방으로 이동한 낙랑·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통적인 관념을 고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이 남조에서는 계속되나, 북조에서는 魏代부터 고구려왕에게는 낙랑·대방과 관계없는 보다 동시대적인 인식에 입각한 봉책만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에게는 계속하여 ‘帶方郡公’을 봉책하였는데,445)≪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위덕왕 17년.
≪北齊書≫권 8, 帝紀 8, 後主 武平 원년 2월.
이것은 당시 백제와 대방을 연관시켜서 이해하여야 할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남조에서는 계속하여 전통적인 낙랑과 대방에 대한 관념의 틀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당시의 백제나 고구려에 대한 동시대적인 관념이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북조에서는 연대에 한하여 낙랑·대방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위대부터 北齊·北周代에는 백제에 대방군공, 고구려에 요동군공을 봉책하는 보다 동시대적 관념이 형성되었다. 북조에서는 이처럼 백제·고구려에 대한 관념이 동시대적이면서 분명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고, 낙랑·대방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남조계의 사서에만 기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서영유 기록에 나타나는 특색과 함께 특히 진말·연대에는 남조나 북조에서 모두 백제나 고구려에 대해 전통적인 낙랑·대방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실은 서로 연관하여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남조와 북조의 백제·고구려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지리적 위치에 대한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남조계의 사서에서는 고구려나 백제국의 위치를 기록함에 구체적이지 못하며 더구나 당시 한반도에 있지도 않던 대방이 거리를 표시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446)兪元載, 앞의 글(1992), 191∼195쪽. 그러나 북조계의 사서에서는 남조계 사서보다 구체적인 거리나 동시대적인 지명·국명에 의하여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447)兪元載, 위의 글, 191∼199쪽.

 이처럼 고구려나 백제에 대하여 구체적이며 정확하게 기록한 북조계의 사서에서는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제의 위치조차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했으며, 전통적인 낙랑·대방의 관념에 의해 동시대의 백제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남조계의 사서에서만 요서영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암시하는 바 크다. 이들을 통해 요서영유설은 남조에서 야기된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와 한반도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관념상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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