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제

1) 관등제

 백제가 소국 및 소국연맹단계에 있을 때는 아직 정치수준이 古拙하여 관등과 관직은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지배조직은 관등과 관직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官制라고 표현할 수 있다. 소국단계에서는 각 소국의 수장들은 사로국이나 왜국의 경우에서 미루어 볼 때 단순하면서도 규모가 작은 지배조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배조직의 명칭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소국연맹단계가 되면서 중앙관제가 생기는데 그러한 관제로는 右輔와 左輔를 들 수 있다.502)右輔의 직에는 온조왕 2년(B.C. 17)에 族父 乙音이 처음 임명되었고, 左輔는 다루왕 10년(37)에 우보였던 屹于가 임명된 것이 그 처음이다. 이 직에는 왕족을 비롯하여 연맹을 구성한 유력한 세력자가 임명되었는데, 대체로 전임자가 사명한 후 후임자가 그 뒤를 잇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의 직능은 연맹장으로부터 군사관계의 업무를 위임받아 관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연맹을 구성한 수장들의 독자성이 상당한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이왕대에 들어와서 백제는 중앙집권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국의 수장들은 자신들의 족적 기반을 해체당하면서 점차 중앙귀족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중앙귀족화된 세력들은 왕도의 일정한 지역에 편제되었는데 이렇게 편제된 귀족들의 정치적 거주처가 바로 部이다. 이 시기에 성립된 부는 모두 5개였다. 5부의 명칭은 처음에는 백제 고유의 토착적 용어로 표기되었겠지만, 후에는 동·서·남·북부와 중부라고 하는 방위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바뀌었다.503)五部체제에 대해서는 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國史學科, 1975) 참조. 따라서 이 시기 백제의 정치체제는 5부체제라고 할 수 있다.

 5부체제의 성립으로 중앙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지배조직도 확대되었다. 그러한 지배조직의 확대과정에서 관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관등은 중앙귀족세력들을 서열화하여 그들 상호간의 상하존비를 구별지어 주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관등제는 佐平과 率系 관등, 德系 관등 등 상위의 관등과 佐軍·振武·剋虞 등 하위의 관등으로 이루어졌다. 고이왕은 이러한 관등을 귀족세력들에게 수여함으로써 이들을 왕권하에 편제해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5부체제단계에서 왕권이 비록 전시대에 비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왕권이 중앙귀족세력들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이 시기의 중앙귀족들은 족적 기반이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의 대표세력들이 독자적으로 部兵을 운영하고,504)독자적으로 부병을 운용한 예로는 초고왕 49년(214)에 북부의 眞果가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을 공격한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소국단계의 지배조직을 독자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데서 추론해 볼 수 있다.505)부체제단계에서 部의 유력세력들이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가졌다는 것은 부여의 경우 大加는 수천 가를, 小加는 수백 가를 주관하였다던가, 고구려의 경우 여러 대가들이 使者·皀衣·仙人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지배조직을 가졌다는 데서 방증이 되리라고 본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桓鮮卑東夷傳 30, 夫餘·高句麗 참조). 따라서 이 시기의 지배조직은 이원적인 형태를 아직까지는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이왕대를 거쳐 근초고왕대에 오면서 백제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비하였다. 중앙집권체제의 완비로 부의 유력자들이 이전에 지녔던 독자적인 세력기반은 해체되고 독자적인 군사운용권과 지배조직도 국왕 중심의 지배체계내로 흡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등제도 일원적으로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 정비된 관등제는 5부체제단계에서의 관등을 토대로 하여 그것을 분화·격상시키는 데서 이루어졌다. 솔계 관등이 達率에서 奈率에 이르기까지 5개의 관등으로 분화되고, 덕계 관등이 將德에서 對德까지 5개로 분화된 것이 그것이다. 근초고왕대에 정비된 관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분명히 하기 어려우나 훗날 사비시대에 와서 완비된 16관등 가운데 文督과 武督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관등은 이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506)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219쪽.

 이후 백제는 개로왕대에 와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왕도가 함락되고 왕이 전사하는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였으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병관좌평 解仇가 문주왕을 살해하고 삼근왕을 세웠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과 동성왕대에 위사좌평 苩加가 왕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은 이시기의 불안한 정치정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507)≪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4년·삼근왕 2년·동성왕 23년 참조. 웅진천도 이후의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무령왕대에 와서 극복되었고 그 토대 위에서 성왕은 사비천도를 단행하여 중흥을 도모하였다.

 사비로의 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중앙 및 지방통치조직을 비롯하여 국가체제 전반을 새로이 정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비된 관등제가 16관등제이다. 이 16관등제는 한성시대의 14관등제에 문독과 무독을 새로이 설치함으로써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16관등제의 명칭은 다음의<표 1>과 같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명 칭 佐平 達率 恩率 德率 扞率 奈率 將德 施德 固德 季德 對德 文督 武督 佐軍 振武 剋虞

<표 1>16관등 명칭

 성왕대에 완비된 이 16관등제는 백제 말기에 오면서 대좌평과 같은 특진의 관등도 생기는 등508)대좌평은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에 보인다. 변화를 보였고, 또 의자왕이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한 것 등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 문란해진 듯하다. 이로써 16관등제는 점차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갔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이 백제 관등제의 성립배경과 그 변화과정의 대략이다. 이제 사비시대에 와서 완성된 16관등제를 중심으로 백제 관등제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16관등제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은 좌평이었다. 좌평은 1품으로서 최고의 관등이었고 동시에 귀족회의체의 의장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좌평의 정원은 처음에는 1명이었으나 전지왕대에 와서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분화되기 시작하여 상·중·하좌평 등이509)상·중·하좌평에 대한 기사는≪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5년 12월에 나온다. 만들어지게 되었고 정원도 5명으로 되었다. 이를 5좌평제라고 할 수 있겠다.

 한성시대에 이루어진 이 5좌평제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천도 후에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성왕이 신라와의 管山城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사한 후 위덕왕대에 들어와서 왕권은 크게 약화되고 유력귀족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실권귀족들은 좌평체제를 강화하였는데 그 결과 좌평의 정원은 6명으로 확대되었고 그 명칭도 종래의 상·중·하 좌평에서 고유업무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를 6좌평제라 할 수 있는데, 이 6좌평 중에서 內臣佐平은 수석좌평의 기능을 하였다. 6좌평의 명칭과 고유기능은 다음<표 2>와 같다.

명칭 출전
≪구당서≫백제전 ≪삼국사기≫고이왕조
內臣佐平
內頭佐平
內法佐平
衛士佐平
朝廷佐平
兵官佐平
掌 宣 納 事
掌 庫 藏 事
掌 禮 儀 事
掌宿衛兵事
掌 刑 獄 事
掌 在 外 兵
掌 宣 納 事
掌 庫 藏 事
掌 禮 儀 事
掌 宿 衛 事
掌 刑 獄 事
掌外兵馬事

<표 2>6좌평의 명칭과 직능

 다음 2품 달솔에서 6품 나솔까지는 率을 어미로 갖는 솔계 관등이다. 이중 달솔은 大率이라고도 하였으며 정원은 30명이었다.510)≪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달솔의 정원이 30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지배계급내에서 이러한 관등을 소지한 귀족들의 정치적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제7품 장덕에서 제11품 대덕까지는 德을 어미로 갖는 덕계 관등이다. 제12품 문독과 제13품 무독은 督을 어미로 갖는 독계 관등이다. 이 관등은 우리 나라 관등상 문무를 구분하는 최초의 예가 된다. 제14품 좌군에서 제16품 극우의 관등은 武系 관등으로서 武的인 성격을 지니는 관등으로 생각된다.

 16관등제는 服色에 의해 다시 구분지어졌다.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의 복색은 紫服이었다. 7품 장덕에서 11품 대덕까지의 관등의 복색은 緋服이었다. 13품 문독에서 16품 극우까지의 복색은 靑服이었다.

 한편 冠飾에 있어서는 왕은 금제였던 데 비해 좌평에서 나솔까지는 관을 銀花로 장식하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은 왕의 관식이 금제인 것을 입증해 주며,511)文化財管理局,≪武寧王陵≫(1973). 익산 笠店里고분에서 출토된 은제관식은 이 고분의 피장자가 좌평 또는 솔계 관등을 소지한 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512)李南奭,<百濟의 冠制와 冠飾>(≪百濟文化≫20, 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1990). 그러나 덕계 관등 이하 관료들이 쓰는 冠帽의 장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6관등제는 띠의 색에 의해서도 구분되었다. 띠의 색은 7품 이하부터 보이고 있는데 장덕은 자주빛 띠, 시덕은 검은 띠, 주덕은 붉은 띠, 계덕은 푸른 띠이며, 대덕과 문독은 다같이 누런 띠이고, 무독과 좌군·진무·극우는 흰 띠였다.513)≪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이처럼 관등에 따라 띠의 색이 상세하게 구분된 것은 백제 관등제의 특색이다.

 관등제와 복색제는 신분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신분제사회에서 어떤 개인이 관등을 가졌다는 것은 지배신분층에 속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지배신분층도 家門의 格에 따라 구별되었다. 백제에서의 지배계층은 관등제와 복색제에 의해 크게 세 신분층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의 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신분층이다. 이들은 관의 장식이 동일하고 또 복색도 똑같이 紫服이어서 제1지배신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족을 비롯한 대성8족은 바로 제1의 지배신분층을 구성한 중심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緋服을 입고 자주빛 띠에서 누런 띠까지의 띠를 두르는 장덕 이하 대덕까지의 관등은 제2지배신분층이 가지는 관등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음 푸른색의 관복을 입고 누런 띠와 흰 띠를 두르는 문독 이하 극우에 이르는 관등의 소지자들은 제3지배신분층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셋으로 이루어진 지배신분층 아래에는 일반 평민신분층이 있었고, 최하위에는 노비를 포함한 천민신분층이 있었다. 개로왕시대의 編戶小民이었던 都彌는 바로 평민신분층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婢子(노비)는 천민신분층을 보여주는 예가 되겠다.514)≪三國史記≫권 48, 列傳 8, 都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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