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3) 왕도조직

3) 왕도조직

 백제의 왕도는 시기에 따라 몇 차례 변화하였다. 시조 온조가 처음 도읍한 곳은 河北慰禮城이었는데 오늘날 중랑천 일대에 비정되고 있다.531)崔夢龍,<漢城時代 百濟의 都邑地와 領域>(≪震檀學報≫60, 1985), 216∼218쪽. 그 후 백제는 낙랑과 말갈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하남위례성으로 옮겼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夢村土城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32)崔夢龍, 위의 글.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 대해 온조왕대로 보는 설, 비류왕대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필자는 초고왕대로 보고자 한다.533)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 대한 여러 견해는 盧重國, 앞의 책, 55∼59쪽 참조.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백제는 왕도조직을 점차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갖추어진 왕도가 바로 漢城이다. 왕도 한성내에 왕성이 있었는데 이 왕성은 북성과 남성으로 구분되었다.534)≪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북성은 풍납동토성에 비정되고 남성은 몽촌토성에 비정된다.

 왕도내의 왕성에는 왕궁이 있었고, 또 별궁도 있었다.535)≪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즉위년. 그리고 동명을 모신 東明廟와 천지에 제사지내는 南壇이 있었다. 풍납동토성내에서 발굴된 東晉에서 만들어진 靑銅鐎斗는536)金元龍,≪風納里土城包含層調査報告≫(서울大 考古人類學科, 1967) 참조. 이러한 제의에 사용된 제기이다. 이외에 政廳으로서 南堂과 여러 관부가 있었고, 왕과 귀족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는 射臺도 있었다. 왕궁을 비롯한 이러한 건물들은 기와집이었다. 이는 풍납동토성에서 기와가 출토된 것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한성의 내부구조는 몽촌토성의 발굴에서도 왕궁터가 확인되지 않아537)夢村土城發掘調査團,≪夢村土城發掘調査報告書≫(서울大 考古學科, 1985) 참조. 분명히 하기는 어렵다.

 웅진도읍기의 왕성인 웅진성은 오늘날의 公山城이다. 이 공산성내에서는 근래 왕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538)安承周·李南奭,≪公山城百濟推定王宮址發掘調査報告書≫(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1987) 참조.≪삼국사기≫에는 동성왕 22년(500)에 臨流閣이 축조되었다고 하였는데 발굴 결과 이 임류각은 6칸×5칸의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외에 왕도내에는 大通寺 등 사찰도 조영되었고, 熊津市의 존재에서539)≪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삼근왕 2년. 보듯이 상설시장도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금강에 연하여 蓮池도 만들어졌다.

 사비시대의 왕도는 오늘날 부여이다.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것은 성왕 16년(538)인데, 이 천도는 성왕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계획적인 천도였기 때문에 사비도성은 왕성·관아의 축조, 시가지의 정비 등 수도로서의 면모를 보다 잘 갖출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시대의 도성은 扶蘇山城과 연결되는 나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왕궁은 부소산성 밑의 옛 박물관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40)成周鐸,<百濟泗沘都城硏究>(≪百濟硏究≫13, 忠南大 百濟硏究所, 1982) 참조. 이 나성 안의 시가지는 5부로 조직되었다. 5부는 수도의 행정조직인데 그 명칭은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였다.541)≪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이 5부는 각각 5巷으로 나뉘어졌다. 이 5부-5항제의 실시는 사비도성의 시가조직이 坊里制로 이루어진 것을 말해 주는데, 이는 옛 부여박물관 앞쪽에서 백제 당시의 직선도로가 발견된 것에서 입증된다.

 이 도성내에는 1만 가구가 거주하였는데542)위와 같음. 이들은 크게 士와 庶로 나뉘어졌다. 사는 관인을 배출하는 지배신분층을 말하며 서는 일반민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료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부명과 관등명을 가진 인물들은 사 출신이라 할 수 있다. 도성내에는 사가 거주하는 지역과 일반민이 거주하는 지역이 구분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5부에는 각각 500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그 장에 임명되어 군대를 통솔하였다. 따라서 이 부는 수도를 방어하고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일종의 군사구역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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