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1) 담로제

(1) 담로제

 백제가 소국연맹단계의 수준에 있을 때 지방통치는 재지수장층들의 자치적 기능에 맡겼다. 5부체제단계에 와서 재지수장층들은 점차 중앙귀족화되어 部에 편제되었지만 지방에 대한 통치는 이들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어 감에 따라 지방에 대한 통제도 이전의 간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전환되어 갔다. 이러한 지방통치 방식의 전환에 따라 지방지배조직을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었다.

 백제가 지방지배조직을 정비하여 지방관을 파견하게 된 시기는 근초고왕대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日本書紀≫仁德天皇 41년조에 “처음으로 國郡疆場을 나누어 향토의 소출을 모두 기록하게 하였다”라 한 기사이다. 따라서 이 기사에 의하면 이 기사의 연대는 백제 근초고왕 8년(353)에 해당된다.559)≪日本書紀≫의 기년은 120년을 인하하여야≪三國史記≫의 기년과 일치한다(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이러한 紀年觀에 입각하여 인덕 41년을 개로왕 19년(473)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므로 근초고왕은 처음으로 영역을 나누어 정하고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여 수취하는 체제를 마련한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이렇게 영역을 나눔으로써 지방통치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여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지방통치조직이 檐魯制이다. 담로의 성격에 대해서는≪梁書≫백제전에 “읍을 일러 檐魯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와 종족을 분거하게 하였다”라는 기사가560)≪梁書≫권 54, 列傳 48, 諸夷, 百濟. 주목된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담로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갖는 지방통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561)한성시기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에 대해 전기에는 部-城-村制이고, 후기에는 部-城-村制와 거점성 중심의 지배조직인 담로제가 並行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道學,<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百濟論叢≫2, 1990, 22∼30쪽).

 이 담로제가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웅진도읍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562)李基白,<百濟史上의 武寧王>(≪武寧王陵≫, 文化財管理局, 1973). 웅진도읍기의 제도가 한성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이 담로제는 한성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 시기는 바로 근초고왕이 처음으로 영역을 분정하여 지방관을 파견한 때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담로제는 백제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성립시켜 감에 따라 연맹단계의 읍락-소국체제를 재편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집권력의 강화와 담로제의 실시는 읍락과 소국을 지배하였던 수장층들의 존재 양태에도 변화를 초래하여 그들의 일부는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되어 간 반면에 나머지는 재지세력으로 남게 되어 지방관의 보좌적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로 전한되어 갔다.

 그러나 이 재지세력들은 비록 지방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는 제어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기반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온존하고 있었다. 근초고왕대에 전라도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면서도 그 지역의 전통적인 분묘양식인 甕棺墓가 후기까지 성행하였다고 하는 것은563)安承周,<百濟 甕棺墓에 대한 硏究>(≪百濟文化≫15, 1983).
成洛俊,<榮山江流域의 甕棺墓硏究>(≪百濟文化≫15, 1983).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방통치조직으로서 담로의 수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영역의 신축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백제의 영역이 북으로는 황해도지역까지, 남으로는 전라도지역까지 크게 확대되었을 때에는 50여 개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영역이 축소되면서 담로의 수는≪양서≫백제전에 보이듯이 22개로 되었다. 따라서 22담로는 웅진도읍기의 담로의 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담로에 파견된 지방관의 명칭은 분명하지 않으나 城主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다.564)이 담로의 장을≪南齊書≫백제전에 보이는 왕·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金英心,<5∼6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制>,≪韓國史論≫22, 서울大 國史學科, 1990, 80∼88쪽). 그러나 왕후는 일종의 爵制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지방통치를 담당한 지방관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편≪南齊書≫백제전에는 太守가 보이는데 이 태수들은 城陽·淸河·廣陽·廣陵太守 등에서 보듯이 요서지역에 있는 중국의 지명과 관련되어 나온다. 따라서 太守制는 아마도 백제가 요서지역으로 진출한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565)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설에 대한 연구사적 정리는 다음과 같다.
兪元載,<百濟略有遼西記事의 분석>(≪百濟硏究≫20. 1989).
姜鍾薰,<백제 대륙진출설의 제문제>(≪韓國古代史論叢≫4, 1992).

 이 담로에 파견된 지방관은 대개 왕족출신이거나 유력한 귀족가문의 출신이었다.≪양서≫에 보이는 자제와 종족은 바로 왕족을 말하며, 동성왕대에 衛士佐平 백가가 加林城의 성주로서 파견된 것은 이성귀족 출신이 담로에 파견된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담로에 파견된 자들의 관등은 率系 관등이나 좌평의 관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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