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3) 촌락사회의 편제

(3) 촌락사회의 편제

 백제가 처음 지방통치조직을 편제하였을 때 그 토대가 된 것은 소국들이었다. 백제는 이 소국들을 통합하여 그 수장들을 지배체제내에 편입한 후 담로를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 소국들은 각각 중심지로서의 國邑과 그에 부수되는 邑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소국이 담로제로 재편되면서 이 국읍과 읍락들은 城이나 村으로 재편제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58성 700촌이다. 이 58성 700촌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격파한 성과 촌의 숫자인데 이 때의 성은 이전의 국읍을 재편제한 것으로서「지역단위로서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은 58성 대 700촌의 비례에서 볼 때 대략 10여 개의 촌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지방통치조직의 기본단위는 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573)李宇泰,<新羅의 村과 村主>(≪韓國史論≫7, 서울大 國史學科, 1983).

 그런데 백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비시대에 와서 전정호구라고 하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 위에서 방·군-성(현)제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종래의 지역단위로서의 성이나 촌 중에서 전정과 호구가 현이 될 만한 곳을 가리어 지방통치조직으로 재편제하였던 것이다.≪삼국사기≫지리지 백제군현조에 보이는 군현명에 성을 의미하는 知·己·支 등이 붙는 명칭과 촌을 의미하는 夫里·村 등이 붙는 군현의 명칭은 이러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574)知·己·支나 夫里·村의 의미에 대해서는 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上)>(≪韓國學報≫2, 一志社, 1976) 참조.

 백제가 전정호구라는 객관적인 기준 위에서 지방통치조직을 재편제한 것은 각 지역의 토지와 호구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져 있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백제가 호구를 파악하여 호적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삼국사기≫에 “호구를 호적에 올리고 촌락들을 다스렸다”고 한 것이고575)≪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0년.≪삼국사기≫에 보이는 이 기사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군이 취한 조처이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 군대는 백제부흥군의 공격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지배지역도 공주 일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이 기사의 호구파악은 백제 당시의 것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盧明鎬,<羅末麗初 親族組織의 변동>(≪又仁金龍德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 61∼62쪽 참조. 다른 하나는≪일본서기≫繼體天皇조의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도망한 백성들을 括出하여 貫(호적)에 올렸다”라고 한 기사이다.576)≪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3년.

 이처럼 백제가 전국적으로 호구를 파악한 것은 국가운영의 기본토대가 되는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근초고왕대에 담로제를 실시하면서 “향토에서 나는 생산물들을 모두 기록하라”고 한 것은577)≪日本書紀≫권 11, 仁德天皇 41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백제는 이렇게 파악된 호구를 토대로 노동력 징발과 貢物의 수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編戶制를 실시하였다. 편호는 국가가 수취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行政戶이다. 都彌傳에 보이는 “編戶小民”이라는 기사578)≪三國史記≫권 48, 列傳 8, 都彌.와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編戶를 각각 균등히 하였다”란 기록은579)<大唐平百濟國碑銘>(앞의 책). 백제의 편호사실을 확인해 주는 자료이다. 백제의 호구관계 사료를 보면≪삼국사기≫에는 멸망 당시의 호구가 76만호로 나오나,580)≪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0년.<唐平百濟國碑銘>에는 호는 24만, 인구는 620만으로,581)<大唐平百濟國碑銘>(앞의 책). 한편≪삼국유사≫에는 백제 전성기의 호수를 15만 2천 3백호로582)≪三國遺事≫권 1, 紀異 1, 卞韓 百濟.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호수에 차이가 나는 것은 전자가 자연호를, 후자는 편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시기의 백제가 호구와 토지를 파악할 때 각 호를 단위로 하였는지 아니면 촌락을 기본단위로 하였는지는 분명히 하기 어렵다. 신라의 경우 비록 통일 이후의 것이지만 村落帳籍에 의하면 촌락을 단위로 하여 호구와 우마·전답을 파악하고 있다.583)旗田巍,<新羅の村落>(≪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出版局, 1972).
金基興,≪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연구≫(역사비평사, 1991), 112∼150쪽.
이 시기의 백제도 아마 촌락을 단위로 하여 호구와 전답을 파악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호구와 전정을 파악하는 작업은 각 지방관의 책임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호구와 관련하여 각 지방관들이 올리는 보고서를 접수하고 이를 총괄하는 부서로는 외관 10부 중의 하나인 點口部로 생각된다.

 이처럼 전정과 호구의 파악을 토대로 하여 지방통치와 수취가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재지세력들의 독립성도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재지세력들은 방령이나 군장 또는 도사(성주)의 아래 方司·郡司·城(縣)司에 참여하여, 지방관이 조세수취나 노동력 징발 등의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데 실무적인 역할을 하였다. 재지세력들이 촌락사회에서 지방관을 보좌한 사례로는 풍달군장 흑치상지를 좌우에서 보좌한 10명의 酋長의 존재를584)≪三國史記≫권 44, 列傳 4, 黑齒常之. 들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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