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2) 군사제도
  • (2) 군사권의 행사와 위임

(2) 군사권의 행사와 위임

 군사권 행사의 구체적인 모습은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에 나가는 방법은 크게 親帥와 遣兵(出師·出兵)으로 나눌 수 있다.590)李文基, 앞의 책, 236∼245쪽 참조.

 친솔은 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다. 친솔의 사례는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12차례의 사례가 나온다. 이 가운데 고이왕 이전까지의 상황을 보면 온조대에 6차례, 구수왕대에 1차례가 나와 모두 7차례가 되어 전체의 약 2/3가 된다. 이는 소국연맹단계에서 군사권이 미분화된 상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견병은 왕이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지휘하게 하는 것이다. 이 견병의 경우를 보면 웅진천도 이전까지 모두 44건의 사례가 나오는데, 이 가운데 온조왕 때는 2차례에 불과하다. 이처럼 대외전쟁을 수행하는 모습이 친솔에서 견병으로 바뀐 것은 왕의 군사권 장악과도 일정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군사권의 실질적인 행사는 왕명을 받아 군부대를 거느리고 가는 장수들에 의해 행해진다. 군부대를 거느리고 출동하는 지휘관들은 좌평이나 좌장과 같은 관직명으로 나오는 경우, 달솔 등 관등으로 표기되는 경우, 장군의 명칭으로 표기되는 경우 등이 있다.

 이들은 대개 군지휘관이기 때문에 전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장군으로 불리웠다. 이 장군의 칭호는 왕명을 받아 부대를 거느리고 출정하려고 할 때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장군의 구체적인 명칭은≪삼국사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591)신라의 경우는 대장군·상장군·하장군 등의 구분이 있었다(≪三國史記≫권 40, 雜志 9, 職官 下, 武官). 다만≪南齊書≫백제전에 보이는 冠軍장군·征虜장군·龍驤장군·寧朔장군·建衛장군 등의 칭호는 중국의 晋이나 宋의 장군 칭호를 사용한 爵制的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사권이 왕에게 집중되고 일원화되면서 군사권을 행사하는 것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양태를 달리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왕이 직접 군사권을 행사하지 않고 신하에게 위임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정리하면 委政事·委兵馬事·委軍國政事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위정사는 근구수왕이 왕의 장인인 眞高道를 내신좌평으로 삼으면서 정사를 위임한 것이 유일한 예인데592)≪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구수왕 2년. 민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민정을 맡긴 것을 의미한다. 근구수왕은 태자시절에 군지휘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즉위 후에도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기도 하는 등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군사활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반국정은 내신좌평 진고도에게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위병마사는, 일반정사는 왕이 처리하고 대외전투를 중심으로 한 군사관계는 신하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는 兼知(內外)兵馬事가 있는데 兼知는 다른 관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군사관계의 업무를 겸임하여 주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병마사는 겸지병마사보다 특정인이 군사권 운용에 관여하는 정도가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군사권을 위임한 예로서는 고이왕이 眞忠을 좌장으로 삼은 후 內外兵馬事를 위임한 것이 처음이다.593)≪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7년. 이후 군사권을 위임받은 자의 직은 대개가 좌장이었다.594)아신왕대에 左將 眞武가 군사권을 위임받은 것이 그 예가 된다(≪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아신왕 2년). 따라서 고이왕 이후의 군사권은 좌장을 중심으로 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군국정사는 군사권과 민정권을 모두 위임한 것을 말한다. 이 위군국정사의 경우는 두 사례가 있다. 하나는 전지왕이 즉위 후 상좌평을 설치하면서 군국정사를 맡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삼근왕이 즉위하여 병관좌평 解仇에게 군국정사를 맡긴 것이다.

 전지왕의 즉위를 둘러싸고 지배세력 사이에는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진지왕을 옹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왕족의 일부와 해씨세력은 자기들 권력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최고의 좌평으로서 상좌평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지왕은 상좌평 餘信에게 군국정사를 위임하였던 것이다.595)≪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4년. 이는 전지왕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미약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잡혀 죽고 왕도 漢城이 함락되자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여 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웅진천도 후 해구는 문주왕 2년(476)에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그는 뜻밖의 천도로 말미암아 정치적 혼란이 심한 당시의 상항에서 병관좌평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였다. 나아가 그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삼근왕을 옹립한 후 군국정사 일체를 위임받았다.596)≪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4년 및 삼근왕 즉위년. 이렇게 볼 때 모든 군국정사를 특정 개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왕권이 매우 미약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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