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2. 지방·군사제도
  • 3) 성곽시설

3) 성곽시설

 백제의 성곽은 크게 도성과 지방의 주요한 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도성은 왕의 거처인 왕성과 이 왕성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경제·문화·행정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가졌다. 지방의 성은 각 지역의 방어를 위해 축조한 것으로서 방어성의 의미를 지닌다. 먼저 도성에 대해 정리를 해보기로 한다.

 한성도읍기의 왕도인 한성은 북으로는 한강을 끼고 남으로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 있으며, 동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험의 요새였다. 이 한성은 남성과 북성으로 이루어졌다.609)이 점은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군대가 개로왕을 공격할 때 북성을 먼저 공격한 후 다시 남성을 공격한 것에서 알 수 있다(≪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남성은 오늘날의 몽촌토성에 비정되고 북성은 풍납동토성에 비정된다.

 풍납동토성은 대체로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서 북벽이 약 300m, 동벽이 100m, 남벽이 200m, 유실되고 남은 서북벽이 250m쯤 된다. 서벽은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고 말았다. 발굴 결과 이 풍납동토성내에서는 동진에서 만들어진 종묘제기인 청동제초두 등이 출토되었고 목조기와집의 존재도 확인되었다.610)金元龍,≪風納里土城包含層調査報告≫(서울大 考古人類學科, 1967) 참조.

 몽촌토성은 길이가 2,285m이고 면적은 외성을 합칠 경우 9,300평이 된다. 토성의 형태는 자연구릉으로 방벽을 삼고 板築法으로 벽을 쌓았다. 외성에는 목책을 설치하였고 방호시설로서 해자를 둘렀으며 지대가 높은 곳에는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 성안에서는 발굴 결과 서진시대의 도자편 등이 출토되었으나 왕궁터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611)서울大學校博物館,≪夢村土城≫(1987) 참조.

 웅진도읍기의 왕성인 熊津城은 오늘날의 공산성이다. 현재 공산성은 토성과 석성으로 구분되는데 총길이는 2,660m이다. 공산성 발굴결과에 의하면 토성은 약 750m가 남아 있는데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이고, 석성은 약 1,900m인데 조선 초기에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공산성 안에는 동성왕 22년(500)에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는 臨流閣址가 있는데 남아 있는 초석의 배열에 의해 6칸×5칸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금강에 연하여 蓮池가 만들어졌고 근래에는 왕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612)安承周·李南奭,≪公山城百濟推定王宮址發掘調査報告書≫(公州大 百濟文化硏究所, 1987).
成周鐸,<百濟熊津都城硏究>(≪百濟硏究≫11, 1980) 참조.
이 왕성을 둘러싼 왕도의 범위는 분명하지 않으며 나성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613)兪元載,<熊津都城의 羅城問題>(≪湖西史學≫19·20, 1992)

 사비시대의 왕도는 왕성과 이 왕성을 둘러싼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비도성 안에는 扶蘇山城이 있다. 발굴 결과에 의하면 부소산성은 두개의 테뫼형(山頂式)산성과 하나의 包谷形산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산성이었다. 전체의 길이는 2,200m이고 성내의 넓이는 약 7만 평이다. 성내에서 望樓址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웅진지방에서 강을 따라 내려올 지도 모를 적을 감시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614)成周鐸,<百濟泗沘都城硏究>(≪百濟硏究≫13, 1982), 29쪽.

 이 부소산성을 외곽으로 둘러싸고 나성이 축조되었다. 나성에 대한 연구성과에 의하면 이것은 사비성의 동문지에서 동쪽 방향으로 뻗어 있는 능선을 따라서 靑山城까지 연결되었고 이 청산성 남쪽에는 월망지가 있었다. 청산성의 북문지에서 나성은 남향하여 石木里-東門址-筆書峰-군들고개의 능선을 따라 남으로 玉盃池에 연결되어 있다. 이 나성의 전면에는 宮南池가 있는데, 그 수원은 靑馬山城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일단 궁남지에서 모이도록 한 뒤 백마강으로 유출하게 되어 있다. 서쪽 나성은 사비성 서문지의 외부지점에서 현 유스호스텔-宮北里-舊校里-留水池-東南里-軍守里-城末里까지이다.615)成周鐸, 위의 글, 30∼33쪽 참조.

 나성의 둘레는 약 8㎞이고 나성내의 면적은 343만 4천 평에 달한다. 이 성내는 5부 5항으로 편제되었고, 왕이 거처하는 궁궐, 태자가 거처하는 태자궁, 시조를 모신 始祖廟,616)≪周書≫백제전에는 시조 仇台廟로 나온다. 천지에 제사를 드리는 祭壇, 귀족들이 정사를 논의하는 정청으로서의 南堂, 22부의 관청, 궁남지를 비롯한 각종 인공 못가 方丈仙山을 모방한 섬들이 만들어지고 또 화원 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경치가 좋은 곳에는 望海亭을 비롯한 각종 누대가 설치되고 있었고 定林寺址나 軍守里寺址의 존재에서 보듯이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또 도시부의 존재에서 미루어 볼 때 시장도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의 성들은 행정적 거점을 중심으로 하여 축조되었다. 백제는 교통·군사상의 요지에 성을 쌓고 행정구역으로서 기능하도록 하였다.≪舊唐書≫백제전에 의하면 멸망 당시의 백제는 5부 37군 200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성들의 대다수는 방어와 관련하여 산 위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산성이 중심으로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지방의 성 가운데 그 축조 규모를 대략 알 수 있는 것은 5方城이다. 5방성은 중방 古沙城·동방 得安城, 남방 久知下城, 서방 刀先城, 북방 熊津城을 말한다. 이 방성들은 험한 산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는데 석축으로 된 것도 있다. 고사성은 방 150보, 득안성은 방 1리, 구지하성은 방 130보, 도선성은 방 200보, 웅진성은 방 1리 반의 규모이다. 이 방성에는 군대가 주둔하였는데 그 수는 1,000∼7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방성 아래에는 그 통제를 받는 郡城이나 縣城(여러 소성)들이 있으나 규모나 시설은 알 수 없다.617)≪翰苑≫蕃夷部, 百濟.

 도성 외의 성으로 한성시대에는 彌鄒城과 關彌城 정도를 들 수 있다. 이 두 성은<광개토왕비문>에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취한 58성 중에 나온다. 미추성은 미추홀로서 오늘의 인천지방에 해당된다. 그런데 김정호의≪대동지지≫에 의하면 인천의 文鶴山上에는 비류성터가 있는데, 성문과 扇板과 沸流井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618)安鼎福,≪東史綱目≫1. 이 비류성은 미추홀을 방어하는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관미성은 백제 북쪽 변경지대의 요새로서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요해처였다.619)≪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즉위년.

 이외에 문헌에 보이는 지방의 성으로는 가림성·주류성·임존성 등이 유명하다. 가림성은 동성왕대에 축조된 성으로서 위사좌평 苩加로 하여금 진수하게 하였던 성이다.620)≪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동성왕 23년. 주류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福信·道琛 등이 부흥군을 일으켰을 때 그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하였는데 오늘날 한산의 乾芝山城에 비정된다.621)沈正輔,<百濟復興軍의 主要據點에 관한 硏究>(≪百濟硏究≫14, 1983), 174∼177쪽. 임존성은 黑齒常之 등이 부흥군을 일으킨 중심지였는데 오늘날 大興의 鳳首山城에 비정된다. 이 산성은 현재에도 남아 있는데 둘레가 2,450m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산성이었다고 한다.622)沈正輔, 위의 글, 160∼162쪽. 623)尹武炳·成周鐸,<百濟山城의 新類型>(≪百濟硏究≫8, 1977), 1∼3쪽.

 이러한 중요한 성들은 중심성을 보호하기 위해 부대적으로 小城이나 柵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구수왕 4년(217)에 沙道城 곁에 2책을 설치한 것이라든지, 실제 큰 산성 옆에 子城이 축조되어 있는 것이 그 예가 된다.

 산성은 축조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테뫼식산성, 포곡식산성, 복합식산성이다. 테뫼식산성은 산 정상부를 둘러싼 것이고, 포곡식산성은 산의 계곡을 자연능선에 따라 둘러싼 것이다. 그리고 복합식산성은 테뫼식과 포곡식을 포괄한 것이다.65)

 성을 축조할 때의 재료로는 土築도 있고 石築도 있는데 土石混築도 있다. 대개는 산의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것이다. 이 산성내에는 적의 공격을 파수하기 위한 망루가 있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창과 무기고 등이 시설되었다. 그리고 몇 개의 우물이 있어 식수로 공급되었다.

<盧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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