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 (1) 지배층의 토지지배 유형과 성격

(1) 지배층의 토지지배 유형과 성격

 백제의 토지제도는 관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624)백제의 토지제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白南雲,≪朝鮮社會經濟史≫(改造社, 1933;윤한택 옮김, 이성과 현실, 1989), 223∼226쪽.
박시형,≪조선토지제도사(상)≫(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60;신서원, 1994, 119∼126쪽).
姜晋哲,<三國時代의 土地制度>(≪韓國文化史大系≫Ⅳ,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9), 1187∼1194쪽.
≪三國史記≫백제본기에는 田租625)박시형은 賜田을 토지 자체를 분급하는 土田의 사여와 토지로부터의 조세 수취권을 분급한 田租의 사여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박시형, 위의 책, 50쪽).의 사여와 식읍의 지급에 관한 내용들이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들 기록은 대체로 말갈·고구려·신라와의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노획한 포로나 말과 함께 곡물이 지급되는 경우가 많으며, 흰 사슴과 같은 상서로운 짐승을 바친 충성의 대가나 또는 왕을 옹립한 공로로 일정한 양의 곡물이 지급되었던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들 자료를 일별할 때, 백제의 토지제도는 고구려나 신라에서와 같이 국가가 토지 자체를 지급하는 賜田의 형태는 보이지 않고, 수취된 조세미의 일부나 전쟁포로와 말 등을 어떤 특별한 공로가 있을 때마다 지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한 사례로서 다음의 기사가 참고된다.

전지왕 2년 가을 9월, 解忠을 達率로 삼고 漢城租 1천 석을 주었다(≪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위의 기사에서 해충은 전지왕을 옹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공로로 한성조를 지급받았다. 따라서 이는 전공이나 瑞物 진상 등과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비중이 크기 때문에 다른 곡물로 지급할 경우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신라의 경우 歲租가 녹봉의 성격으로626)신라의 세조는 토지 자체를 지급한 것이 아니라 특정 군현의 조에 대한 권리를 수여한 것으로 보아 백제의 한성조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고 있다(安秉佑,<6∼7세기의 토지제도>,≪韓國古代史論叢≫4, 1992, 287∼289쪽). 이해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보면 해충은 출신지인 한성의 일정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수취권을 수여받은 것이 아니라 한성의 국가창고에 보관된 조세 수납미627)竹旨郞의 고사에 나오는 能節租(≪三國遺事≫권 2, 紀異 2, 孝昭王 竹旨郞)는 富山城租의 일부를 이루는 세곡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세조로 분급되던 漢城租도 각 지역의 토지에서 징수한 세곡미를 수합하여 한성의 창고에 보관된 곡물을 뜻하며, 그 용도는 國用과 供上 등의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租는 국가에서 징수하고 국가에서 해당자에게 분급하였다(李景植,<古代·中世의 食邑制의 構造와 展開>,≪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88, 158쪽). 중에서 1,000석을 해마다 일정기간 동안 지급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왕을 옹립한 대가로 토지로부터 조세 수납된 특정지역의 전조에 대한 권리를 분급해 준 것이며, 후대 녹봉제의 연원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와 같이 백제는 국가에 대한 특별한 공로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특정지역의 전조에 대한 권리를 분급하였는데, 후대 귀족관료들에게 분급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연원이 되는 셈이다. 그 분급 내용은 농민들로부터 수취한 일정한 양의 조세미를 유공자에게 녹봉의 형식으로, 또는 일회적인 포상으로 급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에는 때때로 관등의 승급, 재화의 분급, 포로의 분배 등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다음 백제의 식읍지급 사례로는 의자왕이 왕서자 41인에게 좌평 신분과 식읍을 지급한 것이628)≪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17년 정월. 유일하다. 이는 의자왕이 왕족 중용정책의 일환으로 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의 식읍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나 성격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고구려나 신라의 예와 거의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식읍은 뛰어난 훈공이 있는 왕족이나 척신·고위관료 등 특별한 자들에게 수여한 일종의 경제적 특혜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 주대의 봉건제도 아래서 왕족과 공신에게 분봉하던 봉토에 기원을 둔 것으로, 우리 나라의 경우 삼국이 모두 채용하였다.

 백제의 경우 식읍의 내용이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나, 신라의 경우 비교적 잘 나타나 있어 참고된다. 즉 신라의 경우 삼국통일의 공으로 김유신에게 식읍 5백 호를,629)≪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下. 김인문에게는 두 차례에 걸쳐 3백 호와 5백 호를 수여하였는데, 뒤의 5백 호는 故大角干 朴紐의 식읍이었다.630)≪三國史記≫권 44, 列傳 4, 金仁問. 원성왕 즉위와 관련하여 왕위계승에서 패퇴했던 金周元의 경우는≪新增東國輿地勝覽≫강릉도호부조에 따르면 명주 관하의 翼嶺縣(양양)·三陟郡·斤乙於郡(평해)·蔚珍郡 등 여러 군현에 걸쳐 식읍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식읍의 규모는 封戶의 수로 정해졌으며, 일정지역 내에서 일부 토지에 설정되었는데, 김주원의 경우처럼 여러 군현에 걸쳐 있는 경우도 있었다. 식읍의 지배형태는 국가에서 지정한 지역의 봉호를 대상으로 租·調·力役의 부세를 직접 수취하는 형태였다.631)李景植, 앞의 글, 140쪽. 그리고 김인문이 박유의 식읍을 이어받고 있는 것처럼 세습은 원칙상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식읍은 중신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의 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신라 말 聖住山門의 터가 되었던 충남 보령 성주산 일대가 金昕 등 김인문의 가계에 의해 계속 점유되어 온 사례에서632)崔柄憲,<新羅下代 禪宗 九山派의 成立>(≪韓國史硏究≫7, 1972), 106쪽. 식읍이 경우에 따라서는 세습되어 식읍주들의 사적인 경제기반을 구축할 여지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식읍은 중신귀족들에 의한 대토지 사유화의 한 수단이 되었음은 물론 식읍지배를 통해 우리나라 토지제도사상 수조권 분급의 한 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633)金容燮,<前近代의 土地制度>(≪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394쪽.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지배층이 지배한 토지의 유형 가운데에는 국가나 왕실의 보유지가 있었다. 백제는 주변의 여러 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새로 차지한 영토는 우선적으로 국가나 국왕의 직할지로 귀속시켰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 보이는 백제의 전렵지인 西海大島(강화도), 橫岳(북한산),634)金正浩,≪大東地志≫권 1, 漢城府. 狗原(경기도 양주 풍양)635)酒井改藏,<三國史記の地名考>(≪朝鮮學報≫54, 1970), 46쪽. 등은 모두 국왕의 직속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 왕릉·궁궐·제단 등 지배층의 주요 시설물과 변경 요지의 군대에 부속되어 있는 토지도 광대하였을 것이다. 국가나 국왕의 소유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았던 당시에 국왕 자신도 왕토사상의 관념에 따라 전국에 걸쳐 많은 토지를 소유했을 것이며 이러한 국가나 왕실의 보유지는 주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 수묘역의 예에서 보듯이 일반 농민들과 노비노동에 의해 경작되었다. 그리고 왕실 보유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국왕 직할의 행정부서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성왕대에 설치한 2부사 가운데 穀部가 바로 이 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636)白南雲, 앞의 책, 224쪽. 이 곡부는 궁내부에 속한 관서 중에서 서열이 전내부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御供에 관계되는 곡물의 조달과 전국에 흩어져 있는 御料地의 경작·관리 등을 맡았을 것이다.

 한편 백제는 정복활동이 진전됨에 따라 사민과 개척을 활발히 하였다. 의자왕대에는 대야성을 빼앗고 그 주민 1천여 명을 서쪽지방으로 사민시킨 사례도 있었다.637)≪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년 8월. 백제가 웅진과 사비로 천도하였을 때에도 많은 사민이 행해졌을 것이다.638)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였을 때 한성의 민호도 대규모로 사민되었는데, 해씨는 아산 일대에, 진씨는 직산의 위례성(지금의 蛇山城) 일대에 각각 사민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基白,<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百濟硏究≫9, 1978, 10∼18쪽). 이렇게 새로 개간된 토지에는 신라가 소경을 설치할 때의 사례에서 보듯이 귀족과 호민을 비롯하여 많은 주민들이 함께 출신지역을 떠나 강제로 이주되었다. 특히 귀족들은 미개발지역에 이주하여 새로운 토지를 개간하고 소유함으로써 식읍이나 사전 등과 함께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밖에 백제는 침류왕대 이후 불교가 국가의 공인과 보호 아래서 “승려와 사탑이 대단히 많았다”639)≪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고 할 정도로 크게 번창하였다. 이에 따라 사원은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많은 토지와 재화를 소유하게 되면서 대토지 소유자로 등장하였다. 성왕 때에 설치한 국왕 직속의 내관 12부서 가운데 왕실의 佛事업무를 관장하는 功德部에서는 왕실의 원찰에 노비와 함께 많은 토지를 바치는 일도 담당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는 전승, 서물진상, 왕의 옹립 등과 같은 어떤 특별한 공로가 있을 경우, 그 유공자에게 조세미의 부분적인 분급권을 수여하였다. 또한 식읍을 비롯하여 국가나 왕실의 토지보유 및 새로운 토지의 개간 등으로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화가 진행되었고, 아울러 사원도 왕실과 귀족들의 기진과 기탁 등에 의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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