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 (2) 농민의 토지소유

(2) 농민의 토지소유

 삼국은 국왕을 중심으로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철제로 된 농업토목 용구의 사용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적 소유가 진전되고, 경작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가 소멸되어 점차 개별적인 토지사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즉<영일냉수리신라비>에 보이는 節居利의 소유권 문제640)韓國古代史硏究會,≪韓國古代史硏究≫3-迎日冷水里新羅碑特輯號-(知識産業社, 1990) 참조.나 溫達이 平岡公主가 가져온 패물을 팔아 토지와 집, 소와 말, 그리고 생활필수품을 마련한 사례641)≪三國史記≫권 45, 列傳 5, 溫達.는 신라와 고구려에서 사적 소유가 상당히 진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도≪周書≫백제전의 “도둑질하는 자에게 장물의 두 배를 징수케 한다”는 율령과 관련된 조항에서 국가가 재화에 대한 사유권을 보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가 농민들의 오랜 관행인 토지의 개간·매매·상속 등에 대해 관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농민의 토지소유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데는 국가가 국유지든 사유지든 소유권 여부와는 관계없이 경작지를 기준으로 농민의 조세미를 수취하여 대부분의 국가재정원을 확보하고자 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성왕 때에 설치한 22부사 중에서 토지업무를 담당한 부서는 보이지 않고, 특별한 공로가 있는 귀족과 장군들에게 포상의 일환으로 전조권이나 일정한 지역의 부세 수취권에 한정된 식읍과 사전 등을 수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경작자인 농민들에게 어떤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토지를 지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케 한다. 그러나 변경에의 사민이나 농토에서 떠난 游食농민을 본적지에 귀농시키는642)≪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무령왕 10년 정월. 일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안정된 생산기반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토지를 분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백제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업경영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643)본장 3절 1항 참조. 특히 소를 사용한 경작으로 토질이 개선되고 노동력이 절감된 결과로 농업경영의 방식도 종래의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집체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점차 소농 중심의 농업경영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644)전덕재,<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사회변동>(≪역사와 현실≫4, 역사비평사, 1990), 27∼28·33쪽.
安秉佑, 앞의 글, 278쪽.
그러나 4∼5세기 무렵에 철제농기구는 소수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집중 소유되고 있어 농민들은 토지소유주의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아 소농 중심의 농업경영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있다(李賢惠,<三國時代의 農業技術과 社會發展>,≪韓國上古史學報≫8, 1991, 69∼77쪽).
개별 농가가 농업경영단위로 성장함으로써 개별 농가에 의한 토지소유가 촉진되었으며, 농민층의 다양한 계층분화도 가져오게 되었다. 5세기 후반 編戶小民으로 존재했던 도미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례에서645)≪三國史記≫권 48, 列傳 8, 都彌. 백제 자영 소농민층의 성장을646)梁起錫,<三國史記 都彌列傳 小考>(≪李元淳敎授華甲紀念 史學論叢≫, 1986), 15쪽.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영 소농민들에 의해서 경작되는 토지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제의 농민층 가운데에는 ‘가난하여 자립해 살 수 없는 자’647)≪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다루왕 11년 10월.로 표현된 빈한한 無田農民들도 있었다. 그 밖에 군대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품을 팔았다는 신라 眞定의 예를648)≪三國遺事≫권 5, 孝善 9, 眞定師孝善雙美. 통해 傭作농민의 존재도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농민층의 사회분화는 자연재해나 귀족층에 의한 과도한 수탈과 토지의 집적화 현상에 따라 부단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귀족들의 사적 지배권을 억제하고 국부를 창출하는 담당자인 농민들을 국가의 공민으로 편제하기 위해 농민 안정책을 적극 펴나가게 되었다. 자연재해 등으로 생산기반을 잃은 농민들이 유망하거나 또는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사례와 같이 귀족층의 사유지 확대를 억제하거나,649)≪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2년 9월. 또는 농민 안정책과 통제책의 일환으로 유이민의 귀농, 적절한 조세감면과 구휼정책을 펴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백제는 통치체제를 정비해 나가면서 정복전쟁을 통해 획득한 토지와 전리품을 훈공있는 귀족층에게 식읍과 특정지역의 전조 수취물에 대한 권리를 사여함으로써 토지를 비롯한 재산의 사유화를 촉진시켰다. 또한 지배층의 사적 통제와 수탈로부터 생산자인 농민들과 그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권농정책과 담세능력을 감안한 수취제도를 아울러 정비하여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화 현상과 함께 소유권적 토지지배의 단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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